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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청산리대첩 영웅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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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8-13 09:19 조회1,8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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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청산리대첩 영웅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  김치관 기자
  •  
  •  승인 2021.08.12 18:05
 

8.17 한-카자스탄 정상회담...코로나 이후 첫 정상 방한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카자흐스탄 정상회담 계기에 봉환된다. [사진출처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카자흐스탄 정상회담 계기에 봉환된다. [사진출처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으로, 8월 16, 17일 국빈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는 계기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된다.

청와대 박경미 대변인은 12일 오후 브리핑에서 “이번 토카예프 대통령 방한과 연계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되어 있는 여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며 “15일 저녁 최고의 예우 속에 대한민국에 도착하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 기간을 거친 후,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봉오골 반일 전적지’. '반일명장 홍범도 사령'으로 명명돼 있다. 1993년 “중공 도문시 위통전부, 도문시 박물관, 도문시 수도공사”에서 세운 것으로 새겨져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봉오골 반일 전적지’. '반일명장 홍범도 사령'으로 명명돼 있다. 1993년 “중공 도문시 위통전부, 도문시 박물관, 도문시 수도공사”에서 세운 것으로 새겨져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홍범도 장군은 대한독립군을 지휘해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영웅적인 인물이지만 연해주에 거주 중이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돼 그 이듬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정착한 후 1943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최로 열린 극동피압박인민대회 참석차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단독 면담하고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권총을 선물받기도 했지만 카자흐스탄 강제 이주로 불우하게 생을 마감해 이국땅에 잠들었다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직후 일본군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한 때로부터 100년 만이다. 

카자흐스탄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4월 21일 누루술탄 국제공항에서 현지에 안장되어 있던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 봉환식을 주관했다. 유해는 태극기에 싸여 대통령 전용기 편으로 서울공항으로 향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카자흐스탄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4월 21일 누루술탄 국제공항에서 현지에 안장되어 있던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 봉환식을 주관했다. 유해는 태극기에 싸여 대통령 전용기 편으로 서울공항으로 향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청와대 관계자는 12일 기자들과 만나 “이번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2019년 4월, 한국-카자흐스탄 정상회담 시 문재인 대통령이 토카예프 대통령에게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이후 2020년 3.1절에 유해 봉환이 결정되었음을 발표한 후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기해 홍범도 장군을 모시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안타깝게도 코로나 상황으로 봉환이 연기되어오다가 이번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전했다.

박경미 대변인은 “문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8월 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한다”며 “특사단에는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과 국민대표 자격의 조진웅 배우가 참여한다”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8월 14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해 카자흐스탄으로 파견된 특사단은 고려인협회, 카자흐스탄 정부 관계자와 장군의 유해를 확인하고, 입관, 운구, 추모를 함께할 계획이며, 15일 오전 유해와 함께 카자흐스탄을 출발하여 15일 저녁 대한민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 기간을 거친 후,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나 유해 봉환시 북측과의 협의도 거론돼 왔지만 최근 남북관계가 원활치 않아 일단 남쪽으로 봉환해 대전현충원에 모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홍범도 장군은 민족정기 선양, 국민 애국심 고취, 고려인의 민족정체성 함양, 한국과 카자흐스탄 간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적을 새로이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게 되어 이번 유해 봉환에 더욱 의미를 더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토카예프 대통령과 8월 17일 오전 정상회담을 갖고, 만찬을 주최할 예정이다. 한-카차흐스탄 정상회담은 2019년 4월 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방문 이후 두 번째이며,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은 2016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이후 5년 만이다.

박경미 대변인은 “이번 방한은 내년 한국과 카자흐스탄 수교 30주년을 앞두고 양국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한층 더 공고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문 대통령은 첫 번째 정상회담 이후 추진되어 온 후속 협력 사업의 성과를 점검하고, 교통·인프라·건설, ICT, 보건,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 실질 협력을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내년 수교 30주년을 맞아 양국 간 문화·인적 교류를 증진하는 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지역 및 국제무대 협력 강화 방안도 모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토카예프 대통령은 2019년 취임하신 후 처음으로 방한하는 것”이라며 “우리로서도 코로나19 이후 최초로 맞이하는 외국 정상의 방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고 강조했다.

1991년 소련 해체시 독립한 카자흐스탄은 한반도의 12배, 세계 9위의 넓은 영토를 가진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주요 국가로서 광물 부국이고,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고, 투자 대상국이다.

특히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서 9만 6천여 명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에 정착했고 독립지사들도 많이 포함돼 있었다. 2019년 문 대통령 국빈방문시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한 바 있다.


100년 만에 고국 돌아온 홍범도 장군

양낙규 입력 2021.08.12. 15:42 수정 2021.08.12. 16:22

[아시아경제 양낙규 군사전문기자]100년만에 고국 땅을 밟는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독립전쟁의 전설로 불린다. 일본군조차 그를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두려움에 존재였다.

1868년 8월27일 평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홍 장군은 구한말 의병투쟁에 몸을 던졌다. 사격실력이 좋았던 그는 1907년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에 타격을 줬다.

'홍범도 일지'에 따르면 일제는 당시 홍 장군을 체포하려고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삼았다가 그가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가족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홍 장군이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전후다. 당시 그는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함경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이 바로 3·1운동 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의 최초 전투다.

홍 장군의 승리는 이어졌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독립운동사에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었다. 1920년 6월 일본군 19사단의 추격대대를 궤멸시킨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도 200여 명에 달하지만,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도 가세했다. 같은 해 10월 보복전에 나선 일본군 대부대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합세해 치룬 전투다. 이 전투는 일제강점기 최대 대첩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일본군이 토벌작전에 나서면서 홍 장군은 연해주로 몸을 옮겨야만 했다. 홍 장군은 이후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때 이르쿠츠크파 편에 섰다가 소련군의 일원이 됐다. 당시 홍 장군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김규식·여운형·조봉암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레닌을 접견했다. 레닌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 한 자루, 금화 100루블, '조선군 대장'이라고 쓴 레닌 친필 증명서 등을 홍장군에게 건넸다.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1937년 11월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밀려났다. 이후 1943년 10월2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홍 장군은 항일 무장투쟁에서 첫손에 꼽혔지만 소외되어 왔다. 우리 정부는 1962년에 와서야 홍범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나 그 뒤로도 한동안 외면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소련군의 일원으로 싸우고 레닌의 선물까지 받은 인물이 높이 평가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김일성과 비교될 수 있다는 이유로 외면해왔다.

하지만 북한이 1993∼1994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문제를 제기하며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우리 정부와 함께 카자흐스탄 정부 측과 유해 봉환과 관련한 논의를 시작했다.

탄력을 받은 것은 지난 2019년 4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다. 당시 문 대통령은 중앙아시아 순방 계획을 보고받으며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카자흐스탄 측에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고, 같은 해 12월 카자흐스탄 측에서 2020년 예정됐던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유해 봉환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처음으로 표명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홍 장군의 유해 봉환 계획을 처음 공표했다.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연기됐던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면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고서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을 피해 1921년 연해주로 이주한 이후 정확히 100년 만이다.

양낙규 군사전문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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