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특보가 묻고 헤커 박사가 답하다
외교 따라 핵개발 양상 달라져
클린턴 때 맺은 북미 기본합의서로 핵 억제 되다가 부시 때 개발 본격화
접촉 없던 오바마 때 상황 나빠져 트럼프 초기 위기 거쳐 대화뒤 주춤
영변 핵폐기, 핵 종결 결정적 첫발
플루토늄·고농축 우라늄·삼중수소 모두 갖춘 핵능력 향방 가르는 시설
재활용 막는 ‘폐기’엔 시간 많이 걸려 국제조사단 확인뒤 ‘폐쇄’부터 집중을
불가역적 비핵화는 원천 불가능
농업·의료·전력용 등 평화적 핵은 길 열어둬
외교 따라 핵개발 양상 달라져
클린턴 때 맺은 북미 기본합의서로 핵 억제 되다가 부시 때 개발 본격화
접촉 없던 오바마 때 상황 나빠져 트럼프 초기 위기 거쳐 대화뒤 주춤
영변 핵폐기, 핵 종결 결정적 첫발
플루토늄·고농축 우라늄·삼중수소 모두 갖춘 핵능력 향방 가르는 시설
재활용 막는 ‘폐기’엔 시간 많이 걸려 국제조사단 확인뒤 ‘폐쇄’부터 집중을
불가역적 비핵화는 원천 불가능
농업·의료·전력용 등 평화적 핵은 길 열어둬
19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로 더플라자호텔에서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왼쪽)과 시그프리드 해커 박사가 북미 핵협상 관련해 대담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북-미 실무협상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잦아지는 상황에서 북한 핵 프로그램에 관한 한 세계 최고 권위자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 겸 국제안보협력센터 선임연구원(이하 ‘헤커’)은 네가지를 우선 강조했다.
첫째, “긴장을 낮추는” 외교와 협상의 중요성이다. 헤커는 “나는 기술자이지 외교관이 아니다”라면서도, 연구 결과 “외교가 작동하면 북한의 핵 개발 속도가 더뎌졌고, 외교가 멈추면 속도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둘째, ‘영변 핵시설 단지’의 중요성이다. 그는 “영변은 북한 핵 프로그램의 ‘심장’”이라며 “영변 폐기는 북핵 프로그램을 끝내기 위한 결정적인 첫 단계”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셋째, ‘(단계적) 비핵화-관계 정상화 병행’의 중요성이다. 그는 “행동 대 행동, 점진적 동시 교환만이 작동 가능한 방식”이라며 “북한의 비핵화는 미-북 관계 정상화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짚었다. 넷째, ‘불가역적’(irreversible) 비핵화의 원천적 불가능성이다. 그는 미국 정부의 ‘시브이아이디’(CVID,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주장을 겨냥해 “사람의 기억을 완전히 없애지 않는 한 ‘불가역적 비핵화’는 불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울러 “핵심은 핵 프로그램의 비무장화”라며,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에 유연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농업·의료 등 민수용 핵 이용 권리를 열어두는 유연한 접근으로 북한 핵과학자들의 ‘핵 비무장화 협력’을 얻어내야 북한의 비핵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기도가 주최한 ‘디엠제트(DMZ) 포럼 2019’에 참석하려고 한국에 온 헤커를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이하 ‘문’)가 19일 오후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만났다. 오찬을 포함해 2시간 넘게 이어진 대화는 주로 문 특보가 묻고 헤커 박사가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둘은 극우를 포함한 한국 보수 세력 일각에서 제기되는 ‘한국 핵무장’ 주장에 대해 “북한 비핵화의 명분을 훼손하고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촉발할 위험하고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입을 모았다.
