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중립화] 1.중립국 담론, 죽임을 극복한 부활의 기적 (김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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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9-05 11:56 조회27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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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코리아 2024 가을호
<커버스토리: 한반도 중립화>
1. [담론의 부활] 중립국 담론, 죽임을 극복한 부활의 기적 (김성해)
2. [한미동맹] 전쟁위험 키우는 한미동맹 (문장렬)
3. [고종의 외교] 고종 황제, 중립화 외교를 실행한 선구적 통치자 (양재섭)
4. [평화와 자주] 한국 중립화를 통해 통일의 길로 (이영재)
5. [중립화 통일]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의의 (정지웅)
중립국 담론, 죽임을 극복한 부활의 기적
김성해 대구대학교 교수 / 한국중립화추진시민연대 공동대표
박쥐 이야기
모두 아는 듯한데 잘 모르는 게 가끔 있다. 박쥐와 얽힌 이야기가 그렇다. 동화책에 자주 등장하는 얘 기는 일종의 후속편이다. 전편에는 좀 다른 사연이 나온다. 한번은 지혜로운 결정을, 다른 때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 족제비 두 마리에게 각각 잡혀 죽을 뻔한 고비에 직면한 게 첫 번째 얘기다. 먼저 만 난 족제비는 모든 쥐는 자신의 적이라고 믿었다. 박 쥐를 잡은 뒤 묻는다. “너도 쥐니까 당연히 죽여야겠다”라고. 박쥐는 자신의 날개를 보여주면서 하소연 했다. 날개가 있는데 어떻게 쥐가 될 수 있냐고. 날개를 본 족제비는 박쥐를 놓아줬다. 불행은 며칠 뒤에 한 번 더 닥쳤다. 모든 새를 원수라고 생각하는 다른 족제비에게 잡혔다. 박쥐는 날개가 있다는 건 인정 하면서도 새처럼 깃털이 없어 못 난다는 걸 보여줬다. 덕분에 이번에도 목숨을 구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게 두 번째 얘기다. 단순히 자신을 방어하는 대신에 누군가의 편에서 힘을 보탰다. 전황이 들짐승에게 우세하게 돌아섰을 때는 땅에 사는 동물과 함께 날 짐승에 맞서 싸웠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 앞설 때는 반대로 돌아서 들짐승을 공격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박쥐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막상 평화가 찾아 왔을 때는 찬밥 신세가 됐다. 진영 양쪽의 비난을 받은 끝에 동굴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박쥐의 선택은 미래를 통째로 바꿨다. 남의 이목을 피해 밤에만 활동하면서 낮이라는 시간대를 잃었다. 동굴에 갇히면서 자유를 만끽하던 공간도 뺏겼다. 모두의 적이 되면서 언제 어디서 낯선 위협을 만날지도 모른다. 명예와 신의를 잃은 상태라 친구 하 나 없는 외톨이가 됐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깊은 밤 동굴에 홀로 앉아 박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쥐도 아니고 새도 아닌 타고난 팔자를 원망하는 건 틀렸다. 새와 쥐로 대표되는 진영 논리에서 ‘독’이 아니라 ‘약’이 된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못 살렸다. 앞에 나온 족제비는 ‘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굳이 목숨을 뺏지 않았다. 많은 동물이 땅과 하늘이 라는 진영으로 나뉘어 싸울 때도 ‘다른’ 선택이 가능 했다. 죽고 죽이는 폭풍 속에서도 ‘적’이 아닌 ‘중립’ 을 지키는 존재로 남았다면 남다른 비극을 겪을 필요는 없었다. 하늘과 땅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다른 동물이 있었고 그들은 전쟁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게 증거다. 기회비용을 계산해도 명확하다. 전리품을 못 챙기는 건 아쉬울 수 있어도 장차 잃어버릴 것과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된다. 박쥐 이야기에서 우 리가 배울 건 없을까?
