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이 시기에 이스라엘 기습 게릴라전 감행한 이유 (2023.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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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10-10 10:05 조회95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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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스, 이 시기에 이스라엘 기습 게릴라전 감행한 이유
- 한승동 에디터
- 승인 2023.10.09 11:00
생존위한 하마스 기습전략 이미 목적 달성
과거 중동전쟁들과 다른 이번 이-팔전쟁
실업률 46~59% 가자지구 통치 하마스
수정 불가피한 이스라엘의 분할통치 전략
분쟁 만들고 참상 외면한 서방 비난자격 없어
7일 새벽 안개 속에서 감행된 하마스의 기습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 거듭돼 온 유혈충돌들 가운데 최대 최악의 경우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제1당이 된 뒤 극우 정파들과 연합해 재집권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른쪽으로 기운”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은 기습 직후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흔히 제몇차 중동전쟁으로 일컫는 그런 전쟁과는 양상이 전혀 달라 보인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가자지구를 실질적으로 통치해 온 이슬람 정치조직이자 무장세력 하마스의 육해공을 통한 기습공격과 공습까지 감행한 이스라엘군의 반격 속에 8일 밤까지 이스라엘은 40여 명의 군인을 포함해서 700여명이 죽고 2천 1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이스라엘 미디어들은 보도했다. 팔레스타인 당국도 적어도 20여 명의 어린이들을 포함해 413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숨지고 2천 300여 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과거 중동전쟁들과는 다른 ‘전쟁’
또 하나의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에서도 이스라엘 군의 총격으로 7명이 사망했으며, 하마스는 100명이 넘는 이스라엘인들을 볼모로 잡아간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하마스쪽은 이스라엘에 구금돼 있는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인들과 맞교환할 수 있는 인질들을 붙잡았다고 주장했다. 8일 현재까지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대규모 1단계 충돌은 일단 잦아든 것으로 보인다.
네타냐후 총리는 대규모의 철저한 보복전을 공언했지만, 시나이 반도나 골란고원 등 이스라엘 외부에서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등 주변 아랍국들 군대와 이스라엘이 충돌했던 예전의 ‘중동전쟁’과는 달리 이번 전쟁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통치세력 하마스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감행한 기습적인 대규모 게릴라전이다. 따라서 향후 사태전개도 과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마스가 다수의 이스라엘인들을 인질로 잡아간 것도 전투 위주의 통상적인 전쟁보다는 기습의 충격효과와 선전, 협상을 통한 목적 달성을 노린 전술로 보인다. 요란한 2천여 발의 로켓 공격은 이런 목적 달성을 위한 “방패막이”일 뿐이라고 하마스쪽은 밝혔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하마스
그런 면에서 하마스는 목적의 상당부분을 이미 달성했다.
<이코노미스트>는 8일 하마스의 이번 기습작전으로 2000년대 초에 일어난 제2차 인티파다(이스라엘 지배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대규모 봉기) 이후 이스라엘 우익 집권세력이 유지해 온 통치전략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지적했다.
2차 인티파다(2001~2005) 이후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서 철수하고 대신 높은 장벽을 쌓아 가자지구를 철저히 분리, 봉쇄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는 전투적인 하마스가 지배하는 이스라엘 서남단의 가자지구와 온건한 파타당이 지배하는 북쪽의 예전 사마리아땅 요르단강 서안지구로 철저히 분리됐다.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이스라엘의 우익 집권세력은 이런 분할통치를 통해 팔레스타인을 무력화시켰다.
이런 상황은 지금 바이든 정부와 네타냐후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이스라엘-아랍 간의 적대관계 청산과 관계정상화를 통한 중동질서 재편 구도에 유리한 토대를 제공했다. 네타냐후 정부는 팔레스타인을 이런 방식의 외교전략에서 아예 국외자로 배제해 버렸다. 2020년 이스라엘과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국교를 수립한 ‘아브라함 협정’을 맺었고, 모로코와 수단까지 동참했다. 이번 주 말쯤에는 사우디아라비아도 이 대열에 공식적으로 가담할 것이라는 관측들이 있었다. 하마스가 기습공격 일자를 7일로 잡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수정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통치전략
하마스의 기습은 이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분할통치와 우파 유대인들의 입식지 확장을 통한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사실상의 통합, 그리고 친서방적인 비적대적 질서로의 중동 재편 외교전략 모두가 이스라엘 극우 집권세력의 계산대로 진행되진 못할 것이라는 점을 확고히 각인시켰다. 설사 아랍과의 관계 재설정이 결국 미국의 뜻대로 추진된다 하더라도 팔레스타인을 배제하려는 이스라엘 극우세력 구상대로 가진 못할 것이라는 게 이번 사태로 분명해졌다.
