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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타계…향년 10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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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11-30 12:50 조회95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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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타계…향년 100세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냉전 시기 ‘미국 외교’ 주도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도

최근까지 중동 문제 등 조언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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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기 미국의 외교를 주도하며 대통령에 필적하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타계했다. 향년 100세.

키신저 전 장관은 이날 미국 코네티컷주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키신저 어소시에츠가 이날 밝혔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고인은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학자에서 외교정책 설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을 신봉한 그는 닉슨 대통령과 뒤이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며 냉전기 미국의 대외정책은 물론 세계 질서의 밑그림을 그렸다.

특히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성사시켜 미·중 수교와 중국 개혁개방으로 이어지는 대전환의 초석을 놓았다. 소련과의 군축 합의 등을 통해 미·소 데탕트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베트남전 종전과 중동 4차 전쟁(욤키푸르) 관련 협상 등 이 시기 굵직한 국제정치 사건에도 깊이 관여했다.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고인은 그러나 미국의 남미 군부 정권 지지, 캄보디아 비밀 폭격 등에 연루된 사실 때문에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외교정책에서 도덕이나 가치를 배격하고 현실주의 이론에 기반한 ‘리얼폴리티크’를 전면에 내세운 ‘키신저 외교’에는 명암이 있다는 지적도 계속되고 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고인은 왕성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지속하며 ‘현대 외교의 거장’으로 불려왔다. 최근까지도 100세의 고령이 무색하게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문제는 물론 인공지능(AI) 기술의 국제정치학적 함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글을 남겼다.

1923년 독일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고인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절정에 이른 193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으로 학사와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올해 국내에 완역된 <헨리 키신저의 외교>를 비롯해 <세계 질서> <중국 이야기> <리더십> <선택의 필요성> <핵무기와 외교정책> 등이 있다.

100살 고종명 키신저, ‘외교 달인’에서 ‘전범’까지 극과 극

  •  한승동 에디터
  •  
  •  승인 2023.11.30 19:45
 

베트남전 종전 공로로 노벨평화상 받은 해

칠레 사회주의자 아옌데 정권전복 쿠데타 개입

약소국 안중에도 없는 대국 세력균형외교

NSC 중심 ‘닉슨 데탕트 외교’ 주역으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산아제한도 미국 정책?

국제컨설팅 회사 '키신저 어소시에이츠'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코네티컷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2017년 10월 10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나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모습. [자료사진] 2023.11.30. 로이터 연합뉴스
국제컨설팅 회사 '키신저 어소시에이츠'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코네티컷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2017년 10월 10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나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모습. [자료사진] 2023.11.30. 로이터 연합뉴스

리처드 닉슨 정권과 제럴드 포드 정권 때 대통령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 1970년대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헨리 키신저 전 장관이 29일 코네티컷 주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

‘외교 달인’에서 '전쟁범죄자'까지 다양한 평가

동서냉전 시기 적대국인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을 성사시키고, 소련을 고립시킨 뒤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켰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안보를 보장해 주는 대신 석유 대금 결제를 미국 달러로만 하게 한 ‘페트로 달러 협정’을 체결하는 등 미국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현실주의 외교정책을 화려하게 구사한 키신저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외교의 귀재’, ‘달인’에서부터 평화(데탕트)주의자, 권력투쟁에 능한 비밀주의 책략가, 반인도적인 전쟁범죄자에 이르기까지.

 

1973년 2월 중국을 방문한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 특사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중앙)를 만나고 있다. 1973.2.17. 신화 AFP 연합뉴스
1973년 2월 중국을 방문한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 특사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중앙)를 만나고 있다. 1973.2.17. 신화 AFP 연합뉴스

