이슬람 시각으로 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 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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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10-13 09:39 조회447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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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시각으로 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 원인은?
기사입력시간 : 2023/10/11 [21:32:00]
박명훈 기자
10월 7일 팔레스타인 하마스-이스라엘 간 전쟁이 촉발된 가운데 중동지역 유력 매체 알자지라는 9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은 무엇 때문일까? 간단한 안내서」 보도를 했다.
알자지라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실향민으로 만들었으며 100여 년 전에 행해진 (영국의) 식민 행위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면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완전히 봉쇄하는 전쟁범죄로 식량, 연료와 필수 상품 공급을 중단시켰다”라고 비판했다.
보도에는 이스라엘과의 무장 투쟁을 강조하는 정당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 상황 등 팔레스타인 역사 100여 년이 담겼다. 보도 전문을 번역해 소개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은 무엇 때문일까? 간단한 안내서」
1. 밸푸어 선언은 무엇이었나?
(1차 세계대전 후반기였던) 100년보다 더 오래 전인 1917년 11월 2일, 당시 영국 외무부 장관이었던 아서 밸푸어는 영국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인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썼다.
67개 단어로 된 편지는 짧았지만 그 내용은 팔레스타인에 지진과 같은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여진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 수립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이 편지는 밸푸어 선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선언의 본질은 유럽의 강대국인 영국이, 아랍 원주민들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팔레스타인에 민족 국가를 세울 것을 목표한 유대 민족주의) 운동을 현실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영국이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은 1923년에 만들어졌고 1948년까지 지속됐다. 그 시기 영국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대규모로 유입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유대인 상당수가 유럽의 나치주의를 피해 팔레스타인에 왔는데,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와서도 현지 주민들의 반대 시위 및 파업에 직면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에 유대인이 들어온 것과 영국이 자신들의 땅을 몰수해 유대인들에게 넘기는 것에 놀랐다.
2. 1930년대에 벌어진 일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유대인들 간 고조된 긴장은 결국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된 아랍 반란으로 이어졌다.
1936년 4월, 새로 구성된 팔레스타인의 아랍 국가 위원회는 영국 식민주의와 유대인 이민 증가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시작했고 세금 납부 거부와 유대인 제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6개월 동안의 파업은 영국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영국군은 대규모 체포 작전을 벌였고 징벌적인 주택 철거에 나섰다. 이는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관행처럼 지속하는 행위들이기도 하다.
1937년 말에 시작된 2차 봉기는 팔레스타인 농민 저항 운동에 의해 주도됐다. 이 때 저항의 대상은 영국군과 식민주의였다.
영국은 1939년 하반기까지 팔레스타인에 병력 3만 명을 집결시켰다. 영국의 항공기가 마을을 폭격했다. 통행 금지령이 내려진 가운데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주택은 철거됐고, 구금과 즉결 살인도 횡행했다.
영국은 이와 함께 유대인 정착민 공동체(이슈브)와 협력해 무장 단체를 결성하고 ‘야간 특전 부대’라는 군대를 결성했다.
이슈브는 비밀리에 무기를 수입했다. 나중에 이스라엘 군대의 핵심이 된 유대인 준군사조직인 하가나를 확대하기 위한 무기 공장도 설립됐다.
봉기가 일어난 3년 동안 팔레스타인 주민 5,000여 명이 숨졌다. 1만 5,000여 명에서 2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5,600여 명이 투옥됐다.
3. 유엔의 분할 계획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인구의 비중은 1947년까지 33%로 증가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전체 땅의 6%만을 가지고 있었다.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 181호를 채택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결의안을 거부했다. 유대인이 비옥한 해안 지역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땅의 56%를 차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팔레스타인의 94%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았고, 인구 비중은 67%를 차지했다.
4. 1948년 팔레스타인 나크바
유대인의 시온주의 준군사 조직들은 1948년 5월 14일에 팔레스타인에서의 영국 위임 통치가 끝나기도 전부터 팔레스타인의 마을과 도시들을 파괴하는 군사 작전에 착수했다. 앞으로 세울 유대인 나라의 국경을 확장하겠다는 의도였다.
1948년 4월 예루살렘 외곽의 데이르 야신 마을에서 팔레스타인 남성, 여성, 어린이 100여 명이 살해됐다. 이는 이후 팔레스타인을 겨눈 군사 작전의 본보기용이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500개 이상의 팔레스타인 마을과 도시들이 파괴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를 나크바(대재앙이라는 뜻의 아랍어)라고 불렀다.
팔레스타인 주민 1만 5,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가운데 수십 건의 학살도 자행됐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78%를 점령했다. 나머지 22%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금의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다.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벌인 무력 행동에 의해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터전을 잃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팔레스타인 전역과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와 인접한 58개의 불결한 난민촌으로 흩어졌다. 현재 팔레스타인 주민 6백만 명이 난민 상태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5일, 건국을 발표했다.
다음날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시작됐고 1949년 1월 전쟁이 끝났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와 휴전했다.
1948년 12월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고향으로 귀환할 권리를 촉구하는 결의안 194호를 통과시켰다.
5. 나크바 이후
최소 15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이 관할하는 지역에 남았다. 주민들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기까지 20년 동안 엄격히 통제된 군사 점령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이집트가 가자지구를 떠안았고, 요르단은 1950년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대한 통치를 시작했다.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결성되었고, 1년 후 정당 파타가 창당됐다.
6. 6일 전쟁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아랍 연합군과 벌인 6일 전쟁 동안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등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과 시리아 골란고원, 이집트 시나이반도 등을 점령했다.