축복과 저주?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한다. 그래도 과거에서 제대 로 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과 다른 역사를 한 번 상상해 볼 필요는 있다. 역사의 시계추를 거꾸로 되돌릴 시점은 최소 두 개가 있다. 그중 하나는 조 선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이었던 19세기 말이다. 대략 1850년부터 1900년 언저리다. 일본과 러시아 중 어느 한쪽에 흡수되는 것만 남았던 러일전쟁 직전까지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고기를 먹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의 계산속은 복잡해졌다. 특히 안팎으로 시련이 겹치면서 중국 은 고민이 많았다. 영국과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군사력의 밑천이 드러났다. 1855년에는 혼자 힘으로 태평천국의 난을 처리하지 못해 외국 군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잇따른 불평등조약으로 각종 이권을 비롯해 영토도 뺏겼다. 구룡반도는 영국에, 연해주는 러시아에 각각 넘겼다. 베트남에서도 프랑스에 밀려났다. 한편으로 일 본을,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과 프랑스 등을 견제할 수 있는 방파제가 될 수 있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확인된 바 있다. 파죽지세로 조 선을 짓밟았던 일본은 바다에서 보급품이 막히고 명나라의 군대가 지원에 나서면서 끝내 패배의 쓴맛을 봐야 했다. 중국과 달리 일본은 물 만난 고기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뒷배로 도움을 줬다.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있어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네덜란드를 통해 서구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는 한편으로, 1867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부국강병의 길로 매진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한반도에도 한 발 담근 상태였다. 일본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 또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병참기지로서 한반도의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다. 중국을 조금씩 잠식하는 것 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본의 꿈은 1932년 만주국 의 설립으로 현실이 된다. 영국의 공영권(Common Wealth Nations)을 본떠 1940년 대동아시아공영권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한반도가 있어 가능한 꿈 이었다. 러시아도 한반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대륙 유럽을 벗어나 제국주의 경쟁에 참여하고 자 했던 꿈은 크림전쟁에서 패하면서 일단 좌절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지중해가 아니면 남은 출구는 태평양이다. 중국의 랴오둥반도 나 한반도를 통하면 된다. 1860년 베이징조약을 통 해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얻은 게 전화위복이 됐다. 만약 중국의 일부 지역이 아닌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다면 제국 러시아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도박이 된다. 인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에 이미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원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영국은 1885년 4월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1910년 조선은 일본에 흡수된다. 약육강식 시대라 당연해 보여도 선택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주변 강대국 누구도 절대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 러시아와 일본 중 누구도 한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앞서 나왔던 박쥐처럼 누구의 ‘적’도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 고 확신을 줬다면 다른 결론이 나왔다. 한반도에 직 접적 이해관계가 없었던 독일, 미국, 영국 등에서 ‘중립’을 제안한 적도 있다. 그들이 봤을 때 한반도가 중국, 일본, 러시아 중 어디에 종속되는 상황은 좋을 게 없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특별히 특정 국가를 편들지 않아도 되는 상황도 몇 개 있었다. 만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청나라와 일본에 각각 의지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1894년 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초청하지 않았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 땅에서 전쟁하지 않고 누군가 승리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불러들인 건 또 잘한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으로 치닫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를 바꿨으면 하는 두 번째 상황은 1945년 언저리다. 해방을 맞은 직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하기 전까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해방을 맞은 한국 상황이 그랬다. 전쟁이 끝난 후 국제사회에서 진행된 일을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식민지라도 승전국과 패전국 중 어디에 속했는가에 따라 운명이 갈라졌다. 패전국 일본에 속했던 대만은 그래서 곧바로 중국령으로 복원됐다. 그렇지만 승전국에 속했던 다른 식민지의 운명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가령,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독립을 위해 또 싸워야 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과 알제리가 독립을 한 건 각각 1954년과 1962년이다.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린 끝에 겨우 쟁취할 수 있었다. 1898년 스페인 전쟁 후 식민지가 되었던 푸에르토리코, 미국령 사모아, 북마리아나제도와 괌 등은 여전히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 1946년 독립한 필리핀도 1년 후 미국과 군사기지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떻게 패전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까? 