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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기획-정전·한미동맹 70년⑦-노골화하는 ‘미국 우선주의’…동맹 아닌 한-미 협력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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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7-17 10:03 조회5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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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화하는 ‘미국 우선주의’…동맹 아닌 한-미 협력은 불가능한가


이제훈입력 2023. 7. 3. 05:05수정 2023. 7. 4. 13:55
[한겨레 창간기획-정전·한미동맹 70년][정전협정·한미동맹 70년]
⑦동맹 아닌 한-미 협력은 불가능한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맨 왼쪽)이 2022년 5월20일 취임 뒤 첫 방한 일정으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방문해 이재용 부회장의 안내로 공장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WELCOME!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ROK & USA”(환영! 한-미 상호방위조약)

한국전쟁을 멈춘 지 열사흘 뒤인 1953년 8월9일치 <조선일보>는 1면 머리기사로 한-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 소식을 보도했다. 전날 변영태 외무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은 경무대에서 만나 30초 만에 조약을 가조인했다. 이례적인 영어 제목에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에 대한 당시 한국 사회의 달뜬 분위기가 묻어난다. 그리고 두달쯤 뒤인 10월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됐다. 70년 한-미 동맹의 출발이었다.

1953년 8월8일 오전 10시6분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에서 “30초” 만에 끝난 변영태 대한민국 외무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의 한-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 직후 덜레스 장관(오른쪽)과 대화하는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조약 가조인식엔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한 대한민국 정부 각료 전원이 참석했다. “적 재침 시 충분 군원(軍援)”이라는 <동아일보> 기사의 부제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이 조약을 든든한 ‘안전 담보’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의 요구만 담긴 것은 아니었다. 가조인과 함께 발표된 이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의 공동성명을 보면 한-미 사이 긴장과 균열이 감지된다.

미국 정부는 한국군이 유엔군사령부, 곧 주한미군의 지휘를 받는다는 사실을 명시했다. 공동성명에는 “한국은 국련(유엔)군사령부의 지휘하에 있어 일방적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돼 있다. ‘북진 통일’을 부르짖던 이승만 대통령의 “일방적 행동”을 제어하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아울러 미국은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나더라도 의회 승인을 받았을 때만 참전할 수 있다는 ‘안전장치’를 둬 이 대통령의 ‘자동 개입’ 요구를 뿌리쳤다.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에 맞서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는 조약 3조가 그것이다. “한국 요구에 미국이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형태로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만들어진 것”(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이라는 평가의 배경이다. 미국은 ‘북진 통일’을 외치는 이승만 정부를 제어해 ‘현존 질서’(분단 질서)를 유지하는 안전판으로 동맹 조약을 택한 셈이다. 이처럼 한-미 동맹은 양국의 협력과 갈등이라는 ‘동상이몽’ 아래 탄생했다.

70년이 흐른 지금. 한-미 동맹은 ‘성공한 동맹’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은 냉전 시기 한국을 “반공투쟁의 전진기지”이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진열장”으로 만들려 한 목적을 이뤘다. 한국은 안보를 미국에 기대며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바뀐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됐다.

베트남 파병 장병 환송식 장면.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동맹 70년은 파란만장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미 동맹을 “긴장 속의 동맹” “갈등하는 동맹”이라고 정의했다. 박 교수는 ‘미국의 범위’(American Boundary) 개념을 들어 “미국은 (한국에서) 좌파 공산체제와 우파 파시스트체제의 제도화를 모두 거부하는 정책을 견지했다”고 평가했다. 냉전기 미국이 한국 사회에 보여준 “권위주의의 보장자”이자 “민주주의 후원자”라는 모순된 두 얼굴을 이렇게 규정한 것이다.

미국은 △1960년 4·19혁명을 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1961년 5월16일)를 미리 알았으나 방관했고, 쿠데타 직후 장면 총리의 ‘반란 진압 요청’을 외면했으며 △전두환의 군사쿠데타(1979년 12월12일)와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묵인·방조했다. 이는 1960~80년대 군사독재를 견뎌야 했던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을 ‘독재의 배후’로 기억하는 까닭이자 1980~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 분출한 ‘반미’의 역사적 배경이 됐다.

‘침묵과 묵인’은 미국 패권전략의 산물이다. 1960년 대 초 케네디 행정부는 제3세계 신생·약소국 정권에 대해 “훌륭한 민주주의 체제, 군사독재의 지속, 아니면 사회주의 체제다. 우리는 첫번째를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나 세번째를 피할 수 있다고 확신할 때까지 두번째를 단념할 수 없다”는 방침을 세웠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시에 미국은 1950∼6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구심의 하나였던 월간 <사상계>를 후원하기도 했다. 주한 미공보원(미문화원)은 여섯달 분량의 용지를 거저 주겠다는 제안으로 발간 초기 <사상계>가 안착하는 것을 도왔다. 사상계사에 미국 잡지 <타임>과 <라이프>의 총판을 맡겼다. 미국과 사상계사는 한국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데 협력 관계였다. 광주 민주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거센 ‘반미’ 분위기와 마주한 미국은, 1987년 6월항쟁 와중에 군부의 개입과 ‘민중 혁명’ 모두를 저지하려 동분서주했다. 미국이 한국에서 ‘민주주의 후원자’로 나선 마지막 순간이다.