노벨평화상 받은 해 아옌데 정권전복 쿠데타 개입

그는 베트남 전쟁을 끝낸 공로(실제로는 끝내지도 못했다. 전쟁은 2년 뒤에 북베트남의 무력통일로 종결됐다)로 1973년에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했지만, 그해 9월 11일 남미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에 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 겸 국무장관으로 중앙정보국(CIA) 등을 동원해 깊숙이 개입했다. 민주적 선거절차를 거쳐 칠레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첫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 정권을 당시 미국은 막대한 자금과 정보기관, 밀턴 프리드먼의 시카고학파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른바 ‘시카고 보이즈’)까지 동원해 결국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같은 시기에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호치민 루트’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옆나라 캄보디아에 미군이 2차대전 때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보다 9만 톤이 더 많은 25만 톤의 폭탄을 투하해 무고한 주민들의 터전을 초토화하면서 10만 명 이상을 죽이고 200여만 명을 난민으로 만든 대규모 전쟁범죄행위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향년 100세로 29일(현지시간) 코네티컷주(州)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사진은 1998년 1월 22일 태국 수도 방콕에서 열린 미국상공회의소 주최 오찬에서 연설하는 모습. 2023.11.30. 로이터 연합뉴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향년 100세로 29일(현지시간) 코네티컷주(州)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사진은 1998년 1월 22일 태국 수도 방콕에서 열린 미국상공회의소 주최 오찬에서 연설하는 모습. 2023.11.30. 로이터 연합뉴스

사토 노벨평화상 뒤에 핵무기 반입 밀약

1969년 11월에 닉슨 대통령 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는 당시 일본 사토 에이사쿠 정권과 오키나와 ‘반환’(1972년 미국으로부터 시정권 반환) 협상 때 “반환 뒤에도 긴급사태 때 사전통고 뒤에 오키나와에 핵무기 반입 및 통과를 인정받을 권리”를 요구했다. 1974년 사토 에이사쿠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겨 주었던 일본의 ‘비핵 3원칙’ 선언 뒤에는 이처럼 수십년 뒤에야 그 실체가 폭로된 핵무기 반입 거래와 밀약이 있었다.

 

1975년 4월 29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워싱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베트남 파병 미군의 철수를 완료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1975.4.29. AFP 연합뉴스
1975년 4월 29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워싱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베트남 파병 미군의 철수를 완료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1975.4.29. AFP 연합뉴스

약소국 안중에도 없는 대국 세력균형외교

2017년 5월에 막강한 외교평론가요 전략가로 통했던 키신저가 당시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국무장관 렉스 틸러슨에게 ‘한반도(북한) 문제’ 해법으로 꺼내 놓았던 제안은 약소국은 안중에도 없는 대국주의 외교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때 북한정권의 붕괴와 주한 미군 철수를 맞교환하면서 중국의 한반도 지분을 보장하는 미중 간의 ‘사전합의’를 제안했다. 중국의 북한 분할지배 구도안이 그런 바탕 위에서 그려지지 않았을까.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의 문서들을 통해 키신저의 ‘귀신같은’ 능란한 외교 업적으로 평가돼 온 많은 구상들이 실은 많은 부분 그의 ‘주군’이었던 리처드 닉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고, 키신저는 그것을 전달하고 실무처리한 메신저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그의 업적이 과대평가됐다면, 그것은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끊임없이 써낸 회고록이나 평론, 강연들을 통해 그의 역할이 객관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실제 이상으로 과대포장돼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그가 일세를 풍미하며 세상을 바꾼 대담한 책략가(모략가)요 전략가였다는 항간의 통설을 뒤엎을 만한 분명한 자료들이 아직은 충분히 정리돼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대로 된 평가는 이후의 연구와 평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1975년 7월 31일 유럽 35개국 정상들이 모인 헬싱키 회의에 참석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미국 대사관에서 레오니드 브레진스키 소련공산당 서기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맨 오른쪽)과 담소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75.7.31. AFP 연합뉴스
1975년 7월 31일 유럽 35개국 정상들이 모인 헬싱키 회의에 참석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미국 대사관에서 레오니드 브레진스키 소련공산당 서기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맨 오른쪽)과 담소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75.7.31. AFP 연합뉴스

독일 바이에른 주 유대계 집안 출신

키신저는 1923년 독일 바이에른 주 퓌르트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하인츠 알프레드 키싱거인데, 키싱거라는 성(姓)은 바이에른 주의 온천 휴양지 바트 키싱겐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버지 루이스 키싱거는 여자고교 역사 지리 교사였고 어머니 파울라는 부유한 목축업자의 딸이었다.(이하 위키피디아 내용을 참고해 재구성)

그가 열 살 때인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그의 가족은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피해 1938년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2차 대전 중인 1943년에 귀화했다. 조지 워싱턴 고교를 3년 반 다닌 뒤 나머지 2년간은 야간반을 다니면서 낮에는 면도용 브러시 제조공장에서 일했다. 뉴욕시립대학 시티칼리지 경영행정관리학부에 파트타임 학생으로 다녔고, 회계학에서 특히 좋은 성적을 받았다.

