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반러시아 연대’를 흔드는 갈등의 도화선이었던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문제가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동유럽 4개국에 한시적으로 허용해 준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 금지 조치가 다음달 15일 해제되기 때문이다. 폴란드 정부는 EU의 관세 면제 혜택을 받은 우크라이나산 농산물과 경쟁해야 하는 자국 농민들의 피해를 고려해 독자적으로 수입 금지 조치를 유지할 계획이다.
지난 4월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입 중단 요구 시위에 참여했던 폴란드의 농부 비스와프 그린은 “올해 밀 수확이 끝나면 (수입 금지를 요구하기 위해) 다시 시위에 나서겠다”고 6일(현지시간) 도이체벨레에 말했다. 비크토르 즈물레비츠 폴란드 전국농업회의소협의회장은 “우크라이나 곡물이 유입되는 상황은 수입 농산물과 경쟁해야 하는 우리 농민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말했다.
EU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 차원으로 우크라이나 농산물에 대한 관세와 수입 할당량을 폐지했다. 이후 폴란드와 루마니아 등지의 농민들은 “우크라이나 동료들이 곡물을 팔아야 하는 걸 알지만 불공정 경쟁인 것은 사실”이라며 “해바라기씨를 창고 가득 쌓아놓고 있는데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농민들이 대대적 항의 시위를 벌이자 폴란드 정부는 지난 4월 결국 우크라이나 농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헝가리,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정부도 비슷한 조치를 발표했다.
EU는 동유럽 4개국의 일방적 조치를 비난했으나 이들 국가가 강경하게 나오자 우크라이나산 밀, 옥수수, 유채 및 해바라기씨에 대한 한시적 수입 금지 조치를 허용했다. 나머지 EU 회원국에는 무관세 및 할당량 폐지 방침을 유지하며 폴란드를 경유해 우크라이나산 곡물이 수송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치는 6월 말까지 적용될 계획이었으나 9월 15일까지로 연장됐다. 폴란드는 EU가 이 조치를 해제하더라도 개별적으로 수입 금지를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폴란드 농민의 입장은 강경하다. 폴란드 남동부 라카 마을의 농민협동조합의 상무이사인 얀 비에니아스는 “우크라이나산 곡물은 폴란드산 곡물보다 20% 싸다”며 수입 금지 기간에도 폴란드를 경유하는 곡물이 빼돌려져 현지 곡물 가격을 하락시킨 사례가 있다고 전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농민에게는 EU의 수출 금지 조치 해제가 더욱 절실해졌다. 올해 우크라이나 곡물 생산량은 6000만t으로 예상된다. 인구 4000만명인 우크라이나에서 곡물은 연간 약 1800만t이 소비됐는데 전쟁으로 800만명이 국외로 떠나면서 내수가 줄어 수출이 더 절실해졌다. 잉여 곡물 규모가 약 4500만t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폴란드의 연간 총 곡물생산량보다 많다. 우크라이나 서부 흐멜니츠키에서 밀, 옥수수 등을 재배하는 농부 미콜라 올리츠키는 “저장고에 곡물이 많이 남아 있어 생산비 이하로 팔아야 한다”고 도이체벨레에 말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은 폴란드 정부의 방침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려는 노력을 훼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폴란드 북부 발트해에 흑해를 대체할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항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역시 폴란드 정부의 협조가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올가을 총선을 앞둔 폴란드 정치권은 극우 정당을 중심으로 농산물 문제에 불 지피고 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실의 마르친 프르지다츠 보좌관은 지난 2일 TV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 문제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우크라이나는 감사할 줄 모른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