2004년 12월8일 이라크 아르빌 주둔 자이툰부대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과 부대 장병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미 동맹은 6월 항쟁과 옛 소련 해체라는 변화 속에, 새롭게 등장한 ‘북핵 위기’에 기대어 굳건한 지위를 다졌다. 아울러 한-미 동맹은 경제 분야로도 영역을 확장했다. 21세기 한-미 동맹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은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노무현 정부 때 합의·서명(2007년 6월)해 이명박 정부 때 발효(2012년 3월15일)했다.

한-미 동맹은 한국이 성장함에 따라 ‘후견-피후견’ 관계에서 ‘동반자 관계’로 변화했다. 한국 정부가 이라크에 자이툰부대를 장기 파병해 재건을 도운 사실은 동맹의 변화를 상징한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1964~1973년, 4만8천명)은 모든 비용을 미국이 떠맡은 ‘용병’의 성격이 짙었다면, 베트남 파병 이후 최대·최장 파병인 자이툰부대(2004년 2월~2008년 12월, 1만9천명)의 현지 주둔·활동 비용은 한국이 책임졌다.

최근에는 미국이 자신들의 국익이나 국제전략에 따라 동맹국인 한국을 압박하거나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022년 5월22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50억달러를 미국에 추가로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행보는 한-미 관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이든 대통령은 5월20일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하자마자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로 직행해 “반도체를 통한 한-미 동맹 강화”를 외쳤다. 이틀 뒤인 5월22일 서울을 떠나기 전에는 숙소인 하얏트호텔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따로 만나 ‘2025년까지 미국에 50억달러 추가 투자’ 발표를 이끌어냈다. 방한 일정을 ‘삼성 이재용’으로 시작해 ‘현대·기아차 정의선’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경제’가 바이든의 최우선 관심사라는 뜻인데, 그나마도 ‘돕겠다’가 아니라 ‘얻어 가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는 동맹국 미국의 기존 이미지를 흔들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이유로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에 ‘중국과 절연하라’ ‘미국 반도체 기업의 공백을 메우지 말라’는 압박을 노골화하고 있다. 또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지급 대상에 현대·기아차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등을 두드리며 “미국은 현대차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던 공언과는 달랐다. 자국 경제 회복 앞에 동맹이 뒷전으로 밀린 셈이다.

한-미 동맹의 변화는 미국의 대중국 압박 전략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중국 봉쇄를 위해 한·미·일 안보 협력 강화를 원했고, 이를 위해 필수적인 한-일 관계 개선을 채근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방적인 일제 강제동원 제3자 배상 해법을 내놓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특별히 일본과의 외교를 위한 정치적 용기와 개인적 헌신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미 양국 국익의 ‘디커플링’(탈동조화) 가속화는 새로운 양국 관계의 모습을 요구한다. 여전히 압도적 다수의 한국인은 한반도 평화에 가장 중요한 주변국으로 미국을 꼽는다. 2022년 8월 2주차 갤럽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5%가 미국을 가장 중요한 주변국으로 꼽은 반면 중국을 꼽은 비율은 13%에 그쳤다. 그럼에도 한국인은 친미 일변도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2022년 7월11∼13일 사이 이뤄진 전국지표조사에서 미-중 경쟁에 대응한 한국의 바람직한 외교 방향으로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한 외교정책”을 꼽은 응답과 “중국을 고려한 미-중 사이 균형 외교정책”을 꼽은 비율은 38%로 팽팽했다. <한겨레>가 지난 5∼6월 여론조사업체 휴먼앤데이터와 진행한 세대별 표적집단 심층면접(FGI)에서도 여러 참여자들은 균형 외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한-미 동맹의 지속,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란 정책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한 삼위일체, 즉 삼중모순(trilemma)을 한국이 마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8~19년 세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두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에도 왜 한반도는 평화의 땅에 이르지 못했는지에 관한 화두의 답이자, 한반도 평화의 안전판인 동시에 걸림돌인 한-미 동맹의 모순적 두 얼굴을 가려낸 것이다.

동맹 70년이자 정전 70년인 2023년, 한국 사회는 동맹의 성과뿐만 아니라 그늘도 살피며 ‘성공의 역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시점을 맞았다. 한-미 우호 협력에 오랜 세월 관여해온 문정인 전 세종재단 이사장은 ‘한-미 동맹의 미래’와 관련해 3개의 화두를 제시했다. “동맹은 그 자체로 목적인가 수단인가? 한국의 국익과 미국의 국익이 일체화될 수 있는가? 미국에 대한 전략적 의존은 한국의 자율성과 공존할 수 있는가?”

동맹은 ‘적’을 전제한다. 한국은 ‘비핵·평화·번영의 한반도’를 위해 동맹의 질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동맹’ 없는 한-미 협력 관계는 불가능한 꿈일까. 상상하지 못하면, 현실도 없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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