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20개 시,군 어김없이 계속 변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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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12-23 11:38 조회2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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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20개 시,군 어김없이 계속 변화해야"
- 이승현 기자
- 승인 2024.12.21 14:15
김정은 위원장 성천군 지방공업공장 준공식 연설(전문)
"가슴아픈 전철 되풀이해선 안돼"...60년전 김주석 창성연석회의까지 작심 분석
북한이 10년 계획으로 추진하는 '지방발전 20×10 정책'의 첫 시작을 알린 평안남도 성천군의 지방공업공장이 건설을 마치고 20일 준공식을 진행했다.
올 2월 28일 착공한 이후 10개월, 290여일만에 이룬 성과이다. 나머지 지방공업공장들은 새해 시작과 함께 전국의 약 20개 시,군에서 수십개의 공장이 일시에 준공된다.
[노동신문]은 2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지방발전 20×10 정책》 성천군 지방공업공장 준공식이 12월 20일에 성대히 진행되였다"고 보도했다.
준공식에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당 중앙지도기관 관계자들, 각급 지방발전20×10비상설추진위원회 관계자들, 건설에 나선 군인들이 참가했다.
김 위원장은 연설을 통해 "10년혁명의 시발이자 그 성패를 가늠하는 축도라고도 할 수 있는 올해에 전국의 각 지역들에 새로운 실체들을 일떠세움으로써 사람들에게 지방이 변한다는 확고한 인식을 주고 지방발전정책을 다각적이고 풍부한 경험에 립각하여 보다 과학적이고 정확하게 추진할수 있는 동력을 확보"했다고 정책 추진에 자신감을 보였다.
또 "우리 당은 력사적인 새시대 지방발전정책과 농촌혁명강령을 100년 후에도 인민들이 덕을 볼 수 있게 더욱 확대심화시킬 것"이라며 분투를 호소했다.
김 위원장은 "해가 바뀔 때마다 20개 시,군이 변하는 위대한 년대는 어김없이 무조건 계속 이어져야 하며 가시적인 성과보다 교훈과 전망을 더 중시하면서 전진의 보폭을 더 크고 정확하게 내짚어야 한다"고 하면서 내년도 지방발전정책 실행에서 견지할 원칙적 문제와 과업을 제시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연설을 마친 김 위원장은 준공식 참가자들과 함께 기름, 간장·된장, 밤 졸임, 빵, 음료, 비누 생산실과 목재가공작업반을 비롯한 여러 생산공정을 돌아보면서 "현대적인 지방공업공장 운영에서 기본은 생산정상화와 질 제고"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군당위원회에서는 '생산정상화와 질 제고'를 중요 정책과업으로 정하고 월별로 강하게 '총화 대책'하여 당 정책이 지방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 실제로 이바지하고 지방발전을 효율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 정책으로 분명히 전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원료, 자재, 설비의 국산화 비중을 높일데 대한 문제 △제품검사체계를 엄격히 세울데 대한 문제 △생산공정의 현대화수준을 부단히 제고해나갈데 대한 문제 △제품포장에서 편리성과 실리성을 철저히 보장할데 대한 문제 등을 향후 지방공업공장 운영에서 지켜야 할 과업으로 제시했다.
김 위원장은 연설에서 '군의 역할 강화와 지방공업·농촌경리 발전'에 대해 결정한 1962년 '창성연석회의'를 거론하며 "창성련석회의로부터도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방공업정책이 관철되지 못하였는가"라고 묻고는 "앞으로 가슴아픈 전철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문제를 반드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일일이 사례를 들어가며 정책실패 요인을 작심한 듯 따졌다.
지금까지 지방공업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정책과 노선이 없고 노력과 자금을 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방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뚜렷한 목표와 단계별 계획, 명확한 기준과 과학적인 방법론없이 진행되었고 당적·국가적 사업으로 강력히 전개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혹독하게 진단했다.
"한마디로 자기가 개척하는 부가 아니라 자연적인 혜택에 의거하여 생산활동과 경제사업을 피동적으로 해온 것이 지난 시대 우리 지방공업의 실상이였으며 일군들의 비혁명적인 일본새였다"는 것.
