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ECB 이사회 회의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ECB 이사회 회의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

     


"새로운 국제 지도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일부 국가는 중국 위안화나 인도 루피와 같은 대체 통화를 찾고 있거나 자체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더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17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 행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은 미국 달러나 유로화의 지배력 상실이 임박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부연했지만, 유럽 경제계를 대표하는 라가르드 총재의 말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평가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흔들린다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이제는 패권 경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중국은 일부 국가의 국제 거래 수단을 위안화로 바꾸고 있다. 미국 제재에 위협받는 국가들도 이에 호응하고 있다.
사우디·러시아 이어 브라질도 "위안화로 결제하자"
라가르드 총재의 발언은 최근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등 정상들의 '위안화 지지' 이후에 나왔다.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13일 상하이 신개발은행 본부를 찾아 "나는 매일 밤 왜 모든 나라가 그들의 무역 결제를 달러에 기초해야 하는지 자문한다"며 "달러가 세계무역을 지배하는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브라질과 중국은 14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위안화와 브라질 알화를 이용한 거래를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앞서 양국은 지난달 브라질 업체들이 달러 결제망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대신 중국에서 만든 ‘국경간 위안화 지급 시스템(CIPS)’을 이용하는 데도 뜻을 모았다.
지난 1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중국을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국빈 환영식에 참석하고 있다. AFP

 

지난 1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중국을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국빈 환영식에 참석하고 있다. AFP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위안화 중심 체제에 힘을 싣고 있다. 바실리 네벤지아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지난 3일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을 맡으며 “러시아 제재로 달러 기반 국제 지불 시스템의 신뢰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며 “이제 세계 경제를 ‘탈달러화’할 때”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 달러 및 기타 서구 통화에 대한 의존도는 비단 러시아의 문제가 아니라 EU(유럽연합), 미국 및 일부 다른 국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도입한 이후 일어난 일을 고려할 때 다른 많은 국가에도 닥칠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각국이 언제든지 미국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를 비롯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간의 거래에서 위안화 사용을 지지한다고 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지난해 12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알 야마마 궁을 방문해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안내를 받고 있다. AP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지난해 12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알 야마마 궁을 방문해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안내를 받고 있다. AP

 

'페트로 달러' 체제의 중심 국가였던 사우디도 탈달러를 선언했다. 페트로 달러 체제는 1984년 사우디가 미국과의 원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기로 합의한 시스템을 말한다. 대부분의 국가가 원유를 거래해야했기 때문에 이같은 페트로 달러 체제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를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이러한 체제는 사우디와 중국이 협력을 강화하며 흔들리고 있다. 중국 수출입은행은 지난달 14일 "사우디 국영은행과 첫 위안화 대출 협력을 성공리에 마쳤다. 아랍권 금융기관에 처음 실시한 위안화 대출"이라고 밝혔다. 시 주석이 지난해 말 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의 참석 계기에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만나는 등 정상외교에 나선 결과다.
"각국이 제2 러시아 되지 않도록 모색"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달러의 지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칼럼니스트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 기고를 통해 "지난 10년간 미국이 달러를 무기화하면서 많은 주요 국가들이 제2의 러시아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달러를 정치적 제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각국이 보고 달러 영향력을 줄이고 있다는 뜻이다.

자카리아는 전 세계 중앙은행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20년만에서 약 70%에서 60% 미만으로 떨어졌다는 통계를 언급하며 "이러한 모든 대안에는 비용이 추가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각국이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점점 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달러 지위는 당연하지 않다" 유럽의 경고…흔들리는 달러 패권
마켓워치는 17일(현지시간) '미국 달러가 경쟁국들로부터 공격받고 있다. 달러가 세계 지배력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는 제목의 기사로 탈달러화 논의를 조명했다. 마켓워치는 "작년의 격렬한 달러화 랠리가 빠르게 풀리고 중국과 다른 국가들이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를 완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국제 무역과 금융에서 달러화의 지배력이 황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추측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당장 위안화가 달러를 대체하거나,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지위를 잃을 가능성은 낮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자카리아는 "달러는 안정적이고 언제든지 사고 팔 수 있으며, 정부의 변덕이 아닌 시장의 지배를 주로 받기 때문에 위안화의 국제적 역할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노력은 효과가 없었다"고 분석헀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시 주석이 미국에 가장 큰 고통을 주고 싶다면 금융 부문을 자유화하고 위안화를 달러의 진정한 경쟁자로 만들겠지만, 이는 국내 목표와는 정반대되는 시장과 개방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도이체방크의 거시경제 전략가인 알란 머스킨은 다른 통화가 달러와 경쟁하기 위한 요소로 △외국인 투자에 개방된 경제 △개방된 채권 시장 △시장 환율의 수용 △법치에 대한 신뢰 △정치 거버넌스 등을 꼽으며 "이러한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다른 통화를 찾기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