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우키시마호 폭침 76년..'日 조직적인 조선인 대학살만행'(2021.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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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8-27 19:27 조회1,60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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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우키시마호 폭침 76년..'日 조직적인 조선인 대학살만행'
- 이승현 기자
- 승인 2021.08.25 12:48
76년 전인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일본 교토 근처 마이쓰루항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시모사바가 앞바다에서 구 일본 해군의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3~4차례의 요란한 폭발소리와 함께 두동강나면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체 길이 108.43미터의 우키시마호가 침몰하면서 그 배에 타고 있던 조선인 5,000여 명이 검푸른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조선중앙통신]을 비롯한 북한 매체들은 24일 '우키시마 호 폭침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일제에 의한 조직적인 조선인 대학살만행이라고 비판하고, 과거범죄에 대한 일본의 철저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했다.
통신은 사건 발생 후 일본은 '기뢰에 의한 침몰사고'라고 했지만, 그것은 "명백히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조작에 의해 감행된 범죄적 만행이었다"고 규탄했다.
일본 방위성 전쟁사자료실에서 뒤늦게 발견된 전보 한장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일본의 패망 직후인 그해 8월 19일 해군성 운수본부에서 오미나토 해군경비부 참모장에게 보낸 전보에는 우키시마호의 운항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4,730t급에 달하는 해군수송선인 우키시마호의 승선과 출항이 승인되었다는 건 계획적인 폭침범죄사건임을 실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미 연합군 명령으로 일본 영해에서 100t급 이상 선박의 항행이 중지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 우키시마호 승조원은 얼마 되지 않은 연료를 가지고 출항을 했으며, 그건 배가 처음부터 부산항까지 항행할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증언을 남겼다.
또 우키시마호가 폭발하기 직전에 배에 탔던 일본인들이 다급히 보트를 타고 달아난 정황도 사전에 계획된 폭침에 따른 대책이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짚히는 대목이다.
통신은 이밖에 기뢰해제가 끝난 안전항로였던 마이쓰루항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바다에 부설된 기뢰 따위의 위험물을 치워없앴다는 '소해(掃海) 완료' 신호를 받은 우키시마호가 기뢰를 만났다는 것도 일본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기뢰폭발시 반드시 일어나는 물기둥도 솟구치지 않았고, 기뢰는 한번밖에 폭발하지 않았는데 배에서는 여러번의 연속적인 폭발이 일어났다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도 석연치 않다고 지적했다.
최고인민회의 및 내각 기관지인 [민주조선]은 같은 날 △일제가 패망한 지 열흘이 지난 때에 우키시마호는 왜 폭침되었나 △일본 군함에 어떻게 수천명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이 타고 있었는가 라는 의혹을 던지고,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에는 '조선인 대학살을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한 일본군부 당국의 무서운 모략이 숨어있다'고 말했다.
신문에 따르면, 일본 해군성 운수본부는 폭침 5일전인 그해 8월 19일 오미나토 해군경비부 참모장에게 우키시마호 출항을 명령하는 전보문을 발송했다.
이에 따라 오미나토 해군경비부는 조선인 강제연행자들과 가족들에게 '조선으로 가는 배는 이것 밖에 없다'며 더 많은 조선인들이 배에 타도록 유도하는 한편, 패망한 마당에 조선에 왜 가야 하느냐고 출항을 거부한 일본인 승조원들에게는 군법 위반으로 처형하겠다며 출항을 강요했다.
그해 8월 22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군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미군정의 항행중지 명령에 따라 마이쓰루 항구에 들어가던 순간 폭발됐다.
신문은 우키시마호 폭침 직후 일본은 기뢰에 부딪혀 폭발한 것으로 변명했으나 1954년에 인양해 검사한 배의 밑창 철판들은 정확히 밖으로 휘어져 있었다고 지적했다.
폭발이 기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배안에서 일어났다는 걸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