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기획-정전·한미동맹 70년②-박정희·김일성 간접대화로 7·4성명…이후 분단독재의 길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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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7-17 09:44 조회54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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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남북 적대적 공생
대한민국(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은 전쟁을 멈추기로 한 정전협정(1953년 7월27일) 이후 언제부터 다시 마주 앉아 ‘대화’하고 ‘합의’했을까?
1971년 8월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 제1차 파견원 접촉이 남북 당국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접촉한 첫 사례다. 정전 18년 만이다.
남: 안녕하십니까?
북: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
남: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파견한 이창열과 윤여훈입니다.
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에서 나온 염종련입니다.
남: 신임장 제시합니다.
북: 이것이 우리 신임장입니다.
남: 알았습니다. 적십자에 오래 계셨습니까?
북: 조금 (적십사에) 나갔습니다.
남: 전 좀 오래되었습니다. 이번에 어때요, 수해가 많이 안 졌습니까?
북: 수해가 없었습니다.
남: 아, 그러세요.
북: 그러면 우리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봅니다.
남: 예.
북: 우리는 앞으로도 연락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종종 만나 봤으면 합니다.
남: 예, 감사합니다. 또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남: 안녕히 가십시오. 종종 뵙겠습니다.
북: 안녕히 가십시오.
1971년 8월20일 낮 12시1분부터 4분까지 3분이라는 짧은 순간에 휘몰아치듯 이뤄진 남과 북의 첫 당국 차원 공식 대화 기록이다. 남과 북은 적십자 파견원의 첫 접촉 한달여 만인 1971년 9월29일 남북 적십자 제2차 예비회담에서 판문점 남쪽 구역 ‘자유의 집’과 북쪽 구역 ‘판문각’에 각각 회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이를 잇는 직통 왕복 전화를 설치하기로 했다고 각자 발표했다.(남북 직통전화는 합의 발표 일주일 전인 9월22일 개통됐다.) 분단과 전쟁으로 완전히 끊긴 남과 북의 소통 창구가 다시 마련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남북 직통 연락선의 시작이다.
이후 남과 북은 2년 남짓 꾸준히 만나 대화하고 협상해 이른바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으로 유명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결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남북 당국 대화는 적대와 갈등을 뒤로하고 화해와 협력을 지향하겠다는‘평화번영’의 바람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의 중국 비밀 방문(1971년 7월9~11일)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1972년 5월 이전 베이징 방문 계획’ 발표(1971년 7월15일)라는 냉전 질서와 동북아 정세 급변에 대응하려는 상호 탐색전 성격이 짙었다.
한국전쟁 때 서로 총부리를 겨눈 미·중의 역사적 화해에 맞닥뜨린 남쪽은 미국한테, 북쪽은 중국한테 버림받을까 걱정했다. 남의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주한미군 2만명 감축 발표(1971년 2월6일)를 하자, 비밀 핵개발을 지시(1971년 11월)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1971년 12월6일)했다. 북의 김일성 내각 수상은 ‘수령 독재’를 도모하는 한편으로 중국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접근하려 했다.
무엇보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서로의 ‘진짜 생각’을 알고 싶어 했다.
북이 먼저 움직였다. 1971년 11월20일 적십자 대표로 위장한 김덕현 조선노동당 중앙위 조직 담당 책임지도원이 역시 적십자 대표로 위장한 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한테 “위에서 신임하는 사람, 말하자면 가장 높은 데서 신임하는 사람들이 비밀접촉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듬해 3월28~30일 남의 정홍진이 평양으로 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4월19~21일 북의 김덕현이 서울로 와 ‘권력 2인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났다. 전후 남북 사이 첫 밀사 교환이다. 닉슨의 중국 방문(1972년 2월21~28일) 직후다.
1972년 5월 이후락이 비밀 방북해 김일성과 두차례 회담(5월4일)을 했다. 이후락 방북을 계기로 서울-평양 직통 연락선이 처음으로 설치됐다. 그 직후 북의 박성철 부수상이 비밀 방남해 박정희와 만났다(5월29일). 남북 정상의 전후 첫 ‘간접 대화’였다. 북의 협상 창구가 김영주에서 박성철로 바뀐 건, ‘2세 승계’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싶어 한 김정일의 견제 때문이다.
