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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기획-정전·한미동맹 70년①-“유골에 좌익·우익 있을 수 없고, 뼈에는 색깔이 없다”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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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7-17 09:39 조회1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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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에 좌익·우익 있을 수 없고, 뼈에는 색깔이 없다”


권혁철입력 2023. 5. 15. 05:05수정 2023. 5. 15. 13:15
한겨레 창간기획-정전·한미동맹 70년①
끝나지 않은 전쟁, DMZ·험프리스에서 ‘평화’를 묻다
전쟁은 멈췄지만 유해 못찾은 전사자 10만3천명
지난 4월28일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 한 한국전쟁 당시 남·북 군인 간 전투지역에서 유해발굴 마친 발굴부대 장병(11기동사단)들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예를 올린 뒤 임시 봉안소로 봉송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올해로 한국전쟁 정전협정(7월27일)과 한-미 상호방위조약(10월1일)이 맺어진 지 70주년이 됐다. ‘정전’은 전쟁이 잠깐 멈춘 상태로, 전쟁이 끝난 게 아니다. 정전 뒤 북한의 재침에 대비한 강력한 군사동맹을 요구한 한국의 요구로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맺어졌다. 정전 70년을 맞아 강원도 홍천의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화천 7사단 비무장지대(DMZ)를 찾았다. 아직도 온 나라 곳곳의 언덕과 고지에는 10만구가 넘는 전사자 유해가 눈비를 맞으며 묻혀 있다. 이 유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70년 동맹의 현주소를 확인하러,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꼽히는 경기도 평택 주한미군 기지(캠프 험프리스)를 찾았다. 단일 기지로는 전세계 최대 규모라는 캠프 험프리스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컸다. 명실공히 대중국 견제 전초기지로 충분해 보였다. 미군이 떠난 서울 용산과 미군이 모인 평택에서 70년을 맞은 한-미 동맹이 그 자체가 목적인지, 우리 국익을 위한 수단인지 생각해봤다. 편집자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70여년 전 선배 전우들이 목숨을 걸고 오르내린 전투 현장입니다.”

지난달 28일 오후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으로 가는 입구에는 국방부와 육군 11기동사단이 내건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펼침막에서 20분가량 흙먼지 피어나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유해 발굴 현장이 나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11기동사단 돌격대대 장병들이 비탈진 산자락에서 삽으로 조심스럽게 땅을 파고 있었다.

72년 전 이곳에서는 중공군의 봄철 공세에 맞서 ‘홍천 북방전투’(1951년 5월16~18일)가 벌어졌다. 당시 국군과 미군은 홍천 북서쪽 가리산 부근에서 약 10㎞ 떨어진 유해 발굴 현장인 주음치리까지 후퇴했다.

한정희 유해발굴감식단 발굴팀장은 “이곳에서 유해 12구를 수습했고 온몸의 뼈가 온전한 완전 유해는 1구”라며 “완전 유해가 적은 이유는 당시 포격전이 치열해 사망 당시 포탄에 신체가 찢겨나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은 고지, 능선 등에서 많이 이뤄진다. 72년 전 고지마다 주검이 산처럼 쌓이고 주검을 방패 삼아 싸우던 지옥도가 펼쳐졌지만 지금은 봄 햇살과 신록이 평온한 산자락이다. 유해 발굴에 참여한 11사단 돌격대대 김도훈 상병은 “유해를 발굴하다 보면 당시 전투 현장이 머리에 떠오르고 마음이 숙연해진다”고 말했다.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는 한국전쟁 전사자가 대부분인 10만3천여위가 유해 없이 위패로만 모셔져 있다.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은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이런 인식은 국민을 통치 대상이 아닌 국가의 주인으로 볼 때 가능한 것이다. 국가가 체계적으로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에 나선 것은 국내 정치에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후 2000년 4월이었다.

