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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종걸 의원 “3·1절 자주독립의 꿈은 통일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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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IZA 작성일19-03-11 11:19 조회3,6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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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종걸 의원 “3·1절 자주독립의 꿈은 통일로 완성”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 김영민 기자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 김영민 기자

“친일잔재 청산, 우리가 해야 할 일” 
[인터뷰]민주당 임정 100주년 특위 위원장 겸 독립운동가 후손 이종걸 의원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친손자다. 우당 선생 일가는 독립운동가 가문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선생의 6형제는 가산을 모두 팔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이 의원은 지난 1월 민주당에서 만든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3월 5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 의원을 인터뷰했다. 이 의원은 “정치를 처음 시작할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3·1절 100주년 행사를 비롯해서 기념행사가 많다.  

“러시아 사할린, 중국 선양, 일본 도쿄에서 열린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곳곳마다 지난 100년의 역사가 서려 있었다. 고통과 난관을 겪었지만 나라가 지켜주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극복해낸 힘이 느껴졌다. 특히 선양에서 열린 무오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는 뜻이 깊었다.” 

무오독립선언은 1919년 2월 1일, 39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서명해 만주에서 발표했다. 이날을 음력으로 따지면 무오년이어서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린다. 이후 도쿄의 2·8독립선언, 3·1독립선언이 발표됐다. 3대 독립선언 중 무오선언은 최초의 독립선언인 셈이다. 신채호·김좌진·안창호·이시영·이상룡·이범윤·김규식·이동녕·이범윤·이승만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여기에 서명했다. 

-할아버지가 활동한 만주지역에서의 행사였다. 우당 선생의 친손자라고 하니 참석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무오독립선언에는 할아버지의 친동생인 이시영 선생이 서명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분들이 서명자로 많이 들어가 있다. 우당의 직손이라 소개하고 집안에서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를 하니 조선족 참석자들이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 국회의원이라고 하니 놀랐던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형편이 어려워져 3대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그들이 하더라. 만주에서 어렵게 살아온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을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침 양세봉 장군의 후손들이 와 있었다. 양 장군은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의 할아버지의 묘소 바로 옆에 모셔져 있다. 100주년 행사에서 양 장군의 후손들과 아주 특별한 만남을 가진 셈이다.”  

-민주당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특별위원회 위원장에 1월 취임했다. 

“민주당에서 특위를 만들었고 5당에서 특위를 각각 만들어 공동 연합하자는 것으로 제안했다. 3·1운동 때에는 완전한 자주독립을 꿈꿨다. 하지만 지금은 분단된 국가로 완전한 자주독립이 이뤄지지 못했다. 아직까지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도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어야 한다. 분단을 해소하고 냉전체제를 벗어나는 것이 3·1운동이 꿈꿨던 완전한 자주독립이다. 특위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3·1운동 100주년이 갖는 의미가 각별할 것 같다. 

“할아버지 일가는 1910년 만주로 갔다. 이후 10년간의 해외 독립운동이 바로 이런 일(3·1운동)을 준비하려고 했구나라고 생각된다. 당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 결과물이 무오독립선언이다. 3·1독립선언은 비폭력 평화 선언이었지만 무오선언은 일본에 맞서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3·1운동 후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이어나간 계기가 됐다. 우당 선생에게도 3·1운동이 가장 중요했고, 그동안의 활동이 극대화된 시점이었다. 나중에 독립군은 만주에서 패배를 참담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실패했더라도 광복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우당 선생은 ‘600억원’에 이르는 땅을 팔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가셨다. 

“자꾸 600억원이라고 해서 물어보니 1964년의 평가액라고 한다. 1910년 당시에는 40만원이었는데 지금은 6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현물 그대로라면 몇십조 원이 된다. 그 재산은 백사 이항복 대부터 후손들이 나라로부터 받은 땅이다. 백사에서 할아버지까지 10대인데, 정승만 12명이었다. 판서까지 합치면 수가 엄청나다. 나라로부터 받은 땅인데 나라가 망했으니 버리고 가는 게 옳다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려면 일정한 밑천이 필요하니까 급히 팔 수 있는 땅만 팔고 떠나신 거다.” 

-우당 선생의 형제는 고초가 많았다. 기록을 보니 6형제 중 성재 이시영 전 초대 부통령만이 유일하게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6형제가 모두 독립운동가로 추서됐다. 그 아들들도 독립운동을 했는데 서울과 대전, 현충원에 모셔진 일가가 스무 명이 넘는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고생한 것은 없나.  

“아버지가 만주 창춘에서 상고를 나왔다. 해방되고 한국에 들어오는 데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서울에 살 곳이 없어서 안양으로 내려갔다. 안양에서 초가집을 사니 할머니가 후손 중에 집을 처음으로 장만했다고 좋아하셨다고 한다. 가난하고 어렵게 살다 보니까, 할머니가 늘 우리들에게 ‘너희는 명문가이니 기 죽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정치활동을 시작했나. 사촌형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현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도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이종찬 전 의원이 ‘왜 힘든 거 하냐’면서 정치하는 것을 말렸다. 아버님도 썩 좋아하진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할아버지에게 누가 되면 정치를 그만두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약속하고 정치에 나섰다.”  

-그동안 국회에서는 친일진상규명법과 친일파 재산 환수법이 통과됐으나 법안 통과과정에서 ‘누더기 법’이 돼 미흡하다는 평가가 있다. ‘독립유공자 피탈재산 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국회에서 친일청산작업이 여러 가지로 이뤄지고 있지만 현실의 벽이 두껍다. 어떤 것을 회복하면 어느 한쪽에서 다시 뺏는 것이 있다. 소급법안이 만들어지기가 어렵다.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효과도 별로 없다는 반대도 있었다.”  

-다시 찾을 수 있는 땅은 없나.  

“명동에 있던 땅은 총독부에 빼앗긴 것이다. 공개적으로 팔면 미리 의심을 할 것이고, 몰래 팔 수 있는 땅만 팔고 떠났다. 그런데 팔지 않은 땅은 모두 토지조사 때 넘어가버렸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시영 부통령에게 다시 찾겠느냐고 물었는데 이 부통령이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집안에서는 다시 찾을 생각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식에서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말했다. 

“단순한 청산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청산이 돼야 한다. 해방 후 미 군정에 의해 일제의 체계가 그대로 수용되면서 모든 것이 가치 전도현상을 일으켰다. 일제에 출세했던 고등계 형사가 그대로 경찰 간부가 됐다. 전세계에 유례가 없다. 청산 없이 고착화됐다.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저항과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정말 우리의 혼과 정신에 장애가 되는 것은 국민적 약속으로 해서 상징적 청산을 하는 것이 옳다.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은 남들이 겪지 못한 터널을 벗어났다. 뭔가 달라야 한다. 그냥 평화가 주어진 나라와는 다른 차원의 평화를 펼쳐나가야 한다.” 

“아직까지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도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어야 한다. 분단을 해소하고 냉전체제를 벗어나는 것이 3·1운동이 꿈꿨던 완전한 자주독립이다. 특위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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