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에르도안, 소치서 정상회담 개최
푸틴 “서방, 약속 이행해야 협정 재개”
에르도안 “이견 좁혀 협정 이어갈 것”
아프리카 식량 지원에는 합의점 찾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모든 합의가 이행돼야 곡물협정에 복귀할 것”이라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푸틴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러시아 소치에서 만나 흑해곡물협정 등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이날 회담은 러시아가 지난 7월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이후 한달 반 만에 열렸다.
푸틴 대통령은 에르도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서방이 곡물협정에서 러시아에 약속한 의무를 계속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러시아는 곡물협정을 재개할 준비가 돼 있으며, 모든 협의 내용이 이행되면 즉시 실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방이 약속을 모두 이행해야 협정을 재개할 수 있다는 기존의 입장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유엔과 협의해 러시아에 새로운 제시안을 준비했다면서 “이견을 좁히면서 곡물협정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튀르키예는 짧은 시간 안에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해결책에 도달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날 러시아는 아프리카에 대한 식량 지원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6개 아프리카 국가들에 식량을 무료로 공급하고, 심지어 운송과 물류도 무료로 진행할 계획을 갖고 있다”라며 “거의 마무리 단계”라고 밝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앞으로 몇 주 내에 운송이 시작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또 러시아 천연가스 공급에 대해서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공급하는 천연가스의 허브를 튀르키예에 설립하는 계획에 관한 것으로, 양국은 조만간 협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폭발 사고가 발생한 노르트스트림의 대안으로 튀르키예 영토에 이러한 시설을 구축하는 방안을 지난해 10월 제시한 바 있다. 튀르키예는 기반시설 측면에서는 러시아 천연가스 허브 구축을 위한 준비가 완료됐지만, 법률 개정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밝혀왔다.
두 정상이 대면 회담을 가진 것은 약 11개월 만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난 5월 재선에 성공한 이후 처음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북태평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정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져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모두 발언에서 “회담 후 우리가 내놓을 메시지가 전 세계, 특히 저개발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 역시 “우리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관해 논의할 것”이라며 “러시아는 곡물협정 논의에 열려 있다”고 말했다.
이번 회담이 열리기 앞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흑해곡물협정 재개를 위해 새로운 제안을 담은 서한을 전달했다. 구체적인 서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외신들은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러시아 농업은행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시스템 재연결, 러시아 비료 기업에 대한 제재 해제, 우크라이나를 횡단하는 암모니아 파이프라인 복원 등을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복귀에 대한 당근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러시아가 지난 30일 제안한 흑해곡물협정의 ‘대안’에 대해서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타르의 재정 지원을 받아 러시아 곡물 100만t을 할인된 가격으로 튀르키예에 보내면 튀르키예가 이를 가공해 아프리카 빈곤국에 제공하는 형태로, 우크라이나를 곡물협정에서 제외하는 방안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우리는 이 프로젝트가 흑해곡물협정에 대한 최선의 잠정적 대안이라고 간주한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지난해 7월 튀르키예와 유엔의 중재로 흑해곡물협정을 체결했지만, 러시아의 비료·곡물 수출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완화되지 않았다면서 지난달 협정에서 철수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흑해곡물협정이 재개될 단초가 마련된다면 세계 식량시장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흑해는 보리, 옥수수, 밀, 해바라기씨 등 우크라이나 수출 곡물의 95%가 통과하는 곳이다. 흑해를 통과하는 우크라이나 선박의 안전을 보장하는 흑해곡물협정이 종료된 후 오데사를 포함한 흑해 항구가 러시아 공습을 받으면서 아프리카 빈곤국의 식량 위기가 커졌다. 유엔에 따르면 흑해곡물협정을 통해 수출된 곡물의 57%가 빈곤국을 포함한 개도국에 전달돼 왔다.
한편 흑해곡물협정을 의제로 러시아와 튀르키예 간 정상회담을 앞두고 러시아군은 이날 우크라이나 다뉴브강 연안 지역에 대규모 드론 공습을 감행했다. 다뉴브강은 지난 7월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중단 선언으로 흑해를 통한 곡물 수출이 막히자 우크라이나의 대체 수출로로 활용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