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계기 한·중 회담 불발
북·러 사이 중국 역할만 강조
대화로 이끌 의제 제시 못해
윤석열 정부의 외교 기조는 한·미·일 초밀착 공조를 중심축으로 두고 있다. 문제는 ‘가치 외교’에 매몰된 채 대중국 외교에 문제를 드러내는 등 허점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역시 한·미·일 협력 강화를 중시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며 실속을 챙기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15일부터 2박4일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정상 외교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일 공조는 재확인했다. 하지만 한·중 정상회담은 불발됐다. 대통령실은 “바쁜 일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국이 APEC 기간에 미국, 일본과 정상회담을 하고, 브루나이·피지·페루·멕시코 정상과도 만난 것으로 볼 때 한국만 소외된 모양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문제로 관계가 악화일로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는 별도로 1시간가량 회담을 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중·일이 호혜적인 전략적 관계를 재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기시다 총리는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분쟁은 대화로 해결하기로 합의했다”며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미·중 정상이 만나 우호적 분위기를 연출한 뒤 하루 만에 일본도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위험 관리에 나선 것이다.
한·중 정상회담이 불발된 이유를 둘러싸고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외교 소식통은 20일 “한국이 중국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매력적 의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양국 소통이 막힌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한국은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북·러 간 무기 거래 및 군사기술 협력에 관해 중국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내고 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보도된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중국, 러시아, 북한은 각자가 처한 상황과 대외 여건이 다르며 이에 따른 이해관계도 다르다”면서 “동아시아와 국제사회의 자유, 평화, 번영을 증진하는 데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자국 이익을 위해서는 동맹과도 경제적 실리를 다투는데 윤 대통령은 ‘가치 외교’ 속에서 중국, 러시아와는 멀어지고 있다. 한국이 북·중·러와 멀어지는 동안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는 물론 북·일 접촉에도 적극적이다.
국립외교원장을 지낸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미국은 중국이 가장 예민한 대만 문제에 발을 살짝 뺀 상황인데 윤 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계속 대만 문제로 자극하고 있다”며 “한국이 중국에 절실한 반도체 공급망 등에서 미국만 절대적으로 따라가다 보니 중국으로서는 한국을 만날 가치가 없어졌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