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의 하노이 4박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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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04 14:00 조회3,72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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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의 하노이 4박 5일 | ||||||||||||||||||||||||||||||||||||||||||||||||||||||||||||||||||||||||||||||||||||
북 대사관, 멜리아.메트로폴 호텔, 호치민 묘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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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아침 8시경(한국시간 10시), 베트남 하노이는 폭풍 같았던 한주를 보내고 평온을 되찾았다. 도로 위에는 간간이 오토바이와 차량이 눈에 띄었다. 상점들은 하나둘씩 문을 열고 있다. 곳곳에 깔렸던 공안 병력도 자취를 감췄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태운 전용열차는 중국 대륙을 지나 평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측근들은 지난달 27~28일 하노이 2차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에게 ‘빅딜’, ‘그랜드 바겐’을 제안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 위원장의 하노이 4박 5일(2.26~3.2)을 되짚어봤다. 북한 대사관, 그리고 레닌 공원
23일 오후 평양역을 떠난 김 위원장 일행은 긴 여행 끝에 26일 오전 중국과 접경지역인 베트남 랑선성 동당역에 내렸다. 승용차로 갈아타고 하노이 시내 멜리아 호텔에 도착했다. 오후 5시경(이하 현지시간) 베트남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직 하노이에 도착하지 않았고, 주최국인 베트남의 응우옌 푸 쫑 주석도 캄보디아 방문 중이었다. ‘북미정상회담’이나 ‘베트남 공식 친선방문’과 엮이지 않으면서 안팎의 눈길을 끌 수 있는 행보였다. 북한 대사관 인근에는 ‘레닌공원’이 있다.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곳이다. 국제미디어센터(IMC) 등록과정에서 새삼 확인했지만, 이 나라의 공식 명칭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베트남 공산당이 영도하고 있다. 당 홈페이지에는 네 사람의 초상이 나란히 올라 있다.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블라디미르 레닌, 호치민.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하던 호 주석은 레닌의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 감명을 받았고, 뒷날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했다. 파리에 있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교류했다.
레닌은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을 이끌어 지구상에 첫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연방(소련)을 건설했다. 공산당(또는 노동당)의 영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등을 특징으로 한다. 종주국인 소련이 해체된 이후 여전히 사회주의 표방하는 나라는 5개국이다. 중국과 베트남, 라오스, 쿠바, 그리고 북한이다. 북한을 제외한 4개국은 통칭 ‘개혁.개방’으로 불리는 정책 변화와 함께 ‘미국과의 수교’를 이뤘다. 북한도 지난해 4월 20일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를 열어 ‘핵무력-경제건설 병진노선의 승리’를 선언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 충력 집중 노선’으로의 변화를 선포했다. (개혁.개방의 출발점인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11기 3중 전회에서 나온 정책의 공식 명칭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의 전환’이다.) 이번 하노이 2차 정상회담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멜리아 호텔
북한대사관 방문 전인지 후인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26일 김 위원장은 멜리아 호텔에서 그간 진행된 북미 실무협상 결과를 보고받았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김혁철 국무위원회 미국담당 특별대표가 보고하는 자리에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 김성혜 노동당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이 배석한 사진을 공개했다. 김 위원장에게 핵과 미국 문제에 관해 조언하는 핵심 참모가 누구인지 밝혀진 셈이다. 이날 미국 인터넷 매체 <VOX>는 김혁철 대표와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실무회담에서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다고 전했다. △한국 전쟁을 상징적으로 끝내기 위한 ‘평화선언’ 서명 △연락사무소 상호 설치 △미군 유해 추가 송환 △영변 핵물질 생산 중단과 남북 경협 프로젝트 추진 위한 유엔 대북 제재 일부 해제이다. 27일 오전 오수용,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과 현송월 선전선동부 부부장 등이 관광명소 하롱베이와 산업도시이자 항구인 하이펑 시찰을 떠났다. 김 위원장은 종일 멜리아 호텔 21층과 22층에 머물며 저녁에 시작될 트럼프 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이 호텔 1층에는 북한 측 실무.지원 인력들이 회의하는 공간도 설치됐다. 숙소 밖에는 내외신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
27일 오후 6시30분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시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8개월여 만에 다시 만났다. 악수 직후 서로의 팔을 툭툭 치며 친근감을 표시하던 두 정상은 정면으로 몸을 돌려 포즈를 잡을 때 다소 굳은 표정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모든 사람들이 반기는 훌륭한 결과가 만들어질 거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첫 정상회담을 굉장히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번 회담도 첫 번째와 같거나 더 훌륭한 성공을 바란다”고 화답했다. 통역만을 대동한 단독회담과 통역 포함 배석자 3명씩 참석한 친교만찬이 이어졌다.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좋았다. “하노이 수뇌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전 세계의 관심과 기대에 맞게 이번 회담에서 포괄적이며 획기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진지하고 심도 있는 의견들을 나누었다”는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 보도가 이를 뒷받침한다. 미국 백악관도 28일 새벽 둘째날 일정을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단독회담과 확대회담, 업무오찬, 공동성명 서명식,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일정이 시간대별로 명기되어 있었다. 워싱턴과의 시차가 딱 12시간인 하노이에서는 이 청문회를 아침 5시30분까지 볼 수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만찬 이후 숙소인 JW메리어트 호텔에서 밤새 코언 청문회를 봤다는 얘기가 퍼졌다. 국제미디어센터(IMC)에서 활동하던 기자들 사이에는 둘째날 정상회담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느냐는 농담반 진담반 말들이 오갔다.
