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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단절 넘어 남북관계 전환 이룬 1970년대 남북대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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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5-04 10:34 조회1,0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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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단절 넘어 남북관계 전환 이룬 1970년대 남북대화록

  •  이승현 기자
  •  
  •  승인 2022.05.04 09:30
 

통일부, 70년대 초반 남북회담 사료집 첫 공개..'남북대화 기본 운영틀 세워'

분단 이후 최초로 열린 남북 당국간 회담으로 평가되는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파견원 첫 접촉 [사진제공-통일부]
분단 이후 최초로 열린 남북 당국간 회담으로 평가되는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파견원 첫 접촉 [사진제공-통일부]

1971년 8월 20일 남북 적십자의 파견원이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에서 만나 양측의 신임장을 교환하고 회담 제의 문서와 편지를 서로 전달했다.

분단 이후 최초로 열린 남북 당국간 회담으로 평가되는 이날 접촉에는 남측 파견원으로 한적(대한적십자사) 이창렬(李昌烈) 서무부장과 윤여훈(尹汝訓) 섭외부참사가, 북측 파견원으로는 북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서성철 문화선전부 부부장과 염종련 지도원이 나왔다.
 
간단한 수인사에 이어 북측 수해 소식에 대해 한두마디가 오간뒤 서로 신임장을 교환하고 회담 제의 문서, 편지를 전달한데 걸린 시간은 딱 3분이었다. 

오전 11시 58분 한적 파견원이, 12시 1분 북적 파견원이 입장했으며 12시 4분 문서교환을 완료한 뒤 12시 5분 퇴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짧은 시간에도 북측은 "우리의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라며 "앞으로도 이 명칭대로 정확히 써주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남측은 "우리 정식명칭은 대한적십자사"라며 "간단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가 좋을 것입니다"라고 응대했다.

통일부가 4일부터 일반에 공개하는 '남북대화 사료집' 제2·3권에 실린 첫 남북 당국 접촉의 현장 대화 내용이다.

남북대화 사료집 2권 표지 [사진제공-통일부]
남북대화 사료집 2권 표지 [사진제공-통일부]

총 1,652쪽 분량의 공개 문서에는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파견원 제1~5차 접촉부터 25차례의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의제문안(제1~13차) 및 진행절차(제1~3차)를 위한 실무회의 진행과정이 마무리되는 1972년 8월 11일까지 오고간 생생한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물론 전체 대화록이 다 공개된 것은 아니다. 이중 418쪽(약 26%)이 △회담 전략 △실무인력 인적사항 △세부사항 공개시 국가 중대이익 침해 △ 기타 개인정보 포함 등의 이유로 비공개 처리되었다.

8월 26일 2차 파견원 접촉부터는 상호 신원확인을 위한 신임장 교환은 생략하고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에 대한 남북의 제안문서가 전달되었다.

7분간 진행된 이날 대화에서 북측 서성철 파견원은 "우리들의 첫 상봉에 대한 내외의 반응들이 대단하더군요. 모든 출판물들이 일치하게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쓰고 끊어진 혈맥을 잇는 일이고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계기로 될 것이라고 썼더군요"라며 감격해했다.

8월 30일 접촉에서는 당시 31도가 넘는 서울 날씨를 화제삼아 '사이다' 건배를 하면서 양강도 갑산군 고향이야기를 더하고 상대방의 키에 대해서도 허물없이 농담을 나누는 화기애애한 모습이다.

9월 3일 4차 접촉부터는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도 엿보인다.

박애정신을 앞세워 언챙이 수술을 주요사업이라고 설명하는 한적 파견원에게 북적 파견원은 "적십자가 인도주의 단체이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 이보다 적십자에서 더 크고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몇 차례 문서에 '북한적십자회'라고 적힌 일을 지적하면서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이며, 이를 정확히 쓸 것을 재차 강조했다. 북측도 마찬가지로 '남조선적십자사'로 적는 상황이었다.