점령군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왜 한반도라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전리품을 포기했을까? 한국의 관점이 아닌 미국, 소련과 중국의 시각에서 봐야 이 의문이 풀린다. 일본이 사라진 자리에 미국이 들어선 것 외에 한반도에서 달라진 건 없다. 미국은 많은 희생을 치르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조선은 미국의 차지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세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핵폭탄으로 일본이 항복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일본이 항복한 배경에는 소련이 있다. 일본이 봤을 때는 소련이 끝까지 불가침조약을 지켜준다면 좀 더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을 공격하면서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무려 5,100km에 달하는 전선에서 소련이 총공격했고 불과 1주일 만에 관동군은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자칫하면 일본 본토가 미국과 소련 모두에 협공당하 는 상황이 올 수 있다. 8월 15일 서둘러 항복을 발표 할 수밖에 없었다.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했던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선뜻 받아들인 것 자체가 의외였다. 다른 전선은 몰라도 최소한 한반도의 전쟁 지분은 소련이 훨씬 많다. 한반도의 독립과 관련한 내용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은 자유롭고 독 립된 국가가 될 것이라고 우리가 결심했다”는 내용 이 포함된 건 카이로선언이다. 1943년 11월 27일에 발표됐다. 장제스가 제안했고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 칠 수상이 받아들였다. 전쟁 직후 곧바로 독립을 시 켜준다는 게 아니고 ‘적절한 시기’를 봐서 그렇게 하겠다는 내용은 처칠이 포함했다고 알려진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한국은 일본에서 분리해서 국제적 감독 기간을 거친 후 독립이 주어져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전쟁 후 중국으로 곧바로 귀속된 대만과 한반도는 달랐다는 걸 알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은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권에 놔두지 않겠다는 걸 명확하게 밝혔다. 게다가, 당시 회담에는 소련의 스탈린이 참석하지 않았고 일본도 아직 항복하지 않은 상태였다. 독립에 대한 언급은 얄타회담에서 한 번 더 등장한다. 일본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고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도움이 절실한 때였다. 루스벨트는 “한국은 독립을 관리할 역량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40년짜리 보호 관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그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고 답했다. 미국이 식민지 필리핀을 관리한 시간이 대략 40년 정도가 된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얘기는 전쟁이 끝난 1945년 12월 16일에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나왔다. 미국이 제안했던 40년 신탁은 소련의 주장대로 ‘최대 5년’으로 줄었다. 관리 주체는 미·소 공동위원회로 같은 승전국인데도 영국과 중국은 빠졌다.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발언권이 그만큼 높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안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독립을 시켜주지 않는다고 거세게 저항했고 대규모 ‘반탁’운동을 벌였다.
당시 한국은 어떤 선택이 가능했을까? 미국과 소련 그 누구도 자신에게 불리한 정권이 들어서는 걸 원 하지 않았다. 국경을 접해야 하는 소련으로서는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일본을 대신한 미국이 한반도를 군사기지로 만든다면 날마다 불안에 떨어야 한 다. 중국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한반도는 미국으로서도 달갑지 않다. 만약 국민당이 승리해서 중국 전체가 자본주의 진영 이 되었다면 큰 위협은 아닐 수 있었다.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우위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방관하기 는 어려웠다. 미국과 소련이 봤을 때 남은 대안은 결 국 ‘분단’ 밖에 없다. 그게 아니면 그리스와 베트남 등에서 벌어진 통일 전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는 정도가 남는다. 한국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 의 길을 갔으면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만약 1946년부터 5년에 걸쳐 이런 노력을 했다면 전혀 다른 운명을 맞지 않았을까? 전쟁으로 냉전의 불씨가 더 커지는 대신에 양 진영의 중간에서 냉각 효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담론의 죽음: 타살과 자살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든 박쥐가 누구의 ‘적’도 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딘가로 떠나 있으면 될까? 집과 친구를 모두 버리고 떠나면 그건 망명이지 박쥐가 원하던 일은 아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살던 장소, 하던 일, 그간의 인연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해 일상생활을 유지하면 서, 적으로 분류되어 차별을 받지 않는 길을 찾아야 한다.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하나는 ‘적’이 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행동’을 하는 일이다. 정해 진 답이 없다는 게 문제다. 전쟁 무기를 양쪽 모두에 팔아도 될까? 박쥐가 관리하는 지역에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적을 암살하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도 될까? 전쟁으로 부족해진 물자를 공급하는 건 괜찮을까? 다른 곳에서 전쟁 물자를 살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는 건 또 어떨까? 전쟁 중에 죽거나 다 친 사람을 묻어주거나 치료해 주는 건 괜찮을까? 정확한 지침이나 원칙이 없으면 제대로 된 처신을 하 기 참 어렵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행동보다 더 어려운 과제가 남았다.
