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치닫는 한-러 관계에 한숨 쉬는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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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6-24 09:37 조회30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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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치닫는 한-러 관계에 한숨 쉬는 기업들
- 장박원 에디터
- 승인 2024.06.21 14:45
삼성중공업 5.7조 선박 계약 해지 통보받아
법원에 제소하겠다지만 손실 1조 넘을 수도
현대차는 러이사 공장 단돈 14만 원에 매각
미국 패권주의와 윤 정부 외교 참사의 그늘
한국과 러시아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언제라도 레드라인을 넘어설 태세다. 북한과 러시아가 정상회담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을 통해 군사 협력을 강화하자 윤석열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 제공 가능성’이라는 위험천만한 카드를 내놨다. 대러시아 수출 금지 품목도 확대하겠다고 한다.
북방 외교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와 멀어지며 피해를 본 기업이 적지 않다. 러시아에 투자했거나 러시아 기업과 협력했던 기업 중에는 수조 원대 손실을 보기도 한다. 최근 러시아 선주로부터 선박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삼성중공업도 그 중 하나다. 삼성중공업은 최근 유럽지역 선주가 선박 블록·기자재 판매, 공급계약 해지를 통보했다고 공시했다. 여기서 유럽지역 선주는 러시아의 즈베즈다 조선소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2019~2020년 즈베즈다 조선소와 러시아가 추진하는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사업 ‘ARCTIC(아틱·북극) LNG-2’에 투입될 쇄빙 LNG 운반선 15척과 셔틀탱커 7척에 대한 건조계약을 맺었다. 총 계약 금액은 42억 달러(약 5조 7000억 원)에 달했다. 당시 조선업계 역대 최대 규모 수주라 화제가 됐다.
계약 내용은 삼성중공업이 국내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박 블록과 기자재를 공급하고 기술 파트너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삼성중공업은 계약에 따라 즈베즈다 조선소에 현지 인력을 파견해 LNG 운반선 15척 중 5척을 건조해 인도를 끝냈다. 하지만 지난 2022년 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며 스텝이 꼬였다. 올해 2월에는 즈베즈다 조선소가 제재 대상에 오르며 계약 이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삼성중공업은 전쟁 발발 직후 현지 인력을 철수시켰다. 즈베즈다 조선소에 공급할 블록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계 시장에서 원료와 원자재를 조달해야 하는데 이들 품목 중 상당수가 대러시아 수출 금지 품목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은 블록과 기자재를 공급할 수 없는 ‘불가항력’ 조건이 생겼다며 즈베즈다 조선소 측에 통보하고 계약 이행 방안을 논의해왔다.
그러나 즈베즈다 조선소는 지난 11일 건조하지 않은 LNG 운반선 10척과 셔틀탱커 7척에 대해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삼성중공업에 건넨 선수금과 지연이자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했다. 삼성중공업은 싱가포르 중재법원에 이 사안을 제소할 방침이지만 승소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계약 해지와 패소로 삼성중공업이 얼마나 손실이 입을지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렵다. 1조 원 이상 물어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무엇보다 계약이 유지됐을 때 얻게 될 막대한 수익이 사라진 것만은 틀림없다. 이 여파로 삼성중공업의 기업가치도 발목이 잡혔다. 불안한 중동 정세로 해상운임이 상승하며 선박 수요가 급증하는 호황 속에서도 주가는 지지부진하다. 삼성중공업은 선박건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직후 주가가 급락했다. 이에 비해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중공업 주가는 선박 발주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연일 오르는 중이다.
정몽구 회장 때부터 러시아 시장에 공을 들인 현대자동차도 한국과 러시아 관계 악화로 큰 피해를 봤다. 현대차는 올해 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현지 공장을 포함한 러시아 법인 지분 100%를 러시아 업체인 아트파이낸스에 넘겼다. 지난 2010년 가동에 들어간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러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 현대차는 이 공장을 단돈 14만 원에 팔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후 가동이 중단되며 적자가 누적된 상황에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전쟁 직전 연간 40만 대 육박하는 판매 실적으로 러시아 수입차 브랜드 선두를 달렸다.
현대차는 러시아 공장을 매각하며 되사는 조건인 ‘바이백’ 계약을 체결했으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고 있는 데다 윤석열 정부의 대러시아 적대 외교로 사실상 원상 회복은 힘들어졌다. 현대차 러시아 법인의 지난해 매출은 400억 원대였다. 영업 손실이 컸으나 공장이 예전처럼 정상 가동되면 다시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와의 외교 파탄으로 피해를 본 기업은 삼성중공업과 현대차만은 아니다. 러시아에 진출했던 중소·중견 기업 중에는 치명상을 입은 곳도 적지 않다. 대기업은 러시아가 여러 시장 중 하나지만 중소기업은 유일한 수익처였을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 시장을 잃었으나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서 우리 기업들이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막연한 이야기일 뿐이다.
재건사업은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무상 원조나 차관을 통해 자금을 제공하면 한국 기업이 수주하는 방식에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유럽 기업들도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재건사업에서 우리 기업들이 얼마나 실적을 올릴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결국 러시아 시장을 잃은 것은 '현찰'이고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은 '어음'인 셈이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 헛발질이 이런 어이없는 사태를 연출했다. 전쟁 발발 직전인 2021년 우리 전체 수출에서 1.55%를 차지했던 대러시아 수출 비중은 지난해 1% 밑으로 떨어졌다. 한국과 러시아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 대러시아 수출 비중은 빠른 속도로 0%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