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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술 목사 별세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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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2-16 16:51 조회77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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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빈자의 벗 하늘의 별이 되다…김홍술 목사 별세

등록 :2022-02-16 12:21수정 :2022-02-16 13:32

부산 지역 대표 빈민운동가 김 목사
평생 노숙인과 부랑아들과 함께 그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단식 하는 등
예수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한 선지자
고 김홍술 목사 빈소. 부산예수살기 제공
고 김홍술 목사 빈소. 부산예수살기 제공

 

부산의 대표적 빈민운동가로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을 지낸 김홍술 목사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2동 애빈교회에서 15일 새벽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67살.

 

고인은 1991년 애빈회를 설립해 부산의 노숙인과 부랑아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며 돌봤다. 애빈회는 애초 한울공동체, 부랑빈민선교회, 도시빈민사회복지선교회 등으로 활동하다가 2008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김 목사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부산시 동구 수정동 수정지구대 앞에서 8년 동안 매주 화·목·토요일 새벽 6시부터 무료급식소를 운영했고, 2012년엔 그 인근에 노숙인 숙소인 ‘부산홈리스 사회복지관’을 마련해 노숙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또 2012년부터 부산역 앞에서 부산·경남종교평화연대와 공동으로 노숙인합동추모제를 열기도 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본따 늘 상투머리를 하고 살았던 김홍술 목사. 지승룡 목사 제공
녹두장군 전봉준을 본따 늘 상투머리를 하고 살았던 김홍술 목사. 지승룡 목사 제공
고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파란만장했다. 그는 16살에 예수를 처음 접하고, 신학대학에 진학했으나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신학교의 모습에 실망하다가 어느 날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를 읽고선 프란체스코처럼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의 무덤에 옷을 벗어 놓고 2년 넘게 걸식을 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1978년 1월 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5개월만에 탈영했다. 탈영 이유는 ‘동포를 주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군 대신 3년간 수감 생활을 한뒤 서울 삼각산에 들어가 걸인, 알코올중독자들과 천막에서 1년을 보냈다.

 

1990년대초 부산에서 재활자와 키우는 토끼를 보고있는 김홍술 목사(오른쪽). <한겨레> 자료 사진
1990년대초 부산에서 재활자와 키우는 토끼를 보고있는 김홍술 목사(오른쪽). <한겨레> 자료 사진
1986년 결혼한 뒤 먹고살기 위해 노동판을 전전하던 그는 허름한 예배당에서 청년들과 감자 한 알을 나누며 희망을 노래하던 노목사의 모습을 보고, 세상 탓을 하기보다는 촛불 하나 조용히 밝히고, 사막을 탓하기보다는 묘목 하나 심는 사람이 되겠다는 소망을 가졌다고 한다.

 

그 뒤 신학교에 편입해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989년 예배당을 열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으로 문턱을 낮췄다. 예배당은 노숙인과 알코올중독자들이 드나들며 라면과 소주병이 나뒹구는 곳이 되었다. 경제력이 없던 김 목사는 신자들과 함께 급식이 끝난 학교를 돌아다니며 남은 음식을 수거해 국은 데우고, 반찬은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가 다음날 아침 노숙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노숙인 봉사를 시작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3일간 단식을 하던 김홍술 목사(맨왼쪽) 사진 예수살기 제공
2014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3일간 단식을 하던 김홍술 목사(맨왼쪽) 사진 예수살기 제공
2014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3일간 단식을 하던 김홍술 목사 사진 예수살기 제공
2014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3일간 단식을 하던 김홍술 목사 사진 예수살기 제공

 

오래된 한옥집에 ‘부활의 집’ 겸 애빈교회로 이름 붙인 김 목사는 중학교 교사였던 아내와 두 아이가 사는 집은 1주일에 한번만 갔다오고 줄곧 노숙인 10여명과 먹고 자고 함께했다.

 

김 목사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서울 광화문에서 방인성 목사와 함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3일간 단식하기도 했다.

 

2005년 부산 애빈교회에서 노숙인들과 함께 기거하며 식사 중인 김홍술 목사. 조현 종교전문기자
2005년 부산 애빈교회에서 노숙인들과 함께 기거하며 식사 중인 김홍술 목사. 조현 종교전문기자
철저히 몸으로 약자들과 함께했던 그는 한국 기독교가 근본주의적 도그마에서 벗어나 예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던 광야의 선지자였다. 그는 개신교 장로인 이명박 전 대통령이 종교편향으로 비판을 받던 2008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앞에서 ‘1. 너 한국교회여, 너의 가진 것을 나누어 줘라. 2. 교리의 옷을, 교권의 관을 벗어 던져라. 3. ‘오직 예수의 삶으로 살라’등 ‘한국교회에 고함’이란 대자보를 붙여놓고, 일주일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침도 삼키지 않은 단식을 했다. 단식 현장에서 광신도들에 의해 힐난을 받기도 했던 고인은 당시 “저런 정신분열과 광기를 누가 만들었느냐”며 “사람을 두들겨 패 죽이고도 `주님의 영광’이라고 찬양할 사람들까지 나오지 않을지 두렵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고인은 2018년 8월15일 자신의 사회적 사망을 선포하고, 3년상을 치르듯 1천일간 노숙자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기도수행을 하겠다는 결심을 내외에 밝히기도 했다.

 

2008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앞에서 단식 중인 김홍술 목사. 조현 종교전문기자
2008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앞에서 단식 중인 김홍술 목사. 조현 종교전문기자
부산경남종교평화연대 상임대표를 지낸 방영식 목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글을 올려 “힘도 정신력도 장사였고, 흥이나면 노래도 춤도 덩실덩실 추었다”면서 녹두장군(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의 환생으로 상투도 틀고 수염도 절대 깎지않은 것으로 지조와 정체성을 고집했다”고 추모했다. 부산예수살기 대표 박철 목사는 “부활의집을 지을 때 함께 노가다를 한 기억이 새롭다”면서 “고인은 진정 이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다”고 기렸다.

 

빈소는 부산 동래구 명륜동 대동장례식장 5호실이다. 유족으로는 처 성갑순, 아들 김병수 딸 김민지가 있다. 장례예배는 부산예수살기 주관으로 17일 낮12시 열리며, 장지는 부산 영락공원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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