지난 4월28일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 한 한국전쟁 당시 남·북 군인 간 전투지역에서 발굴부대 장병(11기동사단)들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유해발굴 마친 한 전사자를 김상우 일병이 임시 봉안소로 봉송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국전쟁은 같은 민족끼리 다른 군복을 입고 치른 전쟁이다. 한정희 발굴팀장은 “발굴된 유해만 놓고 피아 구분이 쉽지 않다. 영화 <고지전>에서 춥다고 북한군 군복을 덧입는 국군 병사가 나오듯이, 국군으로 추정되는 유해에서 적군 유품이 발견되고 적군 추정 유해에서 국군 유품도 나온다. 현장에서도 피아 구분을 하지만 피아판정위원회를 3~4차례 열어 신중하게 심의한다”고 설명했다.

유해가 국군인지 북한군인지는 제복이나 모자, 단추, 무기 등 유해와 함께 발굴된 유품을 보고 판단한다. 유해와 함께 엠1(M1) 총알이나 카빈 총알, 미제 수류탄 등 각종 미제 무기가 발견되면 국군으로 판정한다. 이와 달리 ‘평양’ 같은 마크가 찍힌 통일화, 티티(TT)권총탄 같은 옛 소련제 무기, 모자에 붙이는 별표 표지가 발견되면 북한군으로 분류한다. 당시 남북은 군복 단추 모양이 달라서 단추도 피아 식별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북한군으로 분류된 유해는 경기도 파주 북한군 묘지에 매장한다. 정부는 제네바 협정을 존중하는 취지에서 1996년 적군 묘지(북한군 묘지 이전 이름)를 조성했다. 제네바 협정 추가의정서 34조는 교전 중 사망한 적군 유해를 존중하고 묘지도 관리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아직도 ‘빨갱이 색깔론’에 집착하는 쪽은 적군 묘지를 종북주의자의 성지라고 주장하고, 문재인 정부 때 간첩 58명이 묻힌 북한군 묘지의 평화공원 조성을 시도했다고 문제 삼는다. “뼈에도 색깔이 있다”는 식의 주장이다.

취재를 마치고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산길을 내려오다 고 김철호 선생의 “뼈에는 색깔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기업인이자 사회사업가였던 김철호(1922~1995) 선생이 1990년 지리산 일대를 찾았을 때, 한국전쟁 전후에 지리산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골을 누구도 수습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유골에 좌익·우익이 있을 수 없고, 뼈에는 색깔이 없다”고 말했다. 김철호 선생은 지리산에 움막을 짓고 분단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한 공원을 가꾸어 나갔다. 실제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보니 뼈에는 색깔이 없었다.

육군 7사단 일반전초(GOP) 장병들이 철책을 따라 이동하며 정밀점검을 하고 있다. 육군 제공

지난달 27일 오후 비무장지대 내 강원도 화천군 칠성전망대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성찰할 수 있었다. 이날 칠성전망대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북쪽 산과 들의 봄 풍경은 고즈넉했다. 남고북저의 지형 때문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렀다가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는 금성천이 느긋하게 휘돌아 흐르는 모습도 보였다. 금성천 부근 425고지와 406고지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화천은 고산준봉과 산세의 경관이 빼어나 ‘산수화의 도시’로 불린다. 칠성전망대 근처에도 적근산(1073m), 백암산(1178m) 등 해발 1000m를 넘는 산들이 즐비하다. 그림 같은 산 풍경에 빠져 있다 산 이름의 연원을 비무장지대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들으면 섬뜩해진다. 적근산은 ‘적의 피가 산의 뿌리까지 적신 곳’이고, 백암산은 ‘전쟁 때 폭격으로 산이 하얗게 바뀌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풀이가 나올 만큼 한국전쟁 때 중·동부 전선에선 고지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군 관계자는 “칠성전망대 주변 보이는 곳곳이 고지전이 벌어졌던 장소”라고 말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한국전쟁은 1950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벌어진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등을 기억하고 이때 인명 피해가 많이 난 것으로 여긴다. 이와 달리 한국전쟁 당시 양쪽 군인 사상자 중 다수는 1951년 여름부터 1953년 여름까지 벌어진 고지전에서 발생했다.

