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 입문 전 사업가로 살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의 달인을 자처해왔다. 1993년 클린턴 행정부 때 본격적으로 불거진 뒤 부시·오바마 행정부를 거치며 ‘난제 중 난제’로 진화한 북핵 문제 역시 김정은 위원장과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풀겠다고 큰소리쳤다. 지난해 6월12일 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리고, 공동성명까지 나온 후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찬사와 개인적 신뢰감을 꾸준히 나타냈다. 심지어 그는 김 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라고도 말했다. 하노이에서도 단독 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위대한 지도자”로 호칭했다. 2017년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실험 등 북·미 관계가 최악의 긴장 상황에 빠졌을 때, “화염과 분노” 운운하며 위협하고 김 위원장을 ‘로켓 꼬마(Little Rocket Man)’로 지칭하며 극도의 경멸감을 보였던 때와는 정반대다.
ⓒ연합뉴스 제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양측 수뇌가 직거래하는 ‘톱다운 외교’의 한계가 드러났다. 위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하노이 작별’ 장면. |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친교 외교’를 우려해온 측근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하노이 회담을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을 지낸 벤 로즈가 공동의장으로 있는 비정부 외교안보기관인 국가안보행동(NSA)은 하노이 회담 직후 성명에서 “북·미 협상 내내 트럼프는 전문가들보다는 자신을 전면에 내세웠고, 그 결과 번번이 휘둘렸다”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식의 톱다운 외교에도 유리한 점은 있다. 북한처럼 모든 권력이 최고 지도자에게 집중된 나라의 경우, 중간 실무관리보다 수뇌부와 직거래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하노이 회담 뒤 기자들에게 “북한과 같은 성격의 나라는 오직 최고 지도자만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존 메릴 전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실장도 “실수를 피하려는 경향이 강한 실무선에 협상을 맡길 경우 협상 속도가 상당히 늦어질 것이다. 북한 시스템상 톱다운 외교가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하노이 회담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국익 앞에서는 톱다운 외교마저 유효하지 않음을 드러냈다. 양측의 본격 실무협상은 하노이 정상회담을 겨우 2주 앞두고 진행되었다. 영변 핵시설 폐기가 담긴 지난해 9월 평양 공동선언 직후부터 북·미 양측 실무진이 이견을 해소하기 위한 협상을 펼쳤다면 이번 하노이 회담 개최 직전까지 합의가 가시권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대니얼 러셀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양국 실무진 사이에 상호 이견을 좁히고 대안을 마련하는 힘겨운 외교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양국 지도자가 타협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로이터 통신에 말했다.
ⓒAP Photo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특별대표(오른쪽)는 대북 실무협상단 단장이다. |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톱다운 외교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지금부터라도 실무협상단이 주도하도록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크리스토퍼 그린 국제위기그룹(ICG) 선임고문은 “충분한 준비 없이 이루어진 2차 정상회담의 결렬로 당분간 톱다운 외교는 약해질 것이다. 3차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서는 실무진이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국도 북한도 서로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만큼 본격적인 주고받기의 디테일을 찾기 위해 양측 실무 전문가들이 협상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핵 실무협상가, 미국은 16명 북한은 5명
미국 실무협상단은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현재 북핵 협상에 임하는 미국 실무협상단은 단장인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특별대표)를 비롯해 국제법 전문가인 알렉스 웡 국무부 부차관보, 그리고 핵연료 사이클 전문가, 미사일 전문가, 무역제재 전문가 등 실무 인력이 16명에 달한다. 미국 고위 당국자는 하노이 회담 직후 브리핑에서 “미국 협상단은 북한과의 협상에서 북한 측이 내놓은 새로운 제의에 대해 실현 가능성, 법적 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다각도로 검토하고 대응책을 마련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반면 북한 측의 실무진은 비건 특별대표의 상대인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와 최고 실세 집단인 국무위원회 인사 등 5명 정도다. 미국 측에 비해 3분의 1 규모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협상가들이 교체되는 미국과 달리 이들은 오랫동안 꾸준히 이 분야의 내공을 쌓아온 전문가들이라는 강점이 있다.
외교 전문가들은 3차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미국 측 실무협상진의 행보가 빨라지리라 내다본다. 폼페이오 장관은 “(북측과) 확약하지는 않았지만, 향후 수 주 내에 평양에 협상팀을 보내길 희망한다”라며 실무협상 재개 의사를 밝혔다. 하노이 회담의 재판을 막기 위해서도 실무협상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전임 오바마 행정부 시절 국무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를 지낸 마이클 푹스 미국진보센터(CAP) 선임연구원은 AP 통신에서 “지금부터 북·미 양측의 진짜 협상가들이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실무협상에서 구체적 합의가 나올 때까지 또다시 정상회담이 개최돼선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직거래 타결을 선호해온 북한이 이에 응할지 여부다. 러셀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현시점에서 북측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미국 측 협상가들과 협상에 나서도록 설득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양측은 일단 냉각기를 거친 뒤 실무협상에 다시 나설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그동안 서로 개인적 신뢰를 쌓아온 만큼 협상 모멘텀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도 CBS 방송에 나와 “트럼프 대통령이 실은 김정은 위원장과 유대가 더욱 깊어졌다”라고 말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협정의 미국 측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차관보는 AP 통신과 인터뷰하면서 “두 정상이 개인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핵 협상에 투자한 만큼 계속 협상을 진전시키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하노이 정상회담을 실패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