적대감이 높은 진영 양쪽에서 불신을 받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두 번째 숙제다. 절반 채워진 유리컵의 물을 보면서 누군가는 ‘절반이 찼다’라고 보는데 누군가는 ‘절반이 비었다’라고 본다. 특정한 행동을 왜 하는지 또는 안 하는지, 그 목적은 무엇이며, 다른 진영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 또 왜 그런 지 등을 설명해야 한다. 불신을 없애는 것을 넘어 누 구 편도 들지 않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라 는 점도 설득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작업이다. 대치국면에서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각자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 특히 전 황이 불리할 때일수록 ‘중립’에 대해 관대하기 어렵 다.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못 할 게 없다. 단순 히 ‘적’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면 이런 상황을 모른 체할 수 있다. 하지만 평화가 찾아왔을 때 자칫 서운함과 원망이 남을 수 있다. 힘들 때 편들어 주는 것 보다 중간에 서 있는 게 장기적으로 서로에게 더 좋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상대 진영의 오해를 받지 않을 수준에서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박쥐 사례만 봐도 중립을 지킨다는 게 간단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국가 간 중립은 훨씬 더 복잡하다. 중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중립의 조 건의 어디까지인지? 중립 상황에서 국가 간 거래는 어느 수준까지 가능한지? 중립을 지키면서도 휴전 협상 등을 중재해도 되는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행동을 넘어 인식까지 관리하는 건 더 힘들다. 꾸준한 소통을 통해 신뢰를 쌓는 노력은 선택이 아니 라 필수다. 담론은 이런 많은 상황에서 일종의 지도 혹은 안내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논리적’인 설명, 주 장, 해석 및 실천 등을 포괄하는 의미 덩어리로 통일 담론, 중립담론, 여성담론, 휴가담론, 청소년담론처럼 다양한 주제와 결합해서 쓰인다. 담론은 또 생명체라 는 특징을 갖는다. 특정한 시점에 태어나고, 다른 담론과 결합하면서 성장하고, 경쟁을 통해 도태하거나 더 발전한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관심을 받으면 더 잘 자라고 그렇지 않으면 없어지기도 한다.
국내에서 중립화 담론이 처음 등장한 건 1880년대 로 알려진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아직은 청나라, 일 본, 러시아 등이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때 다. 중립 문제를 먼저 꺼낸 쪽은 일본이다. 외교관 출 신의 이노우에 코와시는 “일본, 청, 미국, 영국, 독일 의 다섯 나라는 서로 회동하여 조선의 일을 의논하고, 조선을 하나의 중립국으로 삼아, 즉 벨기에·스위스의 예에 따라 그를 침략하지 않고 타국으로부터 침략받지도 않는 나라로 하여 다섯 나라가 함께 이를 보호”하자고 제안했다. 미국과 일본을 두루 경험하고 관료 생활도 했던 유길준의 생각도 같았다. 그는 우선 “각국의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어 부강하지만, 후 세 사람들이 스스로 지킬 수 없고 형세가 급박해져 서 강대국의 수중에 들어가면 시국의 큰 방향을 뒤흔들어 이웃 나라에 화를 미칠 수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주목했다. 조선의 중립이 중국을 비롯해 주변국에도 좋을 것이라는 점과 “유럽에서 벨기에 와 불가리아와 같은 중립국” 사례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독일의 부영사였던 허먼 부들러(Hermann Buddler), 영국인 던캔 (Chesney Duncan), 미국인 윌리엄 샌드(William Sands) 등도 중립을 주장했다. 하지만 중립 담론이 제대로 자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능한 왕과 분열된 관료로 인해 조선의 행동은 신뢰를 주지 못했다.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조선이 정말 중립을 원하는지, 누군가의 편을 들어 자신의 이익을 해치려 고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기 나라 백성 하나 제 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세의 힘을 빌려 중립국이 되겠다는 발상도 터무니없었다. 중립화 담론 의 첫 싹은 그렇게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시들 고 말았다. 죽은 줄 알았던 이 담론이 다시 고개를 내 민 건 1950년대 말이다.