헤커는 2004~2010년 7차례 방북해 영변 핵시설 단지를 네차례 둘러봤고, 원심분리기 등 농축우라늄 핵 프로그램 시설을 직접 봤다고 확인된 유일한 외부인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방북한 2010년 11월 이후 영변 핵시설을 현장에서 본 외부인은 아무도 없다. 194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세계 최초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의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으로 1986~1997년 일했으며, 옛소련의 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 등에 ‘협력적 위협 감소’(CTR) 프로그램을 적용해 비핵화하는 과정에 전문가로서 깊이 관여한 핵물리학자 겸 비핵화 프로그램 전문가다. 그는 1992년 이른바 ‘1차 북핵 위기’ 발발 이후 ‘북핵 문제’의 전개 과정을 추적해 북-미 대화를 포함한 “외교가 긴장을 낮춰 북한의 핵 개발 속도를 늦춘다”는 가설을 실증한 ‘북한 핵 프로그램의 포괄적인 역사’(A Comprehensive History Of North Korea’s Nuclear Program)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2009년 미국 대통령이 주는 ‘엔리코 페르미’ 상을 받았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로 더플라자호텔에서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왼쪽)과 시그프리드 해커 박사가 북미 핵협상 관련해 대담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문 헤커 박사는 외교와 북한 핵무기 개발 사이의 흥미로운 상관관계를 짚어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까지 통사적으로 짚어주기 바란다. 헤커 1992년 이후 지금까지 큰 틀에서 짚어 보면, 북한은 ‘기꺼이 대화할 용의가 있다. 다만 일이 잘 안 풀릴 때를 대비해 (핵 개발을 통해) 계속 방어막을 치겠다’는 태도다.
클린턴 땐 1994년 북-미 기본합의서(AF)와 2000년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발표하는 등 외교가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됐다. 핵 개발은 억제되거나 속도가 느려졌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이룬 합의와 외교를 싫어했다. 기본합의서 체제가 무력화됐다. 나는 부시 임기 초반인 2002~2003년 북한이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 결심을 했다고 본다. 6자회담 9·19 공동성명 채택 등으로 한때 핵 개발 속도가 늦춰졌다. 하지만 2006년 1차 핵실험 등 전반적 상황이 나빠졌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어떤 이유에선지 북한과 접촉하지 않았다. 오바마 재임 8년간 네차례의 핵실험이 있었다. 상황이 매우 나빠졌다. 이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 초반 “화염과 분노”의 시간이 왔다. 2017년 말 “한반도 상황은 매우, 매우, 매우 위험했다”.(헤커는 ‘dangerous’라는 단어를 세차례 반복 강조했다.)
다행스럽게도 2018년 다시 대화가 시작됐다. 2018년 6월 북-미 정상회담은 긴장을 크게 낮췄다.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큰 발걸음을 내디디리라 기대됐지만, 잘 안됐다. 북한은 2017년 9월3일 6차 핵실험 이후 2년 넘게 핵실험을 하지 않고 있다. ‘외교’의 효과다.
문 하노이 회담은 왜 잘 안됐다고 보나.
헤커 북·미 모두 충분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 상대가 자기 요구를 받아들일 거라고 과신한 채 협상장에 들어온 거 같다. 무엇보다 “영변 핵시설을 모두 폐기하겠다”는 북한의 제안이 어떤 의미인지 판단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본다. ‘영변 폐기’ 제안은 정상회담 전 실무협상이 아닌 정상회담에서 바로 나와 아쉽게도 실무협상 담당자들이 진지하고도 충분하게 논의하지 못했다. “매우매우 중요한, 큰 합의”(very very important, big deal)가 될 수 있었는데….
다만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어려운 협상 과정에도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건 좋은 소식이다.
문 영변 핵시설의 가치를 두고 한·미에선 쓸모없는 고철덩어리라는 주장과 핵 프로그램의 핵심이라는 시각이 엇갈린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합의한 9·19 평양공동선언 5항을 보면 “북측은 미국이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고 명시돼 있다. 문 대통령은 영변 핵시설 폐기는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위한 상당히 중요한 첫 발걸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는데.
