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계기 한·중 정상회담은 ‘불발’
시진핑, 미·일 만나고 한국만 ‘패싱’
중·일 정상은 “공동 이익에 주목”
한·미·일 공조 속에도 실리 챙기는 일본
윤석열 정부의 외교 기조는 한·미·일 초밀착 공조를 중심축으로 두고 있다. 문제는 ‘가치 외교’에 매몰된 채 대중국 외교에 문제를 드러내는 등 허점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역시 한·미·일 협력 강화을 중시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실속을 챙기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영국 국빈방문을 앞둔 20일 보도된 텔레그래프지와의 인터뷰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은 북핵 위협과 대만해협·남중국해 문제 등 다양한 긴장 요소를 안고 있다”며 “한국 정부는 대만해협의 평화·안정과 남중국해에서의 규칙에 기반한 해양질서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고 말했다. 중국이 ‘핵심 이익’으로 꼽는 대만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중국은 윤 대통령의 대만 발언에 즉각 날을 세웠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지 않든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해서는 안 된다”면서 “대만 문제는 전적으로 중국의 내정”이라고 맞받았다.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해온 대만 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한·중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중, 중·일이 정상회담을 하고 우호적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성사에 공을 들였던 한·중 정상회담은 불발됐다. 대통령실은 “바쁜 일정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중국이 APEC 기간미·일 뿐 아니라 브루나이·피지·페루·멕시코 정상과 연이어 만난 것으로 볼 때 한국만 소외된 모양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과 시 주석이 회의 전 3분 간 덕담을 나눴다고 적극적으로 알렸지만, 중국 인민일보 등 주요 매체들은 관련 보도를 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한·미·일 공조에만 집중하는 동안, 일본은 3국 협력 이득은 취하고 중국·중동과의 관계도 관리하며 실리를 챙기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APEC 기간인 지난 16일(현지시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별도로 1시간가량 회담을 가졌다.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 문제로 중·일관계가 악화일로에 있는 상황에서 이뤄진 만남이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중·일이 호혜적인 전략적 관계를 재확인해야 한다”며 “양국의 공급망이 깊이 연결돼 있기 때문에 분리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기시다 총리는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분쟁은 대화로 해결하기로 합의했다”며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미·중 정상이 만나 우호적 분위기를 연출한 뒤 하루 만에 일본도 최대 무역 상대국인 대중 관계의 위험 관리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 이번 중·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경제계, 학계 등 전방위적으로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중 정상회담이 불발된 배경으로 한국의 외교정책이 미국에 완전히 맞춰지면서 외교적 매력이나 협상력이 떨어진 것이 꼽힌다.
한 외교소식통은 20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베팅’ 발언 이후 대사관 등 한·중 간 주요 소통 채널이 사실상 제한을 받고 있는 데다 한국이 중국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매력적 의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양국 소통이 막힌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한국은 고도화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북·러 간 무기거래와 군사기술 협력에 대해 중국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국이 대중 외교를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는 데 대해 경계감이 크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시 주석의 방한 카드를 띄운 것이 대표적이다. 한 총리는 지난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을 계기로 만난 시 주석이 먼저 방한 검토를 꺼냈다고 밝혔지만 중국 측에서는 관련한 공식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일본은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큰 틀을 짜고 미국을 끌어들이면서 주도적 외교를 펴고 있으며, 한·미·일 안보협력의 틀에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는 명분까지 쌓고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동맹과도 경제적 실리를 다투는 ‘외교 전쟁’이 벌어지는데 윤 대통령은 ‘가치 외교’ 속에 갇혀 중국과 ‘거리두기’ 중이다. 한국이 중국을 비롯해 러시아, 북한 등과 멀어지는 동안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는 물론 북·일 접촉에도 적극적이다.
전 국립외교원 원장을 지낸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통화에서 “윤석열 정부의 외교 기조는 한·미·일 간 확실한 공조를 해야 중국과 러시아도 한국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기조가 깔려있다”면서 “미국은 중국이 가장 예민한 대만 문제에 대해 ‘미국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며 발을 살짝 빼는 상황인데 윤석열 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계속 대만 문제로 자극하고 있으며 확실한 증거도 없는 북한 포탄의 러시아 지원까지 언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중국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경제적 시각에서 접근하는데 한국이 중국이 절실한 반도체 공급망 등에서 미국만 절대적으로 따라가다 보니 중국으로서는 한국을 만날 가치가 없어졌다”면서 “외교적 지렛대를 스스로 다 던진 셈”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과의 관계뿐 아니라 아니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일 무장정파 하마스 간의 무력 충돌 같은 다른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한·일의 외교적 접근법은 차이를 보인다.
한국 정부는 미국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지난 9일 토니 블링컨 장관과 서울서 만난 박진 외교부 장관은 한·미 외교장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에 가해진 무차별적 공격을 규탄한다”고 하마스에 화살을 돌렸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편파적인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고, 유럽에서도 이스라엘 책임론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 행정부 내부에서조차 이스라엘 지원에만 집중하는 바이든 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데 한국은 미국과만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지향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외교와도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반면 중동산 원유 의존율이 90%를 넘는 일본은 원유 수입 확보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중동 문제를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이스라엘-하마스 간의 무력 충돌에 대해서도 시종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