전쟁은 기억을 남긴다. 1919년 “조선 독립 만세!”를 함께 불렀던 민족은 이제 철천지원수가 됐다. 왜 싸웠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내 사랑하는 가족 과 형제와 친구를 죽였고 나도 복수를 했다는 기억 만 남았다.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이에 ‘적’이 되 어 서로를 마주본다. 박봉우 시인이 ‘휴전선’이라는 시를 통해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 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라고 했던 바로 그 장면이다. 그런데 세월이 약이다. 전쟁을 치른 지 10년 정도가 지나면서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기억을 돌아 볼 여유 정도는 생겼다. 종교계가 앞장을 섰는데 그 중에서도 함석헌 선생이 대표적이다. 1958년 <사상계>를 통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한 편 발표한다.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맹목적인 분노에서 벗어나 ‘민족’ 중심의 생각을 한번 해 보자 는 의도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6.25 싸움은 왜 있었나?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 진 새우다. 그러나 아무리 싸움은 다른 놈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남의 미끼가 됐던가? ...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싸움에 서로 이겼노라고 정말은 진 것 아닌가? 어떤 승전 축하를 할까? 슬피 울어도 부 족할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 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하고 떼어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을 대신해 같은 민족끼리 싸울 게 아니 라 이제라도 손을 잡고 다른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 이었다. 중립이라는 상상력이 가능할 수 있는 여건 도 나라 안팎에서 성숙하고 있었다. 국제사회의 변화가 그중의 하나다.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1955년 4 월에 열린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먼저 불을 당겼다. 한때는 식민지로 고통을 받았다가 지금은 어엿한 독립국이 된 국가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인 도, 중국, 인도네시아, 이집트, 유고슬라비아 등 모두 29개국이 모여 <반둥 10원칙>을 채택했다. 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보존을 존중하고, 모든 나라의 평 등을 승인하며, 타국의 내정에 불간섭할 것 등을 담았다.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더는 괴롭히지 말라는 선언이었다. 그해 10월에는 패전국이라 승전국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에서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1960년 4월 19일 국민의 저항을 받아 마침내 무너졌다. 정부의 엄격한 감시와 국가보안법 등으로 억눌렸던 통일과 중립에 관한 논의가 뒤이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1960년 9월 24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전국대학생 시국 대토론회가 그 중의 하나다. 민족통일을 위해 “중립화 운동을 전개 하고, 중립적인 민주주의 통일정부를 수립하며, 중립화 통일을 국내에서 여론화 시킬 것” 등이 제안됐다. 1961년 2월 21일에는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 맹>이라는 단체가 닻을 올렸다. “국제회의를 통한 국제적 보장 하에 영세중립통일”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내세웠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이끄는 군사쿠데타 로 다시 모질게 짓밟혔다. 혁신계를 대변했던 <민족 일보>의 폐간과 조용수 사장의 사형이 가장 대표적 이다. 중립화 통일론을 앞세우면서 통일의 전 단계 로 남북교류 활성화를 주장했던 게 빌미가 됐다. 그 해 7월 13일에는 “국가재건과업의 제1목표인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반공법>이 제정 된다. 제4조 ‘찬양, 고무 등’이 특히 고약했는데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 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 게 하는 행위를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내용이다. 중립 담론이 이런 분위기에서 꽃을 피울 수는 없는 건 당연했다. 구한말에 이어 두 번째 로 죽임을 당했지만, 무덤이 영원히 봉인된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봄으로 불리는 2000년대 초반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한반도중립화연구소>는 1999년 문을 열었다. 2000년 6월 15일에는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만났고 공동선언이 채택됐다. 제1조를 통해 “남과 북은 나라 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2001년 10월 30일에는 <영세중립통일협의 회>가 출범했다. 창립선언문을 통해 남과 북이 통일 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세중립’ 방안이 가장 이상적 이라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전쟁을 방지하고 민족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로 인 해 주변 4강 국가 어디에도 편파적인 이익이나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담론이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었는데 대중화 단계로 확산하지는 못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중립’이 굳이 필요한 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냉전이 무너진 후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단극질서가 시작된 것과 관련이 깊다. 중국도 러시아도 미국의 눈치를 보는 시대가 됐 다. 다행히 한국은 한미동맹이라는 든든한 보험이 있고 이 보험만 있으면 주변에서 누가 괴롭힐 국가 도 없다.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도 “강 건너 불처럼 구경”하면 된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서 남북관계는 나빠지고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이 반복하면서 ‘중립’ 보다는 ‘동맹’에 더 관심을 갖는 건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웠다. 과거의 중 립 담론이 외부에 의해 강제로 죽임을 당한 ‘타살’이 라면 최근의 무관심은 그렇지 않았다. 국민 다수가 스스로 이 담론의 가치를 자발적으로 외면했다. 담론이 자살하게 한 것에 가깝다.