파견원 첫 접촉 8일전인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한적 총재는 '인도적 남북회담을 제안하는 대한적십자사 총재 성명서'를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했다. 

8월 20일 북측에 문서로 전달된 이 성명서는 분단 이후 남측이 북측에 먼저 한 첫번째 회담 제안이다.

최두선 총재는 △남북간 가족찾기운동에 대한 구체적 협의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10월내 제네바에서 예비회담 개최를 제안했고, 이에 북측은 기다렸다는 듯 이틀 뒤인 8월 14일 12시 평양방송을 통해 즉각 수락성명을 발표했다.

손성필 북적 위원장은 성명에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의 자유로운 래왕과 호상방문 실현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간의 자유로운 서신거래 △가족들을 찾아주고 상봉하는 문제를 추가하자고 했다.

예비회담 장소에 대해서는 "민족내부 문제를 토의하는데 우리나라 땅을 두고 무엇때문에 머나먼 다른 나라에 가서 만나겠습니까"라며, 판문점을 제안하고는 "만일 판문점의 회의장 시설이 군사정전위원회에 사용되고 있는 관계로 불합리하다면 우리는 최단시일안에 필요한 건물을 새로 짓고 회담의 성과적 진행을 위한 온갖 편의를 제공할 충분한 용의를 가지고 있다"고 적극성을 보였다.

회담일자에 대해서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9월중으로 예비회담을 하고 연락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남북 적십자단체의 신임장을 가진 파견원들이 8월 20일 12시 판문점에서 만나 서신을 교환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역시 8월 20일 남측에 문서로 전달된 이 제안의 행간에는 앞으로 있을 회담에서 나타날 수많은 이견이 읽힌다.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사진제공-통일부]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사진제공-통일부]

다섯차례의 파견원 접촉 이후 1971년 9월 20일부터 열린 예비회담은 처음엔 순조로웠다.

9월 20일 오전 11시부터 11시 56분까지 진행된 첫 예비회담에서 △판문점 중감위 회의실을 회의 장소로 이용하고 △회의기록을 위해 녹음과 속기를 병행하며 △발언은 수석대표(단장)이 발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지명한 대표도 발언할 수 있게 했으며 △회의내용은 공개를 원칙으로 합의시에는 비공개하는 등의 회의 진행 절차에 합의했다.

또 합의사항은 문서로 교환하고 합의내용이 일치할 경우 남북이 각각 발표하는 것으로 했다.

연락사무소는 남측 자유의 집과 북측 판문각에 각각 설치하고 양측 연락사무소간 직통전화를 가설하기로 했다. 직통전화는 9월 22일 낮 12시 개통됐다.

연락사무소에는 상근자 2명이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토요일은 낮 12시까지 근무하고 일요일은 휴무하기로 했으며 문서전달을 위해서는 전화연락 후 중감위 회의실에서 직접 전달하기로 했다.

이후 9월 29일 열린 2차 예비회담에서는 1차 합의를 바탕으로 △예비회담 의제순서 △본회담 장소와 일시 △가족·친척·친우로 되어 있는 사업대상을 조정하는 문제 △본회담 의제 △본회담 대표단 구성문제 △신변보장과 편의제공 등 기타 절차에 이르기까지 이후 남북회담 운영의 기본틀로 적용되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들에 대해 서로 양보하며 합의에 도달했다.

오전 11시에 시작된 회담은 오후 1시 58분까지 이어져 끝내 이날 남북 최초의 합의문이 발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태희(북적 서기장) 북측 단장은 "우리 전체 조선동포들이 이 회담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는데 거기에 하루속히 적응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겠다"며 "이 예비회담은 예비회담인만큼 예비회담을 속히 결속짓고 본회담을 개최하도록 우리 적극 노력할 것을 단언한다"고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김연주(金練珠, 한적 보건부장) 남측 수석대표는 9월 22일 낮 12시 판문점 남북연락소 안에 직통전화가 개통된 순간을 상기하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5천만 동포가 아주 환호에 젖어있다"고 말했다. 또 "오늘 회담에 있어서도 원칙이 성의있게 진지한 토의를 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분단 이후 26년만에 열린 남북회담이었지만 험난한 여정을 예고라도 하듯 이듬해 8월 11일까지 계속된 예비회담은 진행될수록 난항을 거듭했다.

