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부결됐던 이스라엘·하마스에 대한 휴전 촉구 결의안이 유엔총회에서 압도적인 찬성표로 채택됐다. 이번 전쟁에 관한 국제사회 여론이 미국과 이스라엘에 점차 등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엔 회원국들은 12일(현지시간) 미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긴급 총회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찬성 153표, 반대 10표, 기권 23표로 통과시켰다. 양측에 인도주의적 교전 중지를 촉구했던 지난 10월27일 유엔총회 결의안(찬성 120표, 반대 14표, 기권 45표)보다 찬성표가 크게 늘었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인도, 캐나다, 호주,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등 지난 10월 표결에서 기권했던 25개국 이상이 ‘휴전 지지’로 돌아섰다. AP통신은 이번 결의안이 큰 표차로 통과된 것을 두고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고립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이스라엘군이 무차별 폭격으로 전 세계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고 인정했다.
아랍 국가들이 제출한 결의안에는 즉각적인 휴전과 무조건적인 인질 석방, 가자지구 주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접근 보장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전반적으로 지난 10월 통과된 결의안보다 표현 수위가 높아졌다. 다만 하마스의 테러 행위에 관한 규탄은 결의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무차별 폭격으로 국제사회 대부분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2일 워싱턴D.C.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자금 모금 행사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 정부는 '두 국가 해법'을 원하지 않는다"며 "그는 변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현 정부는 그가 움직이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가자 주민을 대량 학살하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함으로써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왕따 위기'에 몰린 상황을 바이든 스스로 실토한 것이다. 전날 유대교 명절 '하누카'(빛의 축제) 리셉션에서도 하마스 제거 때까지 지속적 군사 지원을 약속하면서도 "전 세계 여론이 하룻밤 사이에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바이든 "이스라엘 무차별 폭격…국제 지지 잃어"
유엔 '미국 비토 패싱' 비상조치, 미국 위상 타격
초라해진 미국의 국제적 위상은 이날 오후 뉴욕 유엔본부에서 진행된 제10차 유엔 긴급특별총회(ESS)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보복 공격으로 인한 팔레스타인 주민의 인도주의 재앙을 멈추고자 아랍·이슬람권이 제안한 '즉각적인 인도주의 휴전' 요구 결의안이 미국과 이스라엘 등의 반대에도 80%에 가까운 절대적 다수로 통과됐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유엔 긴급특별총회는 미국의 '묻지 마 비토'에 대응하기 위해 아랍국을 대표한 이집트와 이슬람협력기구(OIC) 의장국인 모리타니가 '평화를 위한 단결'(Uniting for Peace)로 불리는 유엔총회 결의안 377A(V)를 이례적으로 발동하면서 소집된 것이어서 미국의 위상에 큰 타격을 가했다.
'민간인 보호와 법적, 인도적 의무 수호'란 제목의 이번 결의안은 △ 즉각적인 인도주의 휴전을 요구한다 △ 모든 당사자는 국제인도주의법을 포함한 국제법상의 의무, 특히 민간인 보호에 관한 의무를 준수할 것을 거듭 요구한다 △ 인도주의 접근 보장은 물론 모든 인질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 석방을 요구한다 등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담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오스트리아가 집요하게 주장했지만, 하마스 관련 내용을 담는데는 실패했다. 이번 결의안은 앞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52년 만에 '비상대권'인 유엔 헌장 99조를 발동해 안보리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아랍에미리트(UAE)가 주도하고 100개국이 서명한 휴전 촉구 결의안과 동일한 내용이었지만, 유일하게 미국이 비토(거부권 행사)해 좌절됐다.
미국 등 반대 10표…G7 프랑스·일본·캐나다 '이탈'
'70년 동맹' 한국, '앵글로색슨 동맹' 호주도 '이탈'
유엔총회 공식 발표에 따르면, 결의안 표결 결과는 193개 회원국이 참가해 찬성 153, 반대 10, 기권 23으로 나타났다. 79.2%에 이르는 절대 대수가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낳은 가자 전쟁의 즉각적 휴전을 '요구'(demand)한 것이다. 10월 27일 표결했던 유엔총회 결의안이 "일시 휴전"이란 최소한의 내용을 담았는데도, 찬성 120, 반대 14, 기권 45의 결과가 나왔던 것과는 완전히 흐름이 뒤바뀌었다. 한 달 보름 정도 사이에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보복 군사작전과 가자 인명 피해에 대한 국제 여론이 빠르게 악화된 것이다. 가자 보건부에 따르면, 11일 현재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에 따른 가자 주민 사망자는 11일 현재 1만8250명이고 부상자는 4만9645명이다. 유엔총회 결의안은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과는 달리 구속력은 없지만, 가자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 국제정치적 무게는 남다르다.