김 위원장은 "일군들은 세기적 락후성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지방공업의 경제적 빈약성에 대하여 객관적 조건을 론하기 전에 응당 지방인민들을 대하는 일군들 자체의 잘못된 관점과 결여된 복무정신, 협소한 안목과 무능력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사회주의농촌문제에 관한 테제'가 나온 1964년 당 제4기 제8차전원회의 이후 왜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관철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먼저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완전승리에로 가는 도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촌문제해결은 더 높은 단계에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과도기에 수행하여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과제"이며, "사회주의 건설과정은 계급적 견지에서 보면 온 사회의 로동계급화가 실현되여가는 과정이고 사회경제관계의 견지에서 보면 농업의 공업화, 농촌의 도시화, 소유형태의 단일화가 실현되여가는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즉, "농촌문제가 종국적으로 해결되면 과도기의 임무가 완수되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포할수 있다는 것."
그래서 농촌문제의 종국적 해결을 중요한 전략적 과업으로 제기하고 그 실현 방향과 기본원칙, 방도를 집대성하여 '사회주의농촌테제'를 내놓고 오랜 기간 투쟁을 벌여왔으나 "오늘에 와서 랭정하게 평가해보면 우리 농촌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오히려 오늘에로 거슬러올수록 농촌이 더 피페해지고 도농격차는 더 심해졌으며 농민들의 생활은 더 령락되였다"고 하면서 "이것은 명백히 농촌테제 관철을 위한 투쟁에서의 정체이고 후퇴"라고 냉정한 평가를 내놓았다.
이같은 결과는 지방공업의 쇠락원인과 본질상 다를 바 없다고 하면서 △엄중한 경제적난관 조성 △농업부문에 대한 투자가 국가예산의 3%수준으로까지 대폭 저하된 문제 등을 꼽았다.
"1990년대 중반기부터 농업부문의 물질적토대가 약화되였지만 이런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없이 대상건설에 부족되는 자금과 자재를 농장들에서 계속 긁어내여 농촌은 더욱 주저앉게 되였고 나중에는 공업이 농업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농업이 공업을 지원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였다"는 내부 사정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김 위원장은 2021년 12월 당 제8기 제4차전원회의에서 '새시대 농촌혁명강령'이 제시된 후 짧은 기간에 의미있는 성과가 달성되고 있다며 "가장 귀중한 성과는 우리 농업근로자들이 농촌이 변하는 것을 실감하고 있으며 알곡생산구조를 바꿀데 대한 당정책의 생활력을 실지 체험하면서 자기 힘으로 자기 고장, 자기 농촌을 개변시킬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농민들이 농사에 의욕을 갖고 노력할 수 있도록 농민 분배를 정확히 하는 것, 농기계 성능을 더욱 개선해 이용률을 높이는 문제, 농촌살림집의 일부 부실 공사를 해결할 대책 등 세부적 내용까지 일일이 언급하며 "당의 전면적 발전 리념을 실현하는데서 지방발전정책과 농촌혁명강령은 유기적으로 련관되여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성천군안의 주민 여러분,
우리 국가건설사에 처음으로 되는 《지방발전 20×10 정책》과 함께 조직되여 조국과 인민앞에 첫 창조물을 내놓은 각급 건설련대 지휘관,병사들,
지방변혁의 력사적대업을 주도할 중대한 사명을 부여받고 온 한해 줄기찬 투쟁을 벌려온 각급 추진위원회 지휘성원들,련관부문과 평남도안의 일군들,
동지들!
지난 2월 력사적인 지방발전혁명의 첫걸음을 알리는 착공의 발파소리와 함께 모두가 강렬한 숙원을 안고 첫삽을 박은 때로부터 온 나라가 관심했던 첫해의 대상건설이 드디여 완공의 날을 맞아 이렇듯 성천군의 재부로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였습니다.
우리당 10년혁명의 개시를 선언하던 력사적인 장소에서 10개월만에 그 첫 결실을 놓고 준공의식을 가지는것은 우리 사업의 진의와 전도를 확인하는 의의깊은 일입니다.
현대적인 새 공장들을 이 고장의 주인들에게 안겨주게 되였다고 생각할 때 지방인민들에게 항상 송구했던 마음도 다소 풀리는것만 같습니다.