70년 전인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을 며칠 앞둔 금성천은 피로 물들었다. 국군 7사단은 1953년 7월20일부터 24일까지 425고지와 406고지에서 중공군과 혈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한국전쟁 기간 중 마지막 전투로 불린다. 당시 중공군은 1605명이 숨졌고, 국군은 전사 114명, 부상 438명, 실종 83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7사단은 425·406고지 전투 승리로 38선을 35㎞ 북상시켰고, 사흘 뒤 이 상태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규학 소령(추서 계급·당시 대위)은 정전협정을 사흘 앞둔 7월24일 406고지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소령은 숨지기 며칠 전 “이제 날이 밝으면 어떤 임무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이 밤 고향을 생각하며 당신 꿈을 꾸리다”라는 편지를 아내에게 보냈다. 이규학 소령의 가족은 전사통지서만 받았고 유해를 70년 동안 확인 못했다. 이규학 소령이 잠든 406고지가 접근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 안이기 때문이다.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철원 비무장지대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이 성과를 거뒀다면 화천 406고지에서도 남북 공동 유해발굴이 가능할 수 있었지만,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이 소령과 가족에겐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1951년 7월10일부터 1953년 7월27일까지 2년여간 휴전회담을 하는 동안 전선은 현재 군사분계선 근처에 교착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평가를 보면, 이 기간 벌어진 고지쟁탈전은 휴전협상 난국을 타개하는 수단으로 이용됐고, 양쪽은 군사적 승리보다는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하는 수단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공방전을 감행했다. 고지 하나를 탈취하기 위해 무수한 생명이 희생되는 기형적인 고지쟁탈전이 전장을 지배했다고 연구소는 평가했다.

육군 7사단 장병들이 일반전초(GOP) 초소에서 경계작전 근무를 서고 있다. 육군 제공

칠성전망대 서쪽에 있는 저격능선은 오성산에서 강원도 김화 지역을 향해 뻗어 내린 돌출 능선이다. 1952년 10월14일부터 11월24일까지 저격능선을 차지하기 위해 최소 2만명의 군인들이 죽고 다쳤다. 중국 쪽 기록은 국군·유엔군 사상자는 2만5천명, 중공군은 1만1천여명이고, 한국 쪽 자료에는 중공군 사상자 1만1천명, 국군·유엔군 사상자 7800명이었다. 1㎢란 좁은 저격능선 지역에서 한달여 만에 밀집대형으로 2만여 군인이 희생된 것은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때 왜 참혹한 고지전을 멈출 수 없었을까?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기지 못한 고지전에서 수많은 병사들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비무장지대는 70년간 시간이 멈춰 있는 듯 보인다. 산천은 변함없지만, 할아버지·아버지·손자 세대 장병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갔다. 특히 7사단은 2015년 7월 동부전선 최초로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도입했다. 병력에 의한 경계작전이 아니라 고성능 카메라 등 각종 감시·감지 장비를 활용한 형태로 바뀌었다. 비무장지대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과거(전쟁), 현재(분단), 미래(통일)가 공존하고 있었다.

베트남 출신 미국 소설가인 비엣 타인 응우옌은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는 전쟁과 관련된 기억을 독점하려고 한다. 지난 3월 국가보훈처는 정전·동맹 70주년을 맞아 ‘위대한 헌신으로 이룬 놀라운 70년’(Amazing 70)이란 주제 아래 △참전용사의 ‘위대한 헌신’에 감사 △‘자유의 가치’를 국제사회와 공유 같은 사업 계획을 수립했다. 70년째 해온 ‘감사’도 하되 70년간 끝나지 않는 이 슬픈 전쟁을 끝내는 ‘평화의 시작’을 상상할 수는 없는 것일까.

화천 홍천/글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홍천/사진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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