육군 첩보부대 하사관, OSS 배속

1943년 대학 수업을 중단하고 미국 육군에 입대해 독일어 능력을 살려 유럽 전선의 첩보부대 하사관으로 종군하다 앨런 덜레스의 휘하에서 OSS(전략사무국. CIA의 전신) 요원이 됐다. 전쟁 뒤인 1946년 제대한 뒤 하버드대에 입학해 정치학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19세기 유럽 외교사를 공부했다. 1954년에 빈체제(나폴레옹 몰락 뒤, 1815년 빈회의에서 프랑스혁명 이전 유럽의 세력균형 복원을 자향하며 합의한 체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학위논문에서 그는 나폴레옹 전쟁 뒤 100년간 유럽에서 큰 전쟁이 없었던 국제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살폈는데, 그 요인 가운데 하나로 패배한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징벌보다는 세력균형 회복을 우선하는 쪽으로 처리한 것에 주목했다.

하버드대 박사과정 수료 뒤 같은 대학 정치학부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미국외교협회(CFR)에 참여하면서 당대의 외교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제안을 했다. 1960년대에 잠시 케네디 대통령 외교정책입안 고문을 거쳐, 대학 동료였던 베트남 주재 미국대사 아들과의 인연으로 미국대사 고문으로 1965~66년에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을 3차례 방문했다. 그때 키신저가 국무부에 낸 보고서가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베트남 파견군 사령관을 경질하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됐다.

 

1971년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이 백악관 오벌 오피스 창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1971.2.10. 로이터 연합뉴스
1971년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이 백악관 오벌 오피스 창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1971.2.10. 로이터 연합뉴스

록펠러 외교정책 고문에서 ‘닉슨 외교’ 주역으로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자 지명 예비선거에 입후보한 넬슨 록펠러의 외교정책 고문이 됐고, 1964년과 1968년 대선 때도 예비선거에 출마한 넬슨을 지원하면서 맺은 깊은 인연으로, 데이비드 록펠러가 중국에 은행을 개설할 때 조언을 해 주었다. 1968년 대선에서 록펠러가 패배한 뒤 키신저는 당선자 리처드 닉슨의 직접적인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 1969년에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으로 정권 핵심부에 들어 갔다. 그리고 ‘닉슨 외교’의 주역을 맡게 된다.

국가안보회의(NSC) 중심으로 체제 개편

닉슨 이전 존슨 정권 때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은 국무장관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고 국가안보 보좌관은 조정역할을 하는데 그쳤으나, 닉슨과 키신저는 그때까지 유명무실했던 국가안보회의(NSC)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거기에 앤서니 레이크, 로렌스 이글버거, 알렉산더 헤이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등 유능한 일꾼들을 끌어들였다. 국무부와의 ‘권력투쟁’을 지휘한 키신저는 국무장관을 주요 외교정책에 배제하고 대사들과 CIA 지국장들까지 마음대로 부리면서 NSC가 외교정책의 결정권을 독점하는 구조로 체제를 재편했다.

그가 1971년에 닉슨의 ‘밀사’로 중국을 극비리에 방문할 때도 이 구조를 활용했다. 대중국 접근을 통해 베트남전쟁 종결을 위한 북베트남과의 비밀 정전교섭을 벌이고, 소련과 제1차 전략무기제한협정(SJALT 1)을 체결하는 데탕트 외교도 그 체제를 통해 펼칠 수 있었다.