이 뜻깊은 자리에서 당과 공화국정부를 대표하여 열렬한 애국충성의 마음으로 새시대 지방발전사의 첫 페지를 자랑스럽게 엮어 성천의 새 모습을 펼쳐놓은 건설련대 관병들과 전체 군인건설자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깨끗한 지성과 무한한 책임성을 고여 오늘의 준공에 공헌한 련관단위 일군들과 근로자들,지원자들에게도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동지들!
이제 새해의 시작과 함께 수십개의 지방공업공장들이 여기 성천군에서처럼 전국의 근 20개 시,군에서 일시에 준공하게 됩니다.
이 고무적인 현실은 지방인민들의 생활환경을 개변하기 위한 혁명적인 로선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관철하여온 우리당 지방발전정책실행의 첫해 과업이 결속된다는것을 의미합니다.
10년혁명의 시발이자 그 성패를 가늠하는 축도라고도 할수 있는 올해에 우리는 전국의 각 지역들에 새로운 실체들을 일떠세움으로써 사람들에게 지방이 변한다는 확고한 인식을 주고 지방발전정책을 다각적이고 풍부한 경험에 립각하여 보다 과학적이고 정확하게 추진할수 있는 동력을 확보하였습니다.
지방공업혁명의 전위대인 각급 건설련대들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고 국가적인 지도체계와 보장체계가 정연하게 세워진것도 지방의 변혁을 다계단으로,립체적으로,공세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훌륭한 전망을 열어놓은 중요한 성과이고 담보입니다.
한해동안에 이와 같은 적지 않은 성과들을 쟁취하였지만 이것이 우리가 벌써부터 자축하거나 만세를 부를 까닭으로는 될수가 없습니다.
지난 시대들에 지방발전에 관한 정책과 로선이 없고 노력과 자금을 들이지 않아서 지금과 같이 전반적지방공업이 령락된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서 창성련석회의로부터도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방공업정책이 관철되지 못하였는가.
오늘 이렇게 당중앙지도기관 성원들을 비롯한 당과 국가의 지도간부들과 중앙과 지방의 관계일군들이 모여 지방공업발전문제를 현지에서 론하는 기회에 앞으로 가슴아픈 전철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문제를 반드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우선 지방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이 뚜렷한 목표와 단계별계획,명확한 기준과 과학적인 방법론이 없이 진행되여온데 있습니다.
지방공업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척된 공업분야입니다.
남들이 걸어본적 없는 미지의 길일수록 표대와 리정이 명확하여야 하겠지만 지난 시기 지방발전정책집행을 위한 사업들은 매우 산발적이고 자연발생적이였습니다.
지방경제의 가장 초보적이고 보편적인 공장건설에 대하여 말한다면 언제까지 몇개의 시,군에 어떤 공장들을 어떤 수준에서 건설한다는 똑똑한 목표와 기준이 없이 지방자체로 제각기 진행되였기때문에 공장수를 늘이는데만 집착하는 페단들을 막을수 없었으며 지어 해당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꼭 필요한 공장은 없고 불필요한 공장은 생겨나는 비정상적인 후과까지 초래되였습니다.
품이 많이 드는 공장건설은 될수록이면 피하고 공장개수나 맞추어놓으면 무난하던 사업체계,어떤 제품을 생산하든 주민들에게 공급했다는 실적만 내면 평가를 받던 관례는 지난 시대 지방공업공장들의 면모와 지방공업을 대하는 인민들의 부정적인 인식에 그대로 반영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지난 시기 우시군,연탄군과 같이 지방공업분야에서 일정한 성과가 있는 시,군들과 반면에 말할수없이 한심한 수준에 있는 지역들이 병존하는 극심한 불균형이 지속된것은 지방공업정책이 똑똑한 기준과 원칙이 없이 실행된데 기인됩니다.
이렇게 지방공업공장들의 규모와 형태,생산공정들이 심히 차이나는것은 물론 그에 따른 운영수준도 천태만상인것으로 하여 모든 지역의 인민생활을 전반적으로 추켜세우려는 정책적의도에도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랭철하게 평가한다면 당정책을 대하는 해당 부문,해당 지역 일군들의 태도와 능력 그리고 시,군들의 경제적잠재력에 따라 좌우될수밖에 없었던것이 바로 지난 시대의 지방공업정책이였습니다.
