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기획-정전·한미동맹 70년⑥-‘뒤통수의 연속’ 북핵위기 30년…북미·남북 불신, 평화 막았다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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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7-17 10:01 조회56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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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핵위기 현주소
“나라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
1993년 3월12일, 북한은 <조선중앙텔레비전>을 통해 엔피티 탈퇴를 발표했다. 30년 동안 이어질 한반도 핵 문제의 시작이었다. 이후 한반도는 이 문제를 두고 협상→약속 파기→상호 비난→긴장 고조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북한의 엔피티 탈퇴 한해 전인 1992년 남북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지만,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993년 1월 북한이 다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있다는 발표를 내놓으며 분위기가 급변했다. 한·미는 중단했던 1993년도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한·미 팀스피릿 훈련과 국제원자력기구의 북핵 특별사찰 요구가 명백히 북한 체제를 위협한다고 여겼다.
북한 핵개발은 냉전체제 해체와 함께 시작된 ‘우방’ 중국과 러시아의 이탈로부터 비롯했다. 특히 한국이 ‘북방정책’을 통해 1990년 한-러 수교에 이어 1992년 8월24일 한-중 수교까지 하자 북한은 충격을 받았다. 한-중 수교 한달여 전인 1992년 7월15일 중국은 첸치천 외교부장을 필두로 한 사절단을 평양에 파견해 사정을 설명했다. 묘향산 별장에서 첸 부장 일행을 맞은 김일성 주석은 이를 중국의 배신 행위로 간주하고 “우리는 자주노선을 걷겠다”고 했다. 북한은 이후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94년. 북핵 위기로 긴장이 고조된 한반도는 전쟁 위기로 치닫는다. 그해 3월19일 남북 간 특사 교환을 위해 열린 8차 남북실무접촉에서 박영수 북쪽 회담 대표가 송영대 남쪽 대표에게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되고 만다”고 했다는 발언이 알려졌다. 당시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정밀 타격 방안까지 고려했다.
일촉즉발의 한반도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그해 6월15일 방북하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카터 전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북한이 핵개발을 멈추면 미국 등이 대북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것에 합의한다. 이후 북-미는 기본합의서를 체결한다. 북-미는 △북한 영변 핵시설 가동을 동결하고 △사찰에 동의하며 △북한이 엔피티에 남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고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지 않는 데 합의했다.
2002년 한반도에 2차 북핵 위기가 찾아온다.
위기는 2002년 10월3일 제임스 켈리 특사를 대표로 한 미국 협상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탄두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시작됐다. 2003년 8월27일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개국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을 시작했다.
6자 회담은 2005년 9·19 합의를 만들어낸다. 9·19 합의를 통해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핵 계획을 포기하고 조속한 시일 안에 탈퇴했던 엔피티에 다시 복귀하기로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북한과 관계정상화 조처를 하기로 약속했다. 동시에 6자 회담국은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존중하고 경수로 제공과 관련한 논의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은 9·19 합의 이튿날인 9월20일, 북한 불법 자금 세탁 우려가 있다며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 관련 계좌 50개에 예치된 2400만달러를 동결했다. 북한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2006년 10월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의 1차 핵실험으로 치달았다.
핵실험 뒤 북-미는 다시 6자 회담 틀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의 핵시설 불능화에 대응해 대북 경제와 에너지 지원 제공을 골자로 하는 10·3 합의를 도출했다. 북한은 2008년 6월27일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모습을 생중계했고, 미국 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해제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검증단의 핵시설 접근을 허용했고, 핵불능화 작업이 재개됐다.
그러나 검증 방법을 두고 북-미는 다시 갈등했다. 2009년 5월25일 북한은 2차 핵실험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한 뒤 북한은 핵 보유를 공식화했다.
2012년 북한은 개정헌법 서문에서 “김정일 동지께서는 우리 조국을 불패의 정치사상 강국, 핵 보유국, 무적의 군사 강국으로 전변시키시였으며 강성국가건설의 휘황한 대통로를 열어놓으시였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2017년 점증한 북핵 문제는 다시 한반도를 1994년에 버금가는 위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2017년 다시 협상의 문이 열렸다. 그해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을 국제 무대 대화 테이블로 이끌어냈다.
남북은 평양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9·19 군사분야합의서를 통해 한반도를 항구적인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가기로 합의했다.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를 시범 철수하고, 공동경비구역(JSA)을 비무장화하기로 했다. 이어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완전한 비핵화 △평화체제 보장 △북-미 관계 정상화 추진 △6·25 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 등 4개 항에 합의하고 다음 회담을 약속했다.
하지만 해가 바뀌자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돌변했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은 결렬됐다. 초강경 대북 매파인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을 보면 김 위원장은 2월28일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린 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영변 핵시설을 양보하는 게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그게 미국 언론에서 얼마나 집중조명받을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영변 외에 다른 제안을 추가할 수 없겠느냐면서, ‘완전한 제재 해제’ 말고 ‘제재를 1% 경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없을지 물었다. 북한이 수용하기 곤란한 추가 요구를 돌발적으로 던진 것이다.
볼턴 보좌관은 “이게 그 회담에서 최악의 순간이었다. 만약 김정은이 거기에 ‘예스’를 했다면 두 사람은 미국에 재앙적인 합의를 하는 것이었다”며 “다행히, 김정은은 ‘나는 아무것도 못 얻는 것’이라며 그걸 물지 않았다”고 적었다. 극적으로 다가선 남북과 북-미 사이에 다시 깊은 불신의 골이 파인 순간이었다.
‘하노이 노딜’에 관해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미국의 경우 실무자와 대통령 사이에 정책 조율 등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의 역할은 상당히 제한돼 있었다”며 “(한국이) 정직한 중재자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2023년 여름. 한반도는 다시 냉랭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 비핵화를 하면 경제와 민생을 지원하겠다는 담대한 구상을 내놨지만, 실제 행동은 초강경 대북 정책으로 기울었다. 북한은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의 2022년 8월19일 담화에서 “우리는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라며 맹비난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중국과 소련이 핵을 개발하기 전까지 북한의 입장은 반핵이었다.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지금 북한을 ‘반핵’ 시절로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같이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신형철 기자 newir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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