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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사도광산 거짓판박이…근본문제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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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8-01 11:34 조회1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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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사도광산 거짓판박이…근본문제 따로 있다


  •  한승동 에디터
  •  
  •  승인 2024.07.30 18:20
 

후안무치 파고들면 원천적으로 잘못된 한일관계

군함도 때도 ‘강제동원’ 인정했으나 전시하진 않아

사도광산 전시에는 ‘강제동원’이란 말 자체를 배제

산케이신문 “조선인 차별 없었고, 전시도 필요없다”

일본편 들어준 미국 주도 한일협정, 미일 강화조약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7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니가타현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사진은 사도 광산 아이카와쓰루시 금은산(金銀山) 유적. 2024.7.27. 연합뉴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7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니가타현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사진은 사도 광산 아이카와쓰루시 금은산(金銀山) 유적. 2024.7.27. 연합뉴스

지난 27일 일본 니가타 현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전후해서 벌어진 한일간의 알력과 불편은 9년 전의 나가사키 현 하시마(군함도)의 그것을 되풀이한 복사판이었다. 그 등록 과정과 한국 쪽의 문제제기, 유네스코의 시정조치 권고 결의, 일본의 조치와 한국정부의 대응 등, 이미 진행됐거나 앞으로 진행될 일들은, 단언컨대 마치 감독과 출연진 얼굴만 바꾸고 재편집해 방영하는 리메이크판 드라마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바뀔 게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이번에는 일본이 또 마련할 전시실(산업유산정보센터) 설명판에서 아예 ‘강제동원’ 사실 자체를 누락시켜 버리자는 걸 한일 정부간 ‘공조’로 공식화하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군함도 등록 때도 일본은 말로만 ‘강제동원’을 인정했을 뿐 실제로 전시실에 그것을 명기한 적이 없어서 사실상 바뀔 게 없다.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의 한 건물에 28일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주변 박물관에 조선인 노동 관련 전시물을 설치하고 매년 노동자 추도식을 열기로 했다. 2024.7.28. 연합뉴스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의 한 건물에 28일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주변 박물관에 조선인 노동 관련 전시물을 설치하고 매년 노동자 추도식을 열기로 했다. 2024.7.28. 연합뉴스

군함도 등록 때도 ‘강제동원’ 인정했으나 전시하진 않아

2015년에 일본정부가 군함도 등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약속한 것이 있었다.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끌려와서 가혹한 환경 아래에서 일해야 했던 많은 조선반도 출신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을 기억에 남기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서약이었다.

이 ‘적절한 조치’에 대한 약속 이행의 증거로 일본이 설치한 것이 ‘산업유산정보센터’라는 전시실이었다. 한국이 문제삼고 유네스코가 일본의 처사를 비판하면서 국제적인 시선이 곱지 않게 되자 내어 놓은 궁여지책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설치된 전시시설은 설치장소부터 희생자들이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한 현장이 아닌 도쿄였고, 주요 전시 내용도 일본이 약속한 것과 전혀 달랐다. 일본 당국이 그때 약속했던 대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끌려와 가혹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그들의 고난을 기억에 남기기 위해 과거를 “겸허하게 직시하고 있다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아사히신문> 2024년 7월 26일)

이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강한 유감”과 함께 조선인들이 노동을 강제당한 것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지적을 여러번 받았다. 유네스코는 그런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강구하라는 결의를 적어도 3차례나 거듭했다. 일본 내에서도 연구자들이 편향된 내용을 문제삼는 지적들이 있었고, 일본정부 당국자들 중에서도 “(일본에) 유리한 증언들만 모아 놨다”는 걸 인정하는 소리들이 나왔다.

 

나가사키 현의 군함도(하시마)    나무위키
나가사키 현의 군함도(하시마)    나무위키

군함도 산업유산정보센터 “차별, 학대 없었다”

설치된 산업유산정보센터는 군함도와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23개 자산에 대해 패널과 동영상으로 해설을 했다. 패널에는 ‘국민 징용령’과 “관 알선, 징용, 귀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5가지 문서” 등이 열거돼 있었다.

그 옆에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전문이 게시돼 있었는데, 그 의도가 뻔했다. 일본정부는 조선인 징용공(강제동원 노동자) 피해자들 배상 문제에 대해 “이 협정으로 해결이 완료됐다”고 이미 못박아 놨다. 설사 좀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마저 이미 그 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걸 관람자들에게 주지시키려 했을 것이다.