헤커 영변 시설은 플루토늄, 고농축 우라늄, 삼중수소와 관련된 곳이다. 영변은 북한 핵 프로그램의 ‘심장’이다. 물론 영변의 일부 시설은 낡았다. 하지만 미국 로스앨러모스의 시설보다는 신형이다. 미국과 러시아의 핵시설도 낡은 게 많지만 대부분 잘 작동한다. 무엇보다 지금 영변에서 얼마나 많은 (핵물질 생산 등) 활동이 있는지를 보면, 어마어마하다. 북한 핵 능력 개발의 향방을 가르는 시설이다. 이 때문에 영변 핵시설 폐기는 매우 의미 있는 결정적인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변을 폐기해도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은 그대로다. 비핵화는 북한의 세가지 핵능력, 곧 핵물질과 핵무기와 운반수단(미사일)을 모두 포괄해 진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영변의 중요성은 논란의 여지 없이 자명하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로 더플라자호텔에서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왼쪽)과 시그프리드 해커 박사가 북미 핵협상 관련해 대담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문 전문가로서 현재 북한의 핵능력을 어떻게 평가하나.
헤커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가 중단된 2017년 12월부터 2019년 9월까지의 추이를 보면, 무기급 플루토늄은 20~40㎏에서 25~48㎏으로 큰 변화가 없다고 추정한다. 고농축 우라늄은 250~500㎏에서 450~700㎏으로 상대적으로 변화가 크다고 본다. 핵무기는 25~30개에서 최대 37개로 추정치를 높였다. 다만 전략 지형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문 영변과 관련한 북쪽의 제안이 ‘폐기’가 아닌 ‘폐쇄’(shutting down)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하노이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영변 지구의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 물질, 생산 시설들을 미국 전문가들의 입회하에 두 나라 기술자들이 공동의 작업으로 영구적으로 완전히 폐기한다”고 밝혔다. 나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완전하고 최종적이고 영구적인 폐기(elimination), 불능화(dismantlement)를 이야기했다고 이해하는데.
헤커 북한이 영변을 폐기하겠다면, 예컨대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5메가와트(㎿) 원자로를 멈추고 완전히 제거했음을 증명해야 한다. 폐기란 ‘재활용’할 수 없음을 뜻한다. 다만 나는 두가지 이유에서 우선 ‘폐쇄’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폐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실험용 경수로 시설은 폐기하기보다 민수용 전환을 열어두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옛소련 등에서 나의 경험에 비춰보면, 그렇게 해야 북한 핵과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핵시설에 대한 훨씬 유리한 협력적 사찰과 검증을 할 수 있다. 핵의 평화적 이용권을 배제하면 완전한 핵 폐기로 가기 어렵다.
문 북-미 실무협상이 열려도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완화+안전보장 조처’의 교환이라는 북쪽의 기존 접근에 변화가 있을 거 같지 않다. 북·미의 접근법에 차이가 여전한데, 한국이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보나.
헤커 하노이에서 미국이 제기한 (‘선 비핵화 후 제재 완화’, 일괄타결식) ‘큰 합의’(빅딜)가 북한에 먹히지 않았다. 행동 대 행동, 점진적 동시교환만이 작동 가능하다.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는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 내가 보기에 미국은 아직 유엔 등의 대북 제재를 완화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남북이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의 제재 완화, 내 표현으론 ‘맞춤형 제재 완화’(tailored sanction relief)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 남과 북이 경제협력을 하려고 해도 미국이 못 하게 하고 있지 않나.
헤커 한국의 구실은 필수다. 궁극적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려면, 인민들이 혜택을 입을 경제발전을 포함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에서 한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남북이 그 ‘미래’를 함께 그려갈 수 있어야 한다. 미국한테만 맡길 일이 아니다.
문 한국 사회 일각에선 북핵에 대응해 핵무장을 하거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처럼 미국의 핵무기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토 핵공유’는 허구다. 핵무기 사용 최종결정권자가 미국 대통령이다. 핵무기 해제 코드를 미국 대통령이 줘야 쓸 수 있다.
헤커 핵무장은 합리적이지 못한,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한국이 핵 비확산(NPT) 체제에서 핵무장을 할 방법이 없다. 물론 한국은 (가난한 북한과 달리) 핵을 개발할 기술과 자금이 충분하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를 피할 길이 없다. 경제가 심각하게 어려워질 수 있다. 재래식 군사력에 맞춰진 군사전략을 전면적으로 재조정해야 하는데, 이는 주변국을 자극해 군비경쟁을 촉발해 오히려 억지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정리 이제훈 노지원 기자 nomad@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