1972년 7월4일 오전 10시 이후락과 박성철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전후 19년 만에 이뤄진 남북 당국의 첫 문서 합의다. 이후락은 그날 기자회견에서 북을 기존의 호칭인 ‘북괴’가 아닌 ‘북한’이라고 했다.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이들이 환호했다. 당시 석간이던 <동아일보>는 “남북통일 자주·평화원칙 합의”라는 1면 제목과 함께 그날치 8개 면 중 7개 면을 관련 기사로 채웠다.
그러나 7·4 공동성명을 만든 박정희와 김일성의 속내는 뭇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화해와 협력에 있지 않았다. 남과 북은 ‘통일 3원칙’에 합의하고도 상대를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7·4 공동성명에서 대한민국은 “서울”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평양”으로, 남북 정상은 “상부”로 표기됐다. 남과 북의 국호와 최고지도자 직책을 공식 인정하지 않으려는 꼼수였다.
‘마각’은 금세 드러났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7·4 공동성명과 ‘남북대화’를 영구 독재의 길을 여는 도구로 악용했다. 박정희는 7·4 공동성명 발표 석달 뒤인 10월17일 흔히 ‘유신독재’라 불리는 ‘분단독재’로 치달았다. 그날 저녁 7시부터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등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남북대화를 위해 헌법 기능을 정지시킨다는 언어도단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하루 전인 10월16일 남의 정홍진은 북의 김덕현을 판문점에서 만나 박정희가 ‘유신 선포 특별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미리 알렸다.
김일성은 1972년 11월3일 평양에서 이후락을 다시 만나 박정희한테 ‘비단자수 벽걸이 장식’ 선물을 전해달라고 했다. 박정희는 그해 12월1일 서울에서 박성철을 다시 만나 만찬을 대접했다.
그리고 운명의 1972년 12월27일. 남에선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의 ‘분단독재 헌법’, 북에선 ‘사회주의헌법’이라는 이름의 ‘수령독재 헌법’이 공포됐다. 영구 집권을 노린 박정희와 김일성이 서로 짰다고 의심할 수도 있는 공교로운 택일이다. 내부의 ‘반대 의견’을 절멸시키려던 박정희처럼, 김일성도 헌법 개정으로 내각을 없애고 주석제를 채택해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제도화했다.
사실 박정희와 김일성은 이후락-박성철을 매개로 한 간접 대화로 서로 ‘전쟁 의지가 없음’을 확인했다. 예컨대 김일성은 이후락을 만나 “‘(남쪽이) 미국·일본과 결탁해 전쟁하려 하지 않는다, (북쪽이) 남침·적화통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회담의 성과”라며 “절대 전쟁하지 않는다고 박 대통령한테 전하시오”라고 말했다. 중앙정보부는 이후락과 김일성의 1972년 11월3일 회담 뒤 작성한 내부보고서에서 ‘김일성의 의도’를 이렇게 평가했다.
“경제개발을 위해 군비를 줄이려고 한다. 남이 북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외국 자본과 기술 도입을 추구하며 부분적으로 경제정책을 중공업 위주에서 소비품 생산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박정희와 김일성은 이후락-박성철을 매개로 한 간접 대화에서 발견한 화해협력의 씨앗을 틔울 생각은커녕, 오히려 각자 영구 집권을 향한 분단독재체제 강화에 매진했다. 남북관계를 내부 권력 다지기에 악용한 것이다. 학자들이 박정희와 김일성의 선택을 “적대적 공생”이라 평가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1970년대 초반 박정희-김일성의 ‘간접 대화’가 남긴 긍정적 유산이 없지 않다. 정치적 속내가 어디에 있든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맞닥뜨려 상대의 진의를 살피는 대화로 남북 최고통치자의 ‘전쟁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상호 확인하고, 우발적 무력충돌과 오해를 피할 직통 연락선을 전후 최초로 마련한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취임 1년이 지나도록 당국 대화를 한번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남북 직통 연락선마저 끊기도록 남북관계 관리에 실패한 윤석열 정부가 곱씹어봐야 할 일이다.
1970년대 초반 전후 첫 당국 대화가 이후 남북 당국 대화와 교류협력의 ‘참조 선행 모델’을 제시한 사실도 중요하다. 비공개 물밑 접촉 뒤 밀사 교환과 공개 당국 회담의 배합, 인도적 사안-경제사회문화 교류-정치군사 문제의 병행 논의 방식이 그것이다. 반면, 분단 상황의 국내 정치적 악용은 극복해야 할 부정적 유산이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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