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고승우의 미국의 한반도 개입 151년] - 세계 최장의 정전협정, 미국의 극동 군사전략에 이용돼 ②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5-30 09:19 조회957회관련링크
본문
세계 최장의 정전협정, 미국의 극동 군사전략에 이용돼 ②
- 고승우
- 승인 2022.05.30 01:36
[연재] 고승우의 ‘미국의 한반도 개입 151년’ (23)
정전협정은 미국과 소련의 극동전략과 직결되어 있고 한미상호방위조약 등 한미동맹에도 밀접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를 제어할 버팀목으로 일본을 지목해 전후 처리에서 파격적인 혜택을 일본에 제공하는데 그 결정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었다.
미국의 일본정책은 맥아더를 통해 2차 대전에 대한 일본의 범죄 처벌을 최소한으로 제한해 전범처리, 전후 배상 등에서 파격적인 시혜를 베풀었고 그 과정에서 남한은 중요한 고려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은 일본 천왕제를 유지하고 전범처벌을 극소화하면서 일제치하에 존재했던 행정기구나 그 인력을 활용해 일본에 대한 군정을 실시했다.
미국은 일본 731 부대가 조선인과 중국인 다수를 포함해 최소 3천여 명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고 중국인 수십만 명을 세균탄으로 살해했는데도 실험 결과를 미국이 넘겨받는 조건으로 책임을 묻지 않았다. 731 부대 책임자는 일본 천왕의 인척으로 일제에 의해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생체 실험을 강행했다.
미국은 남한에 대해서도 일제 식민지로 보고 일본 전후 처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군정을 실시했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가 한‧일 양국의 분쟁 대상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은 패전국 일본이 신속하게 경제회복을 실시할 수 있도록 그 배상책임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방식으로 강행하면서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에서 처럼 패전국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응징하는 차원에서 가혹한 배상책임을 지게 하는 방식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이 일제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주체인데도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을 위한 협의 단계나 최종 협정 서명국에서 한국을 배제했다.1)
미국이 남한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추진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을 일본도 찬성했다. 결과적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배상 문제는 일제에 의해 피해를 당한 국가들과 일본이 개별적 협상을 통해 추진토록 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나면서 일본이 전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토대가 되었다.
한편 미국이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 과정에서 남한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에 대해 이승만은 거의 방관하는 입장이었다. 이승만은 북한과 중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맥아더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면서 미국과 소련이 정전협정을 추진하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해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하고 한국군이 단독으로 북진을 하겠다며 무기를 미국이 공급해 달라는 식의 주장을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계속했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조건으로 정전협정 체결에 동의했다.2) 이승만은 그러나 정전협정 규정에 따라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위한 협상에 대표단을 보내지 않고 북한과 중국의 재침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정전협정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이승만에 대해서는 남한이 충분한 군비태세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북진통일만을 주장하고 남북 협상을 원천적으로 외면하다가 6.25 전쟁 발발 직후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수원으로 피신할 때 미국 군사고문단에 사전통고도 하지 않았던 점에서 전쟁 초기에 이승만에게 해외망명 정부를 세우라고 권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정전협정 협상과정에서 이승만이 국군으로 단독 북진하겠다고 주장할 때 제거할 계획까지 추진했다.3)
이승만은 △자신의 북진통일론을 1960년 실각할 때까지 주장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미국의 아시아 전략의 출발점이라는 점이었고 남한을 배제한 것이 국제법적 상식에 비춰 설득력이 없는데도 침묵한 것은 외교적 역량이 크게 부족했거나 엄청난 실책이라는 비판을 자초한다.
이승만이 자신의 북진통일 주장에 쏟았던 열정의 몇 십분의 일이라도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에 쏟으면서 국제여론전을 주도했다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판도가 오늘날과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승만은 정전협정 체결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만들 때 미국이 한반도 유사시 즉각 개입하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관철하지 못했고 대신 주한미군의 남한 배치를 ‘권리’로 인정해 주면서 주한미군의 부지, 시설, 주둔 비용까지 부담하는 식의 퍼주기 조약을 만드는데 그쳤다.