어떤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이는 아랍 연합군이 후퇴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전쟁의 결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두 번째 강제 이주를 겪어야 했다.
1967년 12월,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한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중 전선이 결성됐다. 이후 10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좌파 단체들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공격과 비행기 납치 등을 했다. 이 소식이 관심을 끌면서 세계는 팔레스타인이 얼마나 곤경에 처했는지 알게 됐다.
이스라엘은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정착촌 건설을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신들을 차별하고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시민적 표현을 금지하는 군사적 점령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이스라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같은 땅에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유대인 정착민들 거주하는 이중 체제가 만들어졌다.
7. 1차 인티파다(무장봉기) 1987~1993년
1987년 12월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태운 승합차 2대와 충돌했고 팔레스타인 주민 4명이 희생됐다. 이후 최초의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무장봉기)가 폭발했다.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이스라엘군 탱크와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졌고 시위는 요르단강 서안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 점령에 대항해 무장 저항에 가담한 무슬림 형제단의 분파인 하마스 운동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스라엘군의 강경 대응은 이츠하크 라빈 당시 국방부 장관이 주창한 이른바 ‘골쇄 정책’(Break their Bones policy)으로 요약된다. 여기에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향한) 즉결 처형과 대학 폐쇄, 활동가 추방, 거주지 파괴 등이 포함됐다.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주도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점령을 끝내고 팔레스타인 독립을 확립하기 위해 헌신하는 팔레스타인 정당들의 연합인 통일국가지도부의 항쟁이 개입했다.
1988년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했다.
인티파다는 대중 동원, 대규모 시위, 시민 불복종, 조직화된 파업, 공동 협동조합 등이 특징이다.
이스라엘 인권단체인 베첼렘에 따르면 인티파다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에 의해 사망한 팔레스타인 주민은 1,070명으로 이 가운데 237명의 어린이가 포함됐다.
17만 5,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체포됐다.
인티파다로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충돌의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8. 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 협정 서명과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받은 과도 정부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설립되면서 막을 내렸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2국가 해결책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60%와 국토 및 수자원의 상당 부분을 이스라엘이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오슬로 협정에 실질적으로 서명했다.
오슬로 협정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주민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팔레스타인의 첫 정부로서 동예루살렘에 수도를 두고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독립국가를 운영하는 보장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스라엘에 반하는 정치 행동과 반대자들을 단속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군대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이스라엘 점령군의 부패한 하청업자로 보고 있다.
1995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주변에 전기 울타리와 콘크리트 벽을 설치했고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갈라진 팔레스타인 영토 사이의 상호 작용을 단절시켰다.
9. 2차 인티파다
2차 인티파다는 2000년 9월 28일 리쿠드 야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그 주변에 배치된 수천 명의 보안군과 함께 알 아크사 이슬람 사원을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를 도발로 받아들였다. 팔레스타인 시위대는 이스라엘군과 충돌했는데 이틀 동안 팔레스타인 주민 5명이 숨졌으며 200명이 다쳤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규모가 큰 무장 봉기가 촉발됐다. 2차 인티파다 기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경제와 사회 기반 시설에 전례 없는 피해를 입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통치를 받는 지역을 다시 점령했고 팔레스타인의 생활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분리 장벽 건설을 시작했다.
국제법상 다른 나라의 땅에 정착촌을 세우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주민 수십만 명은 기존의 유대인 정착민들이 수년에 걸쳐 빼앗은 팔레스타인 땅에 세운 식민지로 이주했다. 이스라엘 정착민의 전용 도로와 사회 기반 시설이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가르게 되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터전이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도시들과 마을들은 반투스탄(인종을 차별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만들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분리 거주 지역을 뜻함)으로 전락했다.
오슬로 협정이 체결될 당시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살았던 유대인 정착민들은 11만 명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빼앗은 10만 헥타르(390 평방 마일)가 넘는 땅에 사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70만 명이 넘는다.
10. 팔레스타인 분할과 가자 지구 봉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2004년 숨졌다. 1년 뒤 2차 인티파다가 끝났고 가자지구의 이스라엘 정착촌은 해체됐다. 이스라엘 군인과 정착민 9,000여 명은 이 지역을 떠났다.
1년 후인 2006년,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처음으로 총선에서 투표를 했다.
총선에서는 하마스가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파타-하마스 내전이 몇 달 동안 계속되면서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숨졌다.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파타를 추방했고 파타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주요 정당으로서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일부 지역을 통제했다.
2007년 6월,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라며 비난했고 가자지구를 사방팔방 포위하는 육·공·해 봉쇄령을 내렸다.
11. 가자지구에서의 전쟁
이스라엘은 2008년, 2012년, 2014년, 2021년 네 차례에 걸쳐 가자지구에 장기간 군사 공격을 가했다. 어린이들을 포함해 수천여 명의 수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만 채의 가옥과 학교 그리고 상업 건물들이 파괴됐다.
봉쇄로 인해 철과 시멘트 같은 건설 자재들은 가자지구에 들어오지 못했고 파괴된 마을의 재건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스라엘은 2008년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면서 독가스 등 국제사회에서 금지된 무기를 사용했다.
2014년 이스라엘은 50여 일에 걸쳐 민간인 1,462명과 어린이 500여 명을 포함해 2,100여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살해했다.
이스라엘이 ‘보호지 작전’이라고 부르는 이 공격으로 약 1만 1,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부상당했다. 또 2만 채의 가옥이 파괴됐으며 이재민 50만여 명이 발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