같은 방에는 예전 섬 주민들과의 인터뷰도 소개돼 있었다. 아버지가 군함도 탄광에서 일했다는 재일 한국인 2세는 그 인터뷰에서 “이지메(해코지)당하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건 조센징이야’라고 하는 (차별적인)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등의 증언을 한 것으로 돼 있다. 가토 야스코 센터장은 “정치적인 의도는 없다. 약 70명의 예전 도민들을 인터뷰했으나 학대를 받았다는 증언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아사히> 2020년 6월 14일)

과거를 직시하고 겸허하게 반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성하지 않기 위한, 왜 반성해서는 안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증거’들만 모아 놓은 듯 보인다.

사도 광산과 관련해 설치될 전시실의 설명문들도 아마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범죄사실 희석해서 증발시키기

2021년 6월에 실시된 관련 전문가들의 군함도 정보센터 현지시찰 뒤 발행된 보고서는 그것을 다시한번 상기시킨다. 전문가들이 “희생자들을 기억에 남기는 조치”에 대해서 묻자, 정보센터 책임자가 “(일본인도 외국인도 피해자가 된) 탄광에서의 사고라는 정보가 전시내용에 포함돼 있다”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정보센터 관계자는 “(조사 때 전 주민들을) 인터뷰했는데, 군함도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는 사람은 없었고, (섬 주민은 일본인도 외국인도) 좋은 경험, 나쁜 경험을 서로 나눴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이를 토대로 “조선반도 출신자들이 의사에 반해 끌려와서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관람자들이) 인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강한 인상이 남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2021년 7월 22일 이를 토대로 유네스코가 다시 시정 권고 결의를 채택하자 한국 외교부는 일본에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외교부는 유네스코의 결의가 “(일본이) 약속한 조치를 이행하지 않은 것을 국제사회가 명시적으로 확인하고, 이행을 강하게 요구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또 군함도 등의 유산을 전시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에 대해 “개선조치 상황을 주시하면서, 이번 결정의 조속한 이행을 요구하겠다”는 생각을 나타냈다.(<아사히> 2021년 7월 24일)

이에 앞서 한국정부는 2020년 12월에도 정보센터가 등록된 유산 현지가 아니라 도쿄에 설치돼 있는 것과 ‘징용공’에 대한 (부실하고 편향된) 설명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논평’을 냈다. 논평은 일본이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결정됐을 때 “(조선반도 출신의) 강제노역 희생자들을 기억에 남기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에 “약속대로의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했다. (<아사히> 2020년 6월 14일)

사도 광산 등록과 관련해서도 그런 정도의 한국정부 논평과 촉구가 나오거나, 그조차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니가타현 사도 광산의 28일 소다유코 출구 모습. 사도 광산 내부는 에도시대 흔적이 남은 '소다유코'와 근현대 유산인 '도유코'로 나뉜다. 2024.7.28. 연합뉴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니가타현 사도 광산의 28일 소다유코 출구 모습. 사도 광산 내부는 에도시대 흔적이 남은 '소다유코'와 근현대 유산인 '도유코'로 나뉜다. 2024.7.28. 연합뉴스

사도광산 전시에는 ‘강제동원’이란 말 자체를 배제

일본 쪽의 대응에는 바뀐 게 없다. 아마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유산등록을 둘러싼 한일간의 약간의 삐걱거림도 이런 식으로 지나쳐 갈 것이다.

좀 바뀔 게 있다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서 끌려왔다’는, 군함도 유산등록 때 일본정부가 인정했던 조선인 ‘강제 동원’ 사실 언급조차 이번에는 아예 빼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28일 <요미우리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사도섬의 금산’(사도 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 정부는 조선반도 출신자들을 포함한 노동자들에 관해 현지 전시시설에서 ‘강제노동’에 관한 용어(文言)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당시의 생활상 등을 설명하는 쪽으로 하기로 사전에 타협(절충)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한일은 내년의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관계개선이 진행되고 있어서, 양국 정부 관계자들에게는 새로운 불씨를 떠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군함도 전시물에서도 그랬지만 사도광산 전시물에서도 당시의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가혹한 조건에서 노력하느라 다같이 고생했다는 식의 설명문을 붙이겠다는 것은, 조선인들 강제동원과 차별적 대우에 관한 사실들을 따로 드러내지 않고 일본인 노동자들도 함께 고생했다는 식으로 뒤섞어 희석시킴으로써 없었던 것인 양 얼버무리려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산케이신문 “조선인 차별 없었다”

28일 <산케이신문>은 “세계유산 결정 사도광산, 전시중의 조선반도 출신자는 ‘내지와 구별없게’ 지침, 대우면에서 배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제 강점기에 사도 광산에서 강제노역당한 조선인들이 끌려간 것이 아니며, 대우도 ‘내지 출신자’와 동등하게 하라는 ‘지침’에 따라 차별이 없었고 오히려 여러 가지 '배려'를 받았다는 점을, 당시 일제가 작성하거나 지시한 여러 문서들을 들이대며 시시콜콜 열거했다.

