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의 접경 분쟁지역 장악에 12만 주민들 불안
휴전 이후 “권리 보장” 약속에도 보호장치 없어 고국행
‘캅카스의 화약고’라 불리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접경 분쟁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대탈출’이 시작됐다. 아제르바이잔이 지난 19~20일(현지시간) 벌인 군사작전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자 이곳에 거주해온 아르메니아계 주민 12만명이 ‘인종 청소’를 우려해 탈출 행렬에 오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5일 아르메니아 정부는 이날 정오 기준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약 500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국경을 넘어 입국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최근 아제르바이잔군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사실상 장악한 채 휴전 협상이 이뤄지자, 집과 세간살이를 그대로 둔 채 최소한의 소지품만 들고 탈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4일부터 아르메니아 방향 라친 회랑에는 국경을 넘으려는 자동차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캅카스 산맥 고원지대에 자리 잡은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국제적으로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곳 주민의 80%는 아르메니아인이다. 12만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아르메니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자치정부를 세워 분리 독립을 요구해왔다. 양국은 옛 소련 붕괴 이후 지난 30년간 이 지역을 둘러싸고 두 차례 전쟁을 벌였고, 지난해 12월부터는 아제르바이잔이 이 지역과 아르메니아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라친 회랑을 차단해 식량과 연료 공급이 끊기는 등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이 벌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난 19일 지뢰 폭발로 자국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을 테러로 규정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일대를 공격하는 ‘군사작전’을 시작했고, 하루 만인 20일 아르메니아 자치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중재로 체결된 이번 휴전협정에 따라 해당 지역에서 자치군을 무장해제하고 모든 군사장비를 철수했다.
휴전 이후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역 통합’에 따라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최근 열 달 가까이 이어진 라친 회랑 차단으로 기아 위기에 몰렸던 주민들은 이 같은 약속을 믿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교전에 참여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을 체포할 수 있다는 우려도 확산되고 있다.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지난 22일 대국민 연설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민들의 인종 청소를 막을 효과적인 보호장치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들의 삶과 정체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주민들이 원한다면 떠나라’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문제는 12만명에 이르는 난민 수용 문제다. 인구가 280만명에 불과한 아르메니아에서 겨울을 앞두고 12만명의 주민을 어디에 수용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현재 아르메니아 정부가 마련한 공간은 피란민 4만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메니아에선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파시냔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번 사태로 아르메니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더욱 멀어질 것으로 보인다.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러시아가 이번 분쟁에서 아르메니아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그간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의 지원에 기대 ‘불안한 평화’를 유지해왔지만, 러시아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 지역 분쟁 개입에 소극적인 상황이다. 여기에 파시냔 총리가 최근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미국과 합동군사훈련을 하는 등 ‘친서방 행보’를 보이자 양국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같은 튀르크계인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해온 튀르키예는 1990년대와 2020년 벌어진 1차, 2차 전쟁에 이어 이번에도 아제르바이잔의 편에 섰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25일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만나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상황을 논의할 예정이다.
로이터통신은 아제르바이잔의 이 지역 장악과 아르메니아 주민들의 대탈출로 “러시아와 미국, 튀르키예, 이란 등이 영향력을 놓고 경쟁해온 남부 캅카스 지역의 미묘한 힘의 균형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