2002년에 아랍연맹은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전쟁(1967)으로 점령한 땅(가자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과의 국교 정상화는 하지 않겠다”는 ‘아랍 평화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그것을 주도한 나라가 사우디였다. 이번 하마스의 기습으로 사우디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내버려 둔 채 이스라엘과 손잡는 것은 적어도 당분간은 불가능해졌다. 이번 기습을 통해 하마스가 노린 가장 중요한 표적 중의 하나가 이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쨌든 지난 20여년 간 이스라엘 우익세력이 추구해 왔고 성공하는 듯 보였던 팔레스타인 분할통치와 배제전략이 이제 더는 유효하지 않으며, 새로운 전략, 팔레스타인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공생하는 쪽으로의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하마스는 왜 자금 공격했나?
하마스는 왜 이 시기에 공격을 감행했을까?
이스라엘 주재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직과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제사업기구 직원 등을 지낸 일본 방위대학교의 다테야마 료지 명예교수(인문사회과학군 국제관계학과, 중동정치)는 7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여름에 가자지구에서 하마스를 비판하는 주민들의 데모가 일어난 매우 이례적인 사태에 주목했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가자지구의 최근 실업률은 46%, 15~29세 젊은층의 실업률은 무려 59%에 이른다. 이스라엘로부터 철저히 봉쇄, 배제당하고 있는 365km²의 일개 군만한 면적에 가난한 230만 명의 인구가 차별받고 사는 열악한 환경에서 앞으로도 이런 극한상태를 면할 가망이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은 온건파 압바스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비판하며 하마스를 지지했다. 그런데 네타냐후 극우정권 집권 이후 그들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팔레스타인 상황 속에서도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 있는 하마스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1996년 처음 총리가 된 뒤 6차례 집권하다 2019년에 불거진 뇌물수수 부패사건으로 2021년 사퇴했다가 지난해 말 재집권한 네타냐후는 극우 민족주의자들과 연정을 꾸릴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 더욱 극우로 기울었다. 그 결과 면적 5860km²의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대한 공세적인 입식확장 정책을 펴면서 ‘반테러전쟁’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혹독하게 억압하고 탄압했다.
지난 6~7월에 유대인 극우 정착민들이 조직적으로 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인들을 공격하고 집과 땅을 빼앗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이스라엘 군경은 입식자들 편에 서서 주민들의 저항을 테러로 몰아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 결과 올해에만 적어도 247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숨졌다.
오래된 ‘전쟁’
일방적이긴 하지만 ‘전쟁’은 하마스의 이번 기습 이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2021년에도 하마스는 4천발이나 되는 로켓을 11일 동안 이스라엘을 향해 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반나절만에 2500발 이상의 로켓을 쏘고 적어도 수백명의 하마스 무장 전투원들이 10미터 높이의 가자 분리장벽을 폭약, 불도저 등으로 무너뜨리거나 치안부대가 지키는 관문을 장악한 뒤 이스라엘 내부로 침투해 전면적인 기습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수십년 전부터 압도적인 무력과 정보력을 지닌 이스라엘이 벌인 ‘전쟁’ 한가운데서 살아 왔다.
네타냐후 재집권 이후 그런 상황이 주민들이 더는 견뎌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한 것이고, 하마스도 자신들의 존재증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몰렸다.
하마스는 이런 상황에서 전격적인 기습은 팔레스타인을 사실상 내버리는 정책에 동조한 이스라엘과 아랍세계에 수백명의 목숨을 걸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아울러 세계의 여론을 자신들 편으로 돌리고, 요르단강 서안까지 포함하는 전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통치 주도권을 쥐려고 하지 않았을까.