표결 결과를 살펴보면, 반대한 나라는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서구에서는 미국과 오스트리아 두 나라 뿐이다. 그 외에는 체코, 과테말라, 라이베리아, 미크로네시아, 나우루, 파우아 뉴기니, 파라과이 등이다. 기권한 23개국을 봐도 비슷하다. 서구에서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네 나라뿐이다. 동구에서는 헝가리,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불가리아, 그루지야, 슬로바키아가 기권했다. 나머지는 극우정권이 들어선 아르헨티나 등 일부 중남미와 아프리카, 태평양도서국들이다. 이른바 서방 선진 7개국(G7)에선 프랑스와 일본, 캐나다 3개국이 '미국 진영'에서 이탈해 찬성표를 던졌다. 앵글로색슨 동맹인 '오커스' 멤버인 호주도 찬성표로 돌아섰고, 미국과의 70년 동맹을 자랑하던 한국도 이번엔 기권에서 찬성으로 돌아섰다. 북한도 찬성표를 던졌다.
팔 대사 "워싱턴과 다른 이들에게 메시지가 될 것"
파키스탄 "야외 감옥 가두고 짐승 다루듯 살해"
'진퇴양난'에 빠진 미국의 곤혹스러운 처지는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 대사의 표결 전 발언에서도 확인됐다. 토머스-그린필드는 "당장은 어떤 휴전도 기껏해야 일시적이다. 최악의 경우엔 끈질긴 공격에 처할 이스라엘인은 물론 하마스에서 벗어나 스스로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기회를 가져 마땅한 팔레스타인인에게 위험하다"면서 즉각적 휴전 요구 결의안에 반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의안 중 "민간인 보호와 인질 석방 등 가자의 끔찍한 인도주의 상황을 긴급히 해결할 필요성 등에 대해서 미국은 지지한다"고 말했다. 길라드 에르단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도 표결 전 발언에서 "휴전은 하마스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며, 추가로 수많은 이스라엘인과 가자인에 대한 사형 선고"라면서 "결의안 찬성은 지하디스트 테러의 생존과 지속적인 가자 주민의 고통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니르 아크람 파키스탄 대사는 표결전 발언에서 "당신이 사람들의 자유와 존엄을 부정하고, 그들을 야외 감옥에 가두고 짐승 다루듯 살해한다면, 그들은 매우 분노하고 자신들이 당한 것을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AP 통신에 따르면, 리야드 만수르 팔레스타인 대사는 표결 전 취재진에게 "나는 이 결의안이 워싱턴 당국과 다른 이들에게 메지시가 될 것으로 본다"며 안보리도 총회 등 유엔의 요구는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만수르는 이어 "이스라엘은 그것을 준수해야 하며,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방어하고 보호했던 나라들 또한 이런 식으로 사태를 봐야 하며,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엔 "구속력 없지만 매우 중요… 세계 여론 반영"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안보리 결의안과는 달리 총회 결의안은 법적으로 구속력이 없지만, 유엔총회의 메시지는 "역시 아주 중요하며 세계의 여론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동안 이스라엘을 지지해온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3개국은 별도의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최근 일시 휴전으로 100여 명의 인질이 석방되고 인도주의적 지원이 증가한 점을 평가하면서 "우리는 이 같은 휴전이 재개되고, 지속 가능한 휴전을 위한 국제사회의 시급한 노력을 돕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유엔 긴급특별총회(ESS) 소집의 근거가 된 '유엔총회 결의안 377A(V)'는 1950년 11월 3일 한국전쟁 당시 종전 결의안에 대한 소련의 '묻지 마 비토'에 대응하고 국제사회를 반소 전선에 묶어두기 위한 목적에서 미국이 주도해 만들었지만, 이번엔 미국에게 부메랑이 됐다. 유엔총회 결의안 377A(V)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유엔총회에 "필요한 경우 무력 사용"을 포함한 집단적 조치를 회원국에 권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점이다. 그동안 발동된 대표적 사례는 콩고 위기(1960년)와 인도-파키스탄 분쟁(1971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1980년) 등으로 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