창성련석회의이후 지방공업공장건설이 계속 확대되여 1980년에는 공장수가 거의 4,000개로 늘어났지만 건물상태와 기술수준은 둘째치고라도 해당 지역의 경제지리적조건과 지역의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리용할수 있게 꾸려진 공장은 불과 몇개 되지 않았고 실지 인민들이 요구하는 제품의 종류와 가지수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되였습니다.
여기 성천군에도 한때 식료,일용,피복,건재,제약,농기구공장과 같은 적지 않은 지방공업공장들이 있었는데 그 실태가 어떠했는지는 여기서 살아오신 주민들이 더 잘 알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지방공업이 수십년에 걸쳐 건설되여왔다고는 하지만 실지 인민들이 응당한 덕을 보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원인은 또한 지방공업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사업이 당적,국가적사업으로 강력히 전개되지 못한데 기인됩니다.
지방공업을 발전시키는 사업은 전체 지방인민들의 생활향상과 200여개에 달하는 시,군의 경제발전과 관련되는 방대하고 복잡한 사업으로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여기에는 이 사업을 통일적으로 장악추진하는 정연한 지도체계수립,국가적투자와 중앙공업의 지원은 물론 시,군들이 자체의 자금을 확보할수 있는 조건보장과 원료기지의 합리적인 조절배치를 비롯하여 국가적으로 대책하여야 할 많은 문제들이 포함되여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놓고보면 지방공업을 발전시키는 문제는 사실상 지방주체의 사업으로 되여왔다고 볼수 있습니다.
련석회의에서 제시된 중요한 과업으로서 지방공업공장들의 생산공정을 기계화,자동화하는 사업 하나만 보아도 일부 중시되는 대상을 제외하고는 중앙의 공장,기업소들의 여유생산품이나 페기된 설비들을 가져다 맞추어놓았고 많은 경우 군중적운동이라는 외피를 쓰고 지방들의 로력과 자금을 동원하는데만 집착하였습니다.
중앙공업의 여력과 자체의 락후한 경제기술력에 의거하는 지방공업이 고질적인 후진성에서 벗어날수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질수밖에 없다는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지방공업의 새 력사가 시작된 고향으로 불리웠고 중앙의 지원을 그중 많이 받았다고 하는 창성군의 지방공업공장들까지도 정상적인 투자와 기술방조를 받지 못하여 설비수준이 현대화를 론하기 힘든 정도로 락후했으니 다른 지역의 실태는 더 말할 형편이 못됩니다.
창성군을 내세우고 온 나라에 일반화한다고 하면서 기록영화로도 소개하고 창성이 변했다는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는데 지방인민들에게 실지 덕을 가져다준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것입니다.
나라의 전반적경제사정으로 지방공업공장들이 완전히 주저앉고 지방자체의 능력으로는 재건이 불가능하다는것이 명백한 상태에서도 정부내 경제기관들에서는 본보기공장을 몇개 세우고 년차별로 지방공업공장들을 현대적으로 개건한다는 비현실적인 공담만 하면서 형세와 조건에 빙자하여왔습니다.
여기에 지방공업을 지도하는 중앙기관이 10여차에 걸쳐 다른 기관과 통합,분리되면서 지방경제에 대한 국가적인 지도관리에서 무질서와 혼란이 초래되고 그 과정에 지방공업공장들의 건물과 설비들이 적지 않게 류실되였으며 경제적효과성도 크게 저하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필수적인 국가적투자와 통일적인 지도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한데다가 시,군들이 자금수입을 늘이는데 유리한 지역과 자원들을 성,중앙기관,무력,특수단위들이 차지하고 경제활동공간을 위축하다보니 지방공업이 제발로 일어서기도 곤난하게 되고 지방인민들속에서 창조적인 생산활동에 대한 의욕까지 식어버리게 되였습니다.
이상에서와 같이 불합리하고 유해로운 상태를 뒤바꾸는 혁명적인 조치가 없이는 언제 가도 지방공업이 일어설수 없다는것이 우리가 내린 결론입니다.