부활의 꿈
담론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한다. 담론이라는 지도를 보면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누구를 만날지, 또 어떤 준비를 할지 결정한다. 2024년 우리에게 중립 담론은 과연 얼마나 필요할까? 한국이 처한 상황 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며, 제 대로 된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 이 담론이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일까? 담론의 본질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다. 담론이 진공상태에서 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우선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꼭 필요한 시점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담론은 찾아진다. 그렇다면 한국은 현재 이 담론이 절박한 상황일까?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 상황을 구한말이나 해방 직후와 닮았다고 봐야 할 근거가 있을 까? 당시와 비교했을 때 이 담론이 더 절실하고, 더 적절하고, 더 좋은 길잡이라고 봐야 할까? 질문에 대 한 답은 “당연히 그렇다”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게 답할 수 있는 근거가 많다. 무엇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부분은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해 자칫하면 치명적 인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든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진영 간 충돌은 불가피하다. 단극질서의 시대는 저 물고 다자질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한쪽에는 미국 을 중심으로 앵글로색슨권으로 분류되는 영국, 호 주, 캐나다와 뉴질랜드 또 유럽이, 다른 쪽에는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브릭스 국가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가 맞서는 구조다. 군사, 경제, 정 보, 문화, 규범 등으로 전선은 복잡하다. 한미동맹에 묶여 있어 한국은 이 모든 전선의 맨 앞에 있다. 동 맹이 주는 혜택이 감당치 못할 비용이 될 순간이 머지않았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양 진영 모두에 ‘적’이 아니라는 확신을 줘야 이 외통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순히 ‘적’이 아닌 것을 넘어 모두에게 ‘친구’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게 두 번째 주목할 부분이다.
잿더미에서 세계 10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국 가로 성장한 한국의 몸값은 어느 때보다 높다. 한국 이 어느 편에 서는가에 따라 진영 싸움은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박쥐의 이야기에서 보듯 특정 진영에 가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은 분 명 있다. 그렇지만 중립을 통해 전리품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새로운 기회를 만날 수 있다. 한국의 문화 는 누구나 좋아한다. 전자제품과 공산품과 같은 수출 품목을 포함해서 민주화와 분단의 경험, 경제발전의 노하우 등을 원하는 곳은 정말 많다. 관광 자원 과 우수한 교육 시설, 의료 등도 빠지지 않는다. 진영 을 선택하면 신냉전의 최전방이 되지만 중립을 택하면 평화의 중간지대로 변한다. 끝으로, 한국이 변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청나라, 일본과 러시아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구한말의 조선은 없다. 일본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상태에서 ‘최소 40 년 정도’는 신탁을 받아야 한다고 조롱받던 국가도 아니다. 자기 한 몸 지킬 정도의 군사력과 웬만한 압박은 견딜 정도의 경제력을 두루 갖춘 상태다. 만약 누군가 침략해도 자신을 방어할 능력만큼은 갖추고 있었던 스위스에 못지않다. 국민의 의식 수준도 정 말 높다. 중립이 왜 필요한지, 왜 좋은지, 어떻게 하 면 되는지 설득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중립 담론 의 부활을 기다리는 건 이런 까닭에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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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03/2/12) 한반도 중립화는 불가능한가?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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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14/4/10) 한반도 중립화, 이승만, 김일 성, 김대중이 함께 꾼 꿈,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