예컨대 쇼와 18년(1943년)에 사도광업소 등에 마련돼 있던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에 대하여’ 등의 문서에 조선인들을 ‘내지’ 출신자와 꼭같이 대우하라고 했다면서, 다만 “채굴의 효율 향상을 위해 태만한 작업원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로 임하는 자세를 취했다”고 했다.

또 “반도 출신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갱내 작업원의 임금에 대해서는, 내지 출신자와 ‘꼭같이 하라’고 강조했고, 연령이나 경험 등을 고려해 채굴량에 상응한 임금을 지급하도록 했다”고도 했다. 생명보험도 가입시키고 보험료 부담도 회사측이 부담했으며, 복리후생도 차별없이 훌륭하게 처리했다고 군국일본을 변호했다.

 

7월 28일  '산케이신문' 사설('주장') "사도금산(광산) 유산등록 조선출신자의 전시 필요없다"는 제목을 달고 있다.     산케이신문 온라인 화면 촬영
7월 28일  '산케이신문' 사설('주장') "사도금산(광산) 유산등록 조선출신자의 전시 필요없다"는 제목을 달고 있다.     산케이신문 온라인 화면 촬영

“조선 출신자들의 전시 필요없다”

<산케이>는 아무런 결과 검증도 없이 남아 있는 당시의 ‘이렇게 하라’거나 ‘하겠다’는 지침류의 문서들을 인용하면서 ‘내지인’(일본인)과 ‘반도 출신자’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았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다만 위생면에서 “반도인 특유의 불결한 악습”을 고치기 위해 일본이 노력했다는,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전형적인 인종차별의식을 그대로 드러냈다. <산케이>는 인용문 속에 나오는 ‘내지’ ‘반도’라는 차별적 용어를 기사의 일반문장에서도 으스대듯 그대로 쓰고 있다.

그날 <산케이>의 사설(‘주장’)은 “사도광산 유산등록, 조선 출신자들의 전시 필요없다”였다. 앞의 기사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늘어놓은 ‘근거’들이었다.

결국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돌아가야

<산케이>의 논리에 따르면, 일본은 조선을 불법적으로 침략한 적도 식민지배한 적도 없다. 일본이 제시하는 모든 문서들이나 지침들이 이를 증명한다. ‘한일합방’도, 탄광노동과 징병 등의 ‘동원’도 모두 조선인들의 ‘자발적’ 동의와 법률에 근거한 합법적인 것이었으므로 국제법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모든 것은 합법이었으며 강제는 없었다. <산케이>뿐만 아니라 <요미우리> 등 일본의 거의 모든 언론매체들이 이 점에서는 차별성이 거의 없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과거 일본의 역사적 범죄들이 따지고 보면 모두 ‘합법’이고 정당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선언한 것이 19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다.

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합방조약’ 체결)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로 돼 있다.

미국이 종용하고 중재한 1965년 ‘한일협정’(한일 기본조약 + 청구권협정)의 ‘정본’은 영문으로 돼 있는데, 이 한일 기본조약 제1조의 ‘이미 무효’의 원문은 already null and void다. 이 영문 구절을 한국은 모든 조약 및 협정들은 체결할 당시부터 원천적으로 이미 무효였다고 해석하지만, 일본은 체결 당시는 그들 모두 합법이었으나 한국의 독립으로 비로소 이미 무효가 됐다고 해석한다.

결국 이 문제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일본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강점, 식민지배가 불법이었다고 인정한 적이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일제시기의 동원령도 합법이었고, 정당한 절차에 따라 집행됐다. 따라서 ‘징용공’ 역시 강제동원된 게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 제2조
19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 제2조

일본편을 들어준 미국

이처럼 ‘이미 무효’를 둘러싼 각기 다른 해석의 자유를 미국은 한일 두 나라에 동시에 부여했다. 일본 한국이 제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도록 함으로써 미국은 본질적인 문제와 그로 인한 충돌을 피해갔다. 본질적인 문제란, 일본은 일제가 한반도를 무력으로 침략해 강점하면서 저지른 역사적 범죄들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 배상하며, 재발 방지 약속을 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은 진심으로 그렇게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그런 일본 편을 들어 주었다.