△가족의 범위에 '친척'과 '친우'를 포함하는 문제 △자유왕래 문제 △상호방문 문제를 비롯한 난제들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남측은 11차 예비회담에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에 '친척'을 추가했고 북측은 12차 예비회담에서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에서 '친우'를 제외해 가족 범위에 대한 이견은 해소됐다.

'자유로운 래왕'을 선결문제라고 한 북측과 달리 남측은 예비회담의 토의사항이 아니라 본회담에서 다뤄야 한다고 맞섰다. 

17차 예비회담에서 양측이 각각 수정안을 내놓은 뒤 18, 19차 예비회담에서 '본회담 의제 문안정리를 위한 실무회의'개최를 합의하고 13차에 이르는 실무회의 끝에 △가족, 친척들의 주소와 생사를 알아내어 알리는 문제 △가족, 친척의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 △가족, 친척의 자유로운 서신거래 △가족의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 △기타 인도적 문제 등을 본 회담 의제로 확정했다.

이같은 내용은 13차 예비회담에서 최종 합의하고 20차 예비회담(1972.6.16)에서 합의서를 교환해 일단락되었다.

이번에 통일부가 공개한 '남북대화 사료집' 제2·3권이 다루는 시기는 여기까지이다.

제2권(829쪽)에는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제1차~제5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제1차~제15차)이, 제3권(823쪽)에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제16차~제25차), 의제문안(제1차~제13차) 및 진행절차(제1차~제3차) 실무회의 등이 담겨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진 남북 비밀 접촉은 9차 예비회담(1971.11.19)에서 한적 대표 중 한 사람인 정홍진이 북적 대표 중 한 사람인 김덕현을 회의장에서 따로 만나 별도의 실무자간 비밀접촉을 제의한데서 비롯되었으나 관련 기록은 이번에 공개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남측의 제의를 북측이 받아들여 다음 날(1971.11.20) 정홍진과 김덕현이 판문점에서 단독으로 만나 제1차 비밀접촉이 시작되었으며, 1972년 7월1일까지 24차례의 판문점 접촉이 있었다.

그 사이 남북 실무담당자인 정홍진(1972.3.28~31)과 김덕현(1972.4.19~21)이 한차례씩 평양 서울을 교환방문하고 이후락(5.2~5)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과 박성철(5.29~6.1) 국가부주석도 각각 평양과 서울을 극비 방문했다.

공개된 남북대화 사료집 제2·3권은 4일부터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 등 3곳에 마련된 '남북회담 문서 열람실'을 직접 방문해 열람할 수 있으며, 문서공개 목록과 열람 절차 등은 남북회담본부 누리집(https://dialogue.unikorea.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대화단절의 분단시기'와 '대화있는 분단시기'를 모두 극복하고 '통일시대를 위한 참된 남북대화의 장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인 노중선 전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은 2000년 4월 펴낸 저서 '남북대화 백서'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대화단절'의 벽을 허물고 남북 당국간의 대화가 시작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고, 이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는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고 1970년대 남북대화 진행을 평가했다.

그 배경은 "닉슨의 북경방문 등 1960년대 말부터 표출되기 시작한 국내외적 정치정세의 변화로 말미암아 더 이상 '대화의 단절'을 버텨낼 수 없는 상황을 맞아 마침내 박정희 정권이 남북적십자회담을 북측에 제의하게 된 것"이라고 짚었다.

이 대화를 계기로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그해 8월부터 1973년 7월까지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긴 했지만 "그동안 단절되었던 남북대화를 시작했다는 의미만 남았을 뿐 실제에 있어서는 남북당국간의 대화는 물론 인도적 차원의 적십자회담도 더 이상 지속시키지 못한채 중단되고 말았다"는 비판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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