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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과 홋카이도 사이… 유럽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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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6-14 11:14 조회1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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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과 홋카이도 사이… 유럽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가 여기에 있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입력 2023. 6. 14. 03:04수정 2023. 6. 14. 08:09
[주강현의 해협의 문명사]

지구온난화로 북극해가 녹는 비극이 발생하지만, 역으로 북극 항로가 개설되는 계기가 된다. 한반도에서 북극해를 거쳐서 유럽에 당도하자면 가장 빠른 항로는 라페루즈 해협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해협은 한국인의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사실은 환동해(동해를 둘러싼 지역)의 총체적 전략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동해에서 북극해로 나아가는 중요 출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도 동해의 출구가 되는 북방 바다가 중요하다. 동해는 시베리아 대륙과 한반도, 일본 열도에 둘러싸인 호수 형상이기는 하나 갇힌 바다는 아니다. 동해는 대양은 아니지만, 심해저, 해류, 해저 지형 등에서 두루 작은 대양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작은 대양인 관계로 동해를 형성시켜주는 대륙과 섬 사이에는 많은 해협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 해협이 항로로 이용된 역사는 매우 짧다. 오늘날 지리 상식으로 시베리아에서 타타르 해협을 건너면 사할린섬에 닿고, 사할린에서 라페루즈 해협을 건너면 홋카이도에 닿는다. 사할린이 섬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은 18세기 이후에야 확립되었다. 이들 해협은 다양하게 불렸으며, 그 명칭에는 해협을 발견한 각 나라의 이해충돌이 반영되어 있다. 러시아와 중국, 일본과 미국의 해양 전략이 충돌하는 해협이기도 하다.

홋카이도 북단의 소야 곶과 러시아 사할린섬의 크릴론 곶 사이를 러시아와 한국은 라페루즈 해협으로 부른다. 국제적으로도 라페루즈 해협이라 불린다. 중국과 일본에서만 소야 해협이라고 한다. 너비 약 40㎞에 수심은 평균 5~120m다.

그래픽=이진영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의 전례에 따라서 세계 일주에 나선 프랑스 라페루즈 함대는 1787년 4월에 필리핀을 출항해 그해 6월, 한반도 남해안 일대를 탐험했다. 후발 해양 제국으로 발돋움한 프랑스는 폴리네시아 등 태평양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북방 바다까지 뱃길을 돌린 것이다.

라페루즈 백작이 한반도에서 최초로 만난 섬은 ‘켈파에르트(Quelpaert)섬’ 즉 제주도였다. 이어 부산 앞바다를 거쳐서 동해로 항해하면서 섬을 하나 기록했는데 ‘다즐레(Dagelet)섬’ 즉 울릉도였다. 함대는 북상을 거듭하여 당시만 해도 러시아인이 없던 사할린 사이의 해협을 지나쳤으며, 이를 라페루즈 해협으로 명명했다. 이들은 북동으로 계속 올라가서 마침내 쿠릴열도에 당도한다. 서양 선박이 최초로 라페루즈 해협을 통과한 것이다.

북극해 항로가 시작된다면 라페루즈 해협의 중요성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해협의 북쪽 항로에 쿠릴열도가 있고 러시아와 일본이 북방 4도를 놓고 다툰다.

사할린섬과 시베리아 대륙 사이에는 타타르 해협(마미야 해협)이 있다. 이 해협은 유라시아 대륙과 사할린섬을 가르며, 북으로 오호츠크해, 남으로 동해로 연결된다. 길이 약 663㎞, 깊이는 가장 얕은 곳이 약 8m, 가장 좁은 폭이 불과 7.3㎞다. 겨울에는 얼어붙어 해협을 가로질러 횡단이 가능하다.

사할린섬 북부 지역 원주민인 니브흐족을 그린 그림. 사할린은 오랫동안 시베리아 대륙에 연결된 반도로 여겨졌으나 18세기 들어 섬으로 확인됐다. /러시아동방과학원

타타르 해협을 확인하려는 열강의 노력은 일찍이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사할린섬은 오랫동안 시베리아 대륙에 부속된 반도로 여겨졌다. 1644년 러시아 부대는 아무르강(헤이룽강) 하구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겨울을 나게 된다. 그러면서 사할린이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09년 청나라 강희제는 아무르강 하구에 예수회 선교사를 포함한 탐험대를 파견한다. 그들은 사할린에 상륙해 섬을 탐사했다. 18세기 중순, 청은 사할린의 일부 지역에 조공을 부과하기도 했다.

1945년 이전 왓카나이와 사할린을 연결하던 정기선 발착장이 있던 일본 최북단의 땅에는 마미야 린조 동상이 해협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일본 입장에서 마미야 해협을 발견한 마미야를 기리는 것이다. 타타르 해협이 마미야 해협이라고도 불리게 된 것은 마미야가 이곳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마미야는 1808년에 막부 명령으로 북사할린 서해안 길랴크족의 여러 촌을 탐험했다. 같은 해 겨울을 그곳에서 보내고 다음 해에 길랴크족의 배를 타고 그들과 함께 헤이룽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의 상류 데렌까지 갔다. 이곳에서 다시 강을 내려와 사할린으로 돌아왔다.

사할린이 반도가 아니라 섬이라고 추측한 그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혼자 사할린 탐험길에 올랐다. 당시에는 사할린이 헤이룽강 하구의 남쪽에서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고 잘못 믿고 있었다. 마미야는 두 번째 탐험(1809년)에서 북위 53도15분 지점에 도달해 사할린이 섬임을 확인했다. 사할린이 섬이라는 것이 확실하자, 러시아와 사할린 사이를 마미야 해협으로 명명함으로써 일본인으로는 유일하게 세계지도에 이름이 등록된 사람이 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 일본, 중국의 ‘발견’은 사실 당대 열강의 입장일 뿐이다. 사할린에는 오랫동안 아이누, 니브흐족, 윌타족 등의 민족이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예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당연히 사할린을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라페루즈는 사할린이 하나의 섬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기록했으나, 그는 이 정보를 원주민에게서 입수했다. 마미야 린조도 일본에서 사할린이 섬임을 발견한 인물로 공적을 인정받고 있지만, 정보의 원천은 역시 사할린 북부의 니브흐 촌민이었다.

국제적 패권의 역사는 냉혹하다. 라페루즈의 ‘세계 일주 항해기’ 이전에는 동해 표기에서 ‘한국해’가 다수였다. 동해를 직접 탐사한 라페루즈가 일본해 표기를 쓴 것이 유럽인들 사이에서 ‘한국해’가 ‘일본해’로 바뀌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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