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국제평화연구소 창설 이래
평생 평화 연구와 평화 운동 펼쳐
‘소극적, 적극적 평화’ 개념 정립도
분쟁 지역 곳곳 찾아 해결 방안 제시

70년대 김대중 가택연금 때 지지방문 
임수경 89년 방북 때는 평양 찾아 응원

현대 평화학의 창시자 또는 아버지로 불리며 평생 평화연구와 평화운동에 헌신해온 요한 갈퉁 교수가 지난 17일 이 폭력적 세상에서 저 평화로운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언제 ‘퇴임(retire)’할 거냐는 제 물음에 자신은 생전에 ‘피곤(tire)’해본 적이 없기에, 언제든 결코 ‘다시 피곤(re-tire)’할 일이 없을 거라며, 90대에도 침대에 누워 세계정치에 관해 거의 매일 글쓰거나 언론과 인터뷰하던 학자 겸 활동가가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된 거죠.

그는 1930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나, 1959년 국제평화연구소(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를 창설하고, 1964년 계간 학술지 ‘평화연구(Journal of Peace Research)’를 창간했으며, 1964년 세계평화학회(International Peace Research Association)를 창립했습니다. 세계 수십 개 대학에서 강의하며, 수십 개 다양한 평화상을 받고, 백 수십 권 책을 썼고요. 한국에 널리 알려진 그의 책 가운데 하나가 저와 동료학자들이 2000년 번역해 출간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Peace by Peaceful Means)’인데, 평화에 관해 글쓰는 사람들은 꼭 인용하는 책 같더군요. 그 책의 원제목 약자 pbpm은 제가 어디서든 유일하게 사용해온 영문 아이디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대개 전쟁이 없는 상태로 생각해왔는데, 평화연구에 대한 갈퉁 교수의 가장 큰 공헌은 평화를 크게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와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로 나누어, 전자는 전쟁을 포함한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로, 후자는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과 ‘문화적 폭력(cultural violence)’까지 없는 상태로 정의한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도 이러한 전문 학술용어들이 널리 쓰이더군요.

그는 연구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 곳곳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갈등과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한반도 민주화와 평화통일에도 힘을 쏟았고요. 1970년대 김대중 대통령이 가택연금 당할 때 집으로 찾아가 지지하기도 하고, 1989년 방북한 임수경씨가 휴전선을 건너 서울로 내려올 무렵 평양에서 그를 만나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거의 해마다 남한을 방문해 한반도 중립화를 포함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통일을 제안했습니다.

유교와 불교의 문화적 공통점을 지닌 남북한과 중국, 베트남, 일본 등 5개국이 공동시장을 만들어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평화를 구축하면 남북통일도 쉽게 불러오리라는 주장도 폈습니다. 남북한 사이에 끊어진 철길이 이어지고, 남한과 일본 사이에 해저터널이 뚫리면, 아내의 고국 일본에서 자신의 고국 노르웨이까지 평화의 기차를 타고 여행하겠다는 꿈도 꾸었지요. 1996년 이른바 강릉 잠수함사건이 터져 남북관계가 험악해지자 정치인들은 갈등을 풀기 어려울 것이라며, 북한의 황장엽을 비롯한 평화학자 2명과 남한의 저를 포함한 평화학자 2명을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로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1997년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을 1998년 국정원 안가에서 저와 함께 만나기도 했고요. 2022년 7월 포르투갈에서 또 무슨 평화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제가 축하인사를 건넸더니 대뜸 남한의 “불안한 상황”이 너무 걱정된다며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더군요. 90대 평화운동가가 침대에 누워서도 여전히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겁니다.

1990년대 초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저에게 큰 사랑을 베풀며 평화학을 가르쳐주시고 평화운동으로 이끌어주신 은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재봉/원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