 

시진핑 중국주석이 2015년 9월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열린 미국과 중국 기업 CEO들 모임 만찬 리셉션에서 연설하기 위해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소개를 받고 연단에 오르고 있다.2015.9.22. 로이터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주석이 2015년 9월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열린 미국과 중국 기업 CEO들 모임 만찬 리셉션에서 연설하기 위해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소개를 받고 연단에 오르고 있다.2015.9.22. 로이터 연합뉴스

먼저 중국과 수교한 일본에 “배신자”라며 분개

1972년 2월 닉슨의 전격적인 중국방문에 충격을 받은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그해 9월 베이징을 찾아가 중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국교를 회복했다. 일본의 이런 재빠른 처신에 당시 키신저는 “배신자”라며 분개했다. 미국이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한 것은 그로부터 7년이 더 지난 1979년이다. 다나카 총리가 ‘록히드 뇌물 수수 사건’으로 총리직에서 쫓겨나고 1976년에 구속까지 된 것이 그때 약삭빠르게 움직이다 미국 눈밖에 난 것 때문이라는 풍설이 있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 뒤 아랍의 맹주였던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정권을 소련의 영향력에서 떼어내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하면서 미국쪽으로 끌어들이고 사우디와 ‘페트로 달러 체제’를 결성한 것도 그때의 일이다.

1973년 대통령 안보보좌관이자 국무장관이 된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에 퇴임한 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취임한 뒤 안보보좌관직을 내려 놓았으나 포드 대통령이 퇴임한 1977년 1월까지 국무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미국 외교정책 전반을 휘어잡았다.

 

1973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헨리 키신저 미국 대통령 국가안보 보좌관과 레 둑토 북베트남 정치국원이 평화협상 세션 뒤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게 된다. 1973. 6. 13. AP 연합뉴스 
1973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헨리 키신저 미국 대통령 국가안보 보좌관과 레 둑토 북베트남 정치국원이 평화협상 세션 뒤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게 된다. 1973. 6. 13. AP 연합뉴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도 미국 정책?

그 시기에 작성된 국가안보과제 각서(‘키신저 메모랜덤’)에는 개도국의 인구폭발로 미국 영향 아래에 있는 나라들의 정권기반이 불안정해지면 미국 안보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개도국들에 인구억제를 위한 의학적 정치적인 개발원조를 실시하라는 제안이 나온다. 1970년대까지 요란했던 군사정권 시절의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등의 ‘산아제한’ 구호들조차 이런 미국 대외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키신저는 국무장관 재임(1973~1977) 중에 시오니스트 지도자들 다수를 정부기관 곳곳에 취직시키고, ADL(유대인 명예훼손방지연맹) 지지자들을 개신교 단체들에 심어, 이들 조직이 영구 면세 조치를 받도록 국세청(IRS) 청장을 움직여 국세청 규칙 자체를 바꿨다고 한다.

최근 하마스의 기습공격 이후 ‘이-팔 분쟁’에서도 드러났듯이 미국 내의 막강한 이스라엘 지지 여론 형성의 메커니즘 정착에 키신저도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1975년 12월 베이징의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거처를 방문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중앙)과 그의 딸 수전이 마오와 키신저가 반갑게 악수하며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1975.11.2. 로이터 연합뉴스
1975년 12월 베이징의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거처를 방문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중앙)과 그의 딸 수전이 마오와 키신저가 반갑게 악수하며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1975.11.2. 로이터 연합뉴스

컬럼비아대 교수 취임, 학생들 반대로 무산

1977년 포드 대통령 퇴임과 함께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키신저는 컬럼비아대로부터 교수 취임 권유를 받았으나 학생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조지타운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초빙돼 회고록을 잇따라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키신저 비록>은 1980년에 전미국도서상까지 받았다.

1982년에 컨설팅 회사 ‘키신저 어소시에이션’을 설립해 사장에 취임한 뒤 조지 부시 정권 국무장관이 된 로렌스 이글버거, 국가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버락 오바마 정권 재무장관이 된 티머시 가이트너 등을 끌어들였다.

이후 흠모자들로부터 ‘현대외교의 살아 있는 사전적 존재’라는 칭송을 받으며 많은 책들을 저술하고 각국(올해 7월에 중국을 방문해 당시 리샹푸 국방부장을 만난 뒤 시진핑 주석과도 회담했다)에서 강연활동을 하면서 생애 마지막까지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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