<산케이>류의 시대착오적인 허위의식이 만연한 근본원인도 거기에 있다. 군함도나 사도 광산 유산 등록 등과 같은 한일간의 과거사 관련 충돌이나 논의, 합의들이 잘못된 과거사를 진심으로 성찰 반성해서 청산하고 새로운 가치와 비전 위에 한일의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결코 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군함도와 사도광산 유산 등의 등록을 통해 일본이 과시하려 하는 것은 과거 침략주의 ‘일본제국의 영광’이지 그것이 빚어낸 아시아의 비참과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과 청산, 그리고 새로운 출발이 아니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미국 일본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앉은 사람)와 이케다 하야토, 도마베치 기조, 호시시마 니조, 도쿠가와 무네요시, 이치마타 히사토 등의 일본 고위관리들.    위키피디아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미국 일본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앉은 사람)와 이케다 하야토, 도마베치 기조, 호시시마 니조, 도쿠가와 무네요시, 이치마타 히사토 등의 일본 고위관리들.    위키피디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의 모법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일본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청구권협정 제2조 1항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구절도 마찬가지다. 한일 기본조약 제2조를 근거로 일본은 일제가 조선을 불법적으로 침략하고 지배한 사실도 없으며, 다만 어떤 이유에서든 피해를 본 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금, 독립 축하금을 주는 대신 청구권과 관련한 모든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하기로 한일 두 나라가 합의하고 서명했으므로 더는 돌아볼 필요도 없다는 주장을 완강하게 고수하고 있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 제2조 1항
1965년에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 제2조 1항

이 한일협정의 근거라고 할 ‘국제법’이 1951년 9월에 체결되고 1952년에 발효된 미일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고 일본(그리고 미국)은 주장한다. 미국은 미일 안보조약과 함께 체결한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사실상 자신들이 강제했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의 주장을 지지한다. 그 조약에서 미국은 일본이 과거 조선과 중국 등 아시아지역에서 자행한 무참한 전쟁범죄를 제대로 묻지도 않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과 재발방지 약속도 요구하지 않았다. 강화조약에서 일본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고, 같은 날 체결한 미일 안전보장조약으로 주일 미군의 영구 주둔 근거를 마련하고 전범국 일본을 미국의 최대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그 강화조약에 일제 침략의 최대 피해자인 한국(남북한 모두)과 중국(베이징과 대만 정부 모두)은 초청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서명하지도 않았다. 서명할 자격조차 박탈당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일제가 조선민족에 대해 저지른 근대의 모든 침략과 범죄행위들이 합법이고 국제법적으로 정당했다는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한일협정을 들이댄다.

6.25전쟁 중에 진행된 미일 강화조약 체결과 한일협정 교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교섭과 체결 당시 한국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수백만이 죽어나가던 전쟁 중이었고, 무기와 탄약은 물론 일반 국민의 생존마저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었다. 일본은 그 전쟁 덕에 모든 과거 전쟁범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엄청난 돈을 벌면서 미국 동맹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전쟁범죄나 배상, 강화조약과 관련한 미국과 일본의 부당한 조치나 요구에 제대로 대응할 힘이 없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위한 한일간의 교섭이 미국의 종용과 중재로 시작된 것은 바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과 거의 동시에 도쿄에서 시작됐다. 그때가 한창 전쟁 중이던 1951년이었다. 15년의 우여곡절 끝에 협정이 체결된 1965년 상황도 거의 마찬가지였으며 한일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그들의 회유와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일관계는 더 원천적 더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

일본은 그때 맺은 한일협정을 근거로 전쟁범죄의 굴레를 벗어던졌으며, 심지어 침략과 식민지배를 위한 군사력 발동이 조선민족을 서양 제국주의 침탈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이었고 조선을 전근대적 후진과 기아상태로부터 구출해 근대적 발전의 길로 이끌기 위한 자비로운 자기희생이었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산케이>류의 정신세계가 그렇다는 것은 그 신문의 28일 기사와 사설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다. <산케이>만 그런 게 아니다. 일본 주류 보수우파 스스로 그런 자기최면에 빠져 있다.

한국은 지금 그런 일본과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적 가치를 공유한다고 선언하고, ‘준동맹’적 안보관계를 맺었으며, 미국의 지휘 아래 한미일 안보군사협력 각서에 서명하고 미군이 주도하는 통합군적 지휘체제 아래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군함도와 사도광산 유산 등록을 둘러싼 한일간 알력의 근원을 제대로 살펴서 해결하고자 한다면, 윤석열 문재인 정부 등 역대 한국 정부들을 거슬러 올라가 1965년의 한일협정까지 살펴야 하고, 다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까지 가야 하며, 더 나아가 미국의 일방적인 한반도 분단과 일제 침략 및 식민지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본 자민당 정부 및 미국 바이든 정부와 전례없이 밀착한 윤석열 정부의 군함도 및 사도광산 유산 등록과 관련한 대응이 다른 정부와 다른 점을 찾는다면, ’강제동원‘ 사실에 대한 언급을 일본정부로부터 받아내느냐 아니냐 정도의 차이밖에 없지 않을까. 이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라고 하긴 어렵다.

한일관계는 더 원천적으로, 더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 그 잘못된 근본을 바로잡지 않는 한 근본적인 문제해결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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