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견제 최우선 삼던 바이든 정부, 대중동 외교 ‘실패’ 평가
극우 연정·무리한 정착촌 확장 등 갈등 전조에도 대비 못해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으로 미국의 대중동 외교가 수렁에 빠졌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을 방문해 수습에 나섰지만, 미국이 중동에서 실패한 원인에는 외교적 무관심·아랍권의 박탈감 등이 쌓여 있어 타개책이 난망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사이 중동에서는 미국을 향한 분노가 가자지구 알아흘리 아랍 병원 폭발 참사를 계기로 터져나오고 있다.
17일 가디언은 미국의 중동 정책이 실패로 귀결된 배경에는 ‘외교적 무관심’이 있다고 짚었다. 우선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견제를 최우선으로 삼으며 중동을 우선순위에서 제쳐 둔 점이 뼈아프다. 3주 전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중동은 이전 20년 동안보다 더 조용해졌다”고 언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폐쇄한 예루살렘 주재 미 영사관과 워싱턴 주재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대사관이 문조차 열지 못한 상태였다.
지난해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아브라함 협정’에 서명한 아랍 4개국(UAE·바레인·모로코·수단)과 외교장관 회담을 할 때도 팔레스타인은 초청받지 못했다. 근래 들어 바이든 행정부의 관심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화해를 성사시켜 ‘중동 업적’을 남기는 데 집중됐다. 미 중동연구소 브라이언 카툴리스 연구원은 “바이든 행정부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중동 문제를 글로벌 의제에 도움이 된다고 보지 않았으며, 정치적 자본 측면에서도 시간 낭비로 간주했다”고 분석했다.
주요 외교 파트너들 또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럽연합(EU)은 중동 문제에서 무력해졌고, 영국은 브렉시트 등으로 영향력이 약해졌다. 이스라엘은 사상 가장 오른쪽으로 치우친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가 들어섰고,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은 존재감이 미미하다. 이란은 하마스를 비롯한 수많은 대리 세력을 키워나갔다.
중동 전문가들은 올해 중반부터 이스라엘 극우 연정의 위험성, 무리한 정착촌 확장, 양측 충돌 증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권위 부재 등을 근거로 폭발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여러 차례 보냈지만, 미국은 고조되는 갈등의 전조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결과 미국은 중동에서 자국을 향한 분노를 마주하게 됐다. 많은 아랍인이 이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미국이 지원하는 팔레스타인인 학살’로 보기 시작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지상전을 준비하는 동안 미국이 이스라엘을 강력히 지원하면서 이러한 분노를 촉발했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과 이스라엘 고위급 인사들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인간 짐승’ ‘순수 악’ 등 수위 높은 표현을 쓴 것도 기름을 끼얹었다.
뿌리 깊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미국이 늘 이스라엘 편에 서 있다는 점 또한 중동의 박탈감을 유발한다. 이 지점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가자지구를 포위 공격한 이스라엘을 다른 잣대로 취급한다는 비판에 처한다. NYT는 “미국은 이스라엘을 테러 공격의 희생자처럼 묘사했지만, 중동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지를 기반으로 팔레스타인을 탄압해 온 점령자일 뿐”이라고 전했다.
17일 발생한 가자지구 알아흘리 아랍 병원 폭발 참사는 미국의 중동 외교에 또 다른 악재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우디는 성명을 내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에 대한 “이중잣대를 버려야 한다”고 비판했다. 서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했으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포위 공격 역시 비판해야 한다는 취지다. 미 중동연구소 하프사 할라와 연구원은 “미국은 중동에서 도덕적 입지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계기로 국제법의 유명무실함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팔레스타인 라말라에서 활동하는 인권운동가 웨삼 아마드는 “국제법의 본질과 목적을 오래도록 가리고 있던 가면이 드디어 벗겨졌다. 우크라이나에 적극적으로 적용됐던 국제법이 팔레스타인에선 얼마나 축소됐는지를 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