나라의 지방공업이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른데는 지방공업발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우리 일군들의 그릇된 관점과 비혁명적인 사업태도,무능력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지방경제가 활성화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남포유리그릇과 사리원경암산구두약,원산철제일용품을 비롯하여 인민들의 호평을 받는 소비품들도 있었고 지어 국제시장에까지 진출한 인기있는 경공업제품들도 있었지만 일군들이 그 생활력을 지속적으로 더 높이 확대발양시키기 위한 사업에 사상적으로 달라붙지 않은 결과에 많은 공력을 들인 지방공업공장들도 점차 가치를 상실하게 되였습니다.
지난 시기 경제부문 일군들이 경공업공장의 현대화요,기술개건이요 하면서 많이 떠들었지만 그 념두에는 중앙공업만 있었지 지방공업은 없었습니다.
지방사람들에게 중앙의것보다 못한 제품이 차례지는것을 례사롭게 여기고 질보다 량을 먼저 생각하면서 생산계획을 미달하였다는 추궁이나 면하자는 일군들의 협애한 사상관점과 근시안적인 사업태도로 인하여 많은 지방공업공장들이 사실상 진짜 주인이 없는 공장들로 되여버렸으며 지방공업발전이 정체되게 되였습니다.
더우기 1990년대부터는 공장들이 완전히 멎어서다싶이 하였지만 일군들이 조건타발과 패배주의에 빠져 지방공업을 떠메고나가야 할 기술자,기능공력량마저 보존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방공업은 어디까지나 해당 지역의 경제적자원과 지리적조건에 토대하고있는 고유의 속성으로 하여 자기 지역의 잠재력을 적극 개발리용하기 위한 대책들이 강구되여야만 구실을 할수 있게 되여있습니다.
이로부터 수령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산을 낀데서는 산을,바다를 낀데서는 바다를 잘 리용하여 인민생활을 높일데 대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시였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기 산골지방에서는 산에 자연적으로 나는 산열매를 채취하여 음료를 만들어 먹는것이 고작이였고 바다가에서는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나 건져낸 나물들을 주민들에게 공급하는것이 전부였습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개척하는 부가 아니라 자연적인 혜택에 의거하여 생산활동과 경제사업을 피동적으로 해온것이 지난 시대 우리 지방공업의 실상이였으며 일군들의 비혁명적인 일본새였습니다.
여기 모인 일군들은 세기적락후성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지방공업의 경제적빈약성에 대하여 객관적조건을 론하기 전에 응당 지방인민들을 대하는 일군들자체의 잘못된 관점과 결여된 복무정신,협소한 안목과 무능력에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방인민들의 생활을 전적으로 책임진 우리 일군들의 옳은 태도이고 교훈에 자기를 비추어보면서 개진하려는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오늘날 지방공업을 담당하고있는 일군들은 지난 시기 이 부문의 사업을 맡아본 일군들과 같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일군으로 력사에 남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동지들!
오늘 이 기회에 1964년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8차전원회의에서 채택된 사회주의농촌문제에 관한 테제가 왜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관철되지 못하였는가 하는데 대하여서도 언급하자고 합니다.
우리 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현 단계와 장래에 있어서 농촌문제는 그 진퇴를 결정짓는 관건적인 위치에 놓여있으며 이 문제를 바로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스스로가 모진 고난을 무릅쓰며 이루고저 하는 위업의 정당성과 승리의 필연성이 증명될수가 없고 원하는 목표에로 가닿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완전승리에로 가는 도상에 위치하고있으며 농촌문제해결은 더 높은 단계에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과도기에 수행하여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과제로 됩니다.
사회주의건설과정은 계급적견지에서 보면 온 사회의 로동계급화가 실현되여가는 과정이고 사회경제관계의 견지에서 보면 농업의 공업화,농촌의 도시화,소유형태의 단일화가 실현되여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농촌문제가 종국적으로 해결되면 과도기의 임무가 완수되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포할수 있다는것을 말해줍니다.