28일 오전 단독회담 이후 확대정상회담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11시50분 시작될 예정이던 업무오찬이 늦춰졌다는 소식은 분명한 이상징후였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오후 2시로 앞당겨질 것이라는 알림이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보내졌다. 오후 2시 10분에 예정됐던 공동성명 서명식이 취소됐다는 뜻이었다. 오후 1시 24분경 확대정상회담이 끝나고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각자 숙소로 향했다. 새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현재 어떠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나 양측 팀은 향후 회담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해 ‘결렬’을 확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시15분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결렬 이유는 “제재 문제”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전반적인 제재 해제를 원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동시에, 한미연합군사연습 중단 의지를 확인하면서,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재개하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표명했다. 돌이켜보면, 코언 청문회 직후인 28일 아침 트럼프 대통령은 ‘빅딜 아니면 노딜’이라는 방침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8일 새벽 ‘공동성명 서명식’이 담긴 둘째날 일정을 배포할 때까지만 해도 ‘타결에의 희망’이 있었다고 밝혔다. ‘미국 당국자 6명’을 인터뷰한 <뉴욕타임스>는 전날 만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그랜드 바겐’을 요구했으나 김 위원장은 저항했다고 보도했다. 둘 다 맞다고 가정하면, 코언 청문회 전 김정은 위원장과 ‘친교만찬’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빅딜’을 시도하되 ‘노딜’이 아닌 다른 옵션 선택 가능성을 열어뒀으나, 청문회 직후에는 ‘빅딜 아니면 노딜’로 선택지를 좁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영변’은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폼페이오 장관도 ‘전임자들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멜리아 호텔
3,000km가 넘는 거리를 기차로 달려온 김정은 위원장은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28일 자정을 조금 넘겨 멜리아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한 리용호 외무상은 “우리가 요구한 것은 전면적인 제재 해제가 아니라”, “유엔 제재 결의 총 11건 가운데서 2016년~2017년 채택된 5건, 그 중에서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 대가로 북한은 ‘영변 핵시설 전체 폐기’를 내놨다고 확인했다. 최선희 부상은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서 이해하기 힘들어하시지 않았나, 이해가 잘 가지 않아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영변을 ‘껌값’ 취급하고 더 많은 것을 내놓지 않으면 북한이 요구하는 수준의 제재 완화가 어렵다는 미국의 태도에 실망감을 드러낸 것.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트럼프를 쉽게 생각했던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전문가 수준에서나 영변의 가치를 인정하지, 미국 정치권이나 트럼프 대통령에게 영변은 식상한 메뉴인데 값을 너무 크게 불렀다”고 했다. 그는 “2016년 이후 채택된 결의를 보면 북한이 말하는 민수용과 민생 부분이 사실상 제재의 전부”라고 말했다. 무기 관련 북한이 상당한 정도로 자급체제를 완성했고, 국교를 수립한 나라들 사이에도 군수품 거래는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외교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평가, 지난해 싱가포르 정상회담 완승 기억들이 북한 측의 오판을 불러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영변 만으로는 안된다’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카운터파트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미국의 기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청와대는 28일 실무 수준에서 도출된 ‘잠정 합의문’이 공동성명으로 채택될 것이라 보고 샴페인까지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정상회담이 완전한 실패라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서로의 의도와 입장을 정확히 알지 못하던 북한과 미국이 정상 수준에서 어떻게 하면 끝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맞춰봤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열리기만 한다면, 후속협상은 한결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1986년 10월 아이슬랜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이 충격적으로 결렬됐으나, 그 때의 심도 깊은 협의 결과를 바탕으로 1년 뒤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에 신속하게 서명한 사례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떠난 2일 오후 3시경 멜리아 호텔 앞에는 여전히 베트남 경찰 특공대가 지키고 있었다. 김 위원장과 수행원들이 묵었던 21층, 22층 접근은 금지됐다. 호텔 관계자는 북한 사람들이 남아서 뒷정리를 하고 있다고 귀뜸했다. 이들은 오후 6시께 고려항공편으로 하노이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바딘광장, 호치민 묘소
김정은 위원장은 1일 오후 하노이 시내 주석궁에서 환영의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베트남 공식 친선방문’을 시작했다. 전날까지 북한-베트남-미국 국기가 게양됐던 하노이 시내에는 이날부터 북한-베트남 국기만 나부꼈다.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겸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선대 수령들의 뜻을 받들어 피로써 맺어진 두 나라, 두 당 사이의 친선협조관계를 대를 이어 계승해나가는 것은 우리 당과 국가의 일관한 립장”이라며 “당적, 정부적 래왕을 활발히 벌리며 경제, 과학기술, 국방, 체육문화예술, 출판보도부문 등 모든 분야에서 협조와 교류를 정상화하고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쫑 주석은 “이번 방문은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관계 발전에서 리정표적인 사변으로 된다”고 평가했다. 특히 “제2차 조미수뇌상봉장소로 하노이를 선택한 것은 두 나라 사이의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회담에서 발현된 조선과 미국의 건설적이며 적극적인 립장”을 높이 평가했다. 2일 오전 바딘광장에 있는 호치민 묘소를 찾아 헌화한 뒤 전용열차가 대기 중인 동당역으로 떠났다. 귀국 중인 김정은 위원장의 선택에 향후 한반도 정세가 바뀔 수 있다. 최선희 부상의 말대로 미국식 계산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국과의 거래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번 경험을 토대로 다음의 성공을 기약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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