기습을 감행한 10월 7일은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1973년 10월 6일을 의식하고 정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기습의 외부적 요인
하마스가 지금 기습을 감행한 또 한 가지 이유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주도하고 사우디까지 가담하고 있는 중동질서 재편이 팔레스타인을 배제한 채 추진되는 것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막아야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독립을 추구하는 정당한 플레이어로 인정받아야 그들에게도 미래가 있다.
미국은 2017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하고 대사관까지 옮기겠다며 팔레스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고, 이스라엘 우익은 환호했다.
기습의 이스라엘 국내정치적 요인
그리고 네타냐후 재집권 이후의 이스라엘 국내정치의 혼돈과 분열도 기습을 감행하기에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극우정권의 권력남용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인 대법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네타냐후 정권이 강행한 ‘사법개혁’은 대규모의 대중저항을 불러 이스라엘 사회를 준내전상태로 몰아갔다. 정보분야 예비역 장병들까지 들고 일어나 군부까지 흔들렸다. 게다가 극우파들이 점령지구 입식 확장정책을 과도하게 밀어붙이면서 조성된 요르단 서안지구 내의 충돌과 혼란도 가자지구와 하마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번 기습 때 ‘아이언 돔’ 등으로 무장하고 하마스와 자치정부의 모든 통화내용까지 감청하는 이스라엘 군과 정보기관들이 하마스의 기습을 사전에 알아채지 못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라는 지적들이 있다. 압도적 힘의 우위에 자만한 이스라엘이 설사 그런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했다 할지라도 하마스가 그런 대규모 기습을 감행할 능력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무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오슬로 합의, 분단으로 역행한 역사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점령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하고, 두 지역을 장차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로 만들기로 하고 잠정적인 자치기간을 두기로 합의한 것이 1993년의 ‘오슬로 합의’였다. 이는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된 제1차 인티파다로 무수히 희생당한 팔레스타인인들 목숨의 대가였다. 양쪽 간의 대립이 그대로는 통치가 불가능할 정도의 위험 상태가 돼서야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한 발 빼면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한다는데 동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인 1994년 2월에 자치지구 헤브론의 이슬람 모스크를 과격파 유대인들이 습격해 주민 29명을 살해했고, 그 다음해인 1995년 11월에는 팔레스타인민족해방기구(PLO) 의장이자 파타당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와 함께 오슬로 합의에 서명했던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극우 과격파 청년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팔레스타인 쪽은 잇따른 자살폭탄으로 저항했다. 하마스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와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은 그들이 오래 터잡고 살아 온 그들의 땅이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이 하늘이 그들에게 내린 땅이라며 그런 하마스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적대했다.
한마디로 오슬로 합의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2002년부터 10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 주민 거주지역을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장벽의 총연장이 800킬로미터나 된다. 장벽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치안부대를 배치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단절과 분단이 극도로 깊어졌다. 2007년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선거에서 압바스가 이끄는 파타의 자치정부가 패배하고 하마스가 승리한 뒤 가자지구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단절과 분단도 본격화했다.
이-팔 분쟁은 유럽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어두운 유산
팔레스타인 땅은 영국이 위임통치를 하면서 분쟁의 땅이 됐다. 19세기에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자 유럽 각지에서 흩어져 살며 박해받았던 유대인들이 ‘시오니즘 운동’을 시작했다. 조상의 땅에 나라를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대인의 시오니즘을 이용하려 했던 영국이 1948년 철수하면서 그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섰다. 팔레스타인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폭거였지만, 오히려 그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나 난민 신세가 됐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원한과 폭력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비극은 유럽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인종차별과 학살이 만들어낸 유럽 역사의 어두운 유산이다.
전략을 바꿔야 산다
영국 미국 등 서방국들은 이번 하마스의 폭력적 유혈 기습을 비난하면서 이스라엘의 자위권 발동이 정당하다는 성명들을 일제히 발표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뒤쫓다가 이-팔 분쟁 비극을 만들어내고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참상을 외면해 온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이번 하마스의 기습으로 50년 전 체결된 오슬로 합의는 완전히 종언을 고했다. 단절과 분단, 폭력을 통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하면서 풀어가는 수밖에 없다.
<이코노미스트>가 지적했듯이 이스라엘은 차제에 지난 수십년 간 집착해 온 억압과 폭력의 분할통치 지배정책을 버리고 팔레스타인과의 상생을 위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그들과 닮은 역사를 지닌 채 갈수록 더 꼬여가는 한반도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