더우기 우리 나라와 같이 정상적인 사회발전단계를 거치지 못한 나라인 경우 다름아닌 농촌문제로 하여 비교적 오랜 기간의 과도기를 거치게 되는것만큼 농촌문제를 얼마나 빨리 해결하는가 하는데 따라 과도기를 얼마나 빨리 경과하는가 하는것이 좌우되게 됩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우리 당은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한 다음 농촌문제의 종국적해결을 중요한 전략적과업으로 제기하고 그 실현을 위한 방향과 기본원칙,방도들을 집대성하여 사회주의농촌테제를 내놓았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투쟁을 벌려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랭정하게 평가해보면 우리 농촌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농촌의 사회경제적특성과 세기적인 락후성으로 하여 농촌문제가 꾸준한 투쟁과 노력에 의해서만 완전히 해결될수 있는 장기적이고도 어려운 과제인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테제가 발표된 때로부터 무려 6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오면서 실지 농촌의 모든 령역에서 아무런 변화나 개변이 이룩되지 못하였다는것은 심중한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에로 거슬러올수록 농촌이 더 피페해지고 도농격차는 더 심해졌으며 농민들의 생활은 더 령락되였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농촌테제관철을 위한 투쟁에서의 정체이고 후퇴입니다.
바로 농촌문제해결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고 농업발전이 퇴보한것으로 하여 일부에서는 농촌의 전망을 우려하고 사회주의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경향들까지 나타나고있습니다.
사회주의농촌테제와 같은 강령은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없었지만 왜 응당한 결실을 보지 못하였는가 하는것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견해는 우리 농촌이 좀처럼 추서지 못하고있는것도 지방공업이 조락된 원인과 본질상 다를바 없다는것입니다.
농촌테제는 발표된 직후부터 세기적인 락후와 빈궁이 지배하던 우리 농촌을 획기적변혁에로 강력히 견인하는데서 커다란 작용을 하였으며 그 로정에서 나라의 농업발전은 높은 단계에 올라서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엄중한 경제적난관이 조성되고 농업부문에 대한 투자가 국가예산의 3%수준으로까지 대폭 저하되면서부터 농촌경리의 수리화,기계화,화학화,전기화수준이 점점 퇴보하여 농촌은 물질기술적으로 대단히 약화되였습니다.
국가적으로 막대한 량의 세멘트와 강재를 들여 기본적으로 완성하였던 전국적인 관개체계는 정상적인 보수정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로후화되였고 농기계생산이 급격히 감퇴되여 만성적인 농기계부족을 초래하였으며 화학비료공급량은 2000년대에 1980년대에 비하여 3분의 1이하로 줄어들고 농촌지역들에 있는 많은 전력설비들이 파손,분실되였습니다.
이렇게 1990년대 중반기부터 농업부문의 물질적토대가 약화되였지만 이런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없이 대상건설에 부족되는 자금과 자재를 농장들에서 계속 긁어내여 농촌은 더욱 주저앉게 되였고 나중에는 공업이 농업을 방조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농업이 공업을 지원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였습니다.
옳바른 국가적대책이 세워지지 않은 후과는 농촌의 면모에서도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시,군마다 농촌건설대가,중앙에는 농촌주택건설총국이 조직되여 농촌살림집건설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본격화하였으나 점차 이 사업이 시,군 또는 농장자체로 저조하게 진행되였으며 그나마 똑똑한 설계도 없고 한세대당 세멘트공급량이 4~5t밖에 되지 않은 관계로 살림집건설에 토피와 산자를 비롯한 지방자재를 많이 리용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농촌리병원,진료소들을 잘 꾸리고 의료기구와 비품들을 갖추어주기 위한 사업도 국가적인 사업으로 통일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해당 농장들에 방임한데로부터 온전한 리병원,진료소를 찾아볼수 없으며 농촌에 똑똑한 리발소,목욕탕을 비롯한 편의봉사시설과 과학기술보급거점도 없어 농장원들이 지식과 문명으로부터 멀리 뒤떨어지고 지어 문화사업은 도시에서나 하는것처럼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였습니다.
지속되는 농촌의 락후성으로 농장원들의 생활수준은 전등 하나도 사기 힘들 정도로 말할수없이 령락되고 의식상태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으며 농촌에 애착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다른 부문으로 빠져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