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징이 l 베이징대 교수
코로나19는 마치 블랙홀처럼 동북아시아의 이슈를 삼켜버리고 시간을 멈춰 세운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동력을 잃어가던 북핵 문제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이제 국제사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듯하다. 이 시점에 6자 회담의 ‘9·19 공동성명’이나 ‘2·13 합의’를 되돌아보면 경이로운 느낌마저 든다. 동북아 역사상 처음으로 동북아 국가들이 마주 앉아 만들어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밑그림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국가들은 언제 다시 모여 앉아 그런 청사진을 그려낼 수 있을까?
동북아 국가들은 이제 다시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들은 양자 만남에서 계속 한반도 평화체제를 역설하고 선언해왔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북-미는 한반도의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논의했다. 남북은 더더욱 정상회담 때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선언했다. 중국은 중-북, 중-한 양자관계에서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를 우선순위에 놓았다.
되돌아보면 한반도 평화 관련 논의는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의 제네바 회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멈춘 적이 없다. 그렇지만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70년의 과제는 모두 강대국들의 전략 프레임 안에서 맴돌이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한반도 비핵화와 동전의 양면이 됐고, 북한은 ‘선 평화체제 후 비핵화’, 미국은 ‘선 비핵화 후 평화체제’를 집요하게 주장하며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 단순히 선후관계라면 중국이 내놓은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쌍궤병진’은 해법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북한이 내놓은 ‘단계별 동시적 조치’도 분명 해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두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결과는 미국이 제재나 압박을 통한 일괄타결에만 관심이 있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는 관심도 준비도 별로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평화체제 구축 준비가 돼 있는 것일까? 이제까지 북한은 ‘평화협정’만 체결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여겨왔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조-미, 북남 관계 그리고 모든 당사자들의 안보상 우려가 완전히 해결되고 따라서 핵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평화체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 북핵 문제를 외면하고 ‘평화협정’ 등을 운운하는 것은 역시 평화체제 구축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하겠다.
만에 하나 미국이 북핵 문제를 제쳐놓고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수교를 단행한다고 가정할 때 북한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거기에 한국이 남북교류와 남북경협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고 할 때 북한은 역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것일까? 북한으로서는 대북제재보다 더 무서운 체제 위협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냉전 시기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권에 대한 미국의 전략은 케넌의 ‘봉쇄전략’과 덜레스의 ‘평화적 이행’ 전략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위협은 후자가 훨씬 컸다. 지금도 북한은 이를 “‘협조’와 ‘교류’ 등의 간판 밑에 진행되는 자본주의 사상·문화적 침투 책동”이라고 하며 그것과의 싸움을 ‘포성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역설적으로 북한에도 딜레마를 안기게 된다. 북한이 미국과 수교하고 국제사회에 융합되려면, 경제와 금융시장의 투명화·공개화와 같은 모든 분야 시스템의 엄청난 변화가 병행돼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에서도 한국이 거창하게 그린 한반도 경제지도는 북한에 장밋빛 전망보다도 불안한 미래가 될 수도 있다. 2018년 한반도에 일어난 경천동지의 변화가 지난 한해 정체 모드로 돌아서 북한이 빗장을 지른 배경에는 이러한 딜레마 요소도 없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이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하면 큰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면 미국과 북한 모두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 문제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연동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고 북한은 국제사회에 융합될 준비를 착실히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