오늘날 이승만을 평가할 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한국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며 ‘국부’로 칭송해야한다는 식으로의 견해가 수구세력 등을 통해 제기되는 것은 가짜뉴스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당시 한국을 서명국에서도 배제해 40여 년 동안 일제에 의해 전 방위적으로 탄압받고 수탈당한 것에 대한 배상 문제를 원천 배제한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승만이 한국군만으로 북진통일을 추진한다는 것을 줄기차게 주장한 것 등과 관련해 지난 수 십 년간의 남한 군사전략은 남한 군이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한 대비를 최우선으로 철저히 해오고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선제타격 발언을 한 것에 미국이 어떤 식의 판단을 했을까 하는 점은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 시 문재인 전 대통령의 면담 계획 추진에서 그 윤곽이 드러난다 하겠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을 미국의 동북아, 세계 전략의 한 부분으로 보고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행동은 철저히 방지한다는 점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1956년 핵무기 한국 배치 공식화 정전협정 일방적 위배
오는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69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전쟁은 정전협정으로 일단 총성이 멈추고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한반도에서 전투 행위를 잠정적으로 중단시켰을 뿐이다. 정전협정은 한반도의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정치적으로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킬 평화협정을 추진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지만 아직껏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정전협정이 69년 지속되는 경우는 세계역사상 그 유례가 없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으면서 한반도가 세계에서 가장 전쟁 발생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남북은 물론 미국 등이 정전협정을 위반했다고 지적받는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남북 양쪽에서 군비 증강이 가속화되었으며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 공격 전략 상시화, 북한의 핵 개발 맞대응이 현실화되었다.
정전협정 60항은 이 협정 조인 후 3개월 이내에 정치적 협상을 벌여 평화협정을 추진하도록 촉구하고 있어 1954년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관련회의가 열렸지만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 협정 13항에 규정된 새 무기 도입 금지 규정을 어기고 1956~1957년 남한에 핵무기 배치를 공식화하면서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위배했다. 미국은 정전협정 이후 최초로 이 협정문의 일부를 공식 폐기할 의사를 밝힌 것이다.4)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도 대표하는 미군은 1957년 6월 21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유엔군 사령부는 정전협정 13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북측에 통보했다. 미국은 이런 통보를 하기 전에 북한이 이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미국은 그 다음해인 1958년 1월 단거리 핵미사일과 280mm 핵 발사 대포를 주한미군에 배치하고 이어 1959년 중국과 소련을 사정권 안에 둔 크루즈 핵미사일을 반입했다.
당시 북한은 핵전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전방에 배치해 미국이 북에 대해 핵무기 사용 시 미군이나 한국군도 동시에 핵 피해를 입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1963년 소련과 중국에 핵무기 개발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남측에서 논란이 된 전방지역의 땅굴도 북한이 핵전에 대비하기 위해 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정전협정과 관련해 남북이나 유엔 등은 1970년대 이래 이런저런 움직임을 보였지만 평화협정 추진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남북은 1972년 7·4공동성명과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상호간 불가침을 선언했지만 이는 정식 조약이나 평화조약이 아닌 것으로 북측이 주장하고 있다.
유엔 총회는 1975년 유엔사령부를 해체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한미연합사령부를 만들어 미군이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계속 남한에 주둔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꼼수를 썼다. 1996년 유엔안보리는 의장성명을 통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기 전에 정전협정이 철저히 준수될 것을 강조했다.
북한은 정전협정 무용론을 오래전부터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준수치 않을 것이라고 1994, 1996, 2003, 2006, 2009, 2013년에 최소 6차례 발표했고, 미국이 남한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면서 실질적인 정전협정이 파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북한과 함께 1994년 군사정전위원회 참가를 중단하고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판문점에서 연락관을 통해 접촉하는 등 정전협정의 일반적 조건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탄한 뒤 북한은 2006년 10월 첫 핵실험을 실시했고 미국은 2010년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는 불가역적 조치를 취할 경우 평화협정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은 2013년 3월 남북 간의 불가침 협정을 폐기한다고 발표하면서 핵 선제공격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한국 전쟁은 승패가 가려지지 않으면서 그 전쟁의 책임이나 보·배상 문제 등은 전면 보류된 상태다. 이 전쟁은 여전히 논란이 많아 앞으로 여러 각도에서 점검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역사적 과제로 방치되어 있다. 특히 국가보안법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전쟁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과 해석 등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인명피해가 막대했다는 점이다.
남북한 간에 전쟁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다각도로 노력해야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북한의 법적 위상이 2중적이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북한은 남한과 같이 유엔 회원국으로 국제법상으로는 국가인데 반해, 국가보안법과 같은 한국 국내법으로 보면 민간인간의 접촉도 불가능한 반국가 단체일 뿐이다.
이런 2중적인 북한의 법적 위상은 국내에서 평화통일 운동이 친북 운동으로 처벌 또는 탄압 받는 빌미가 되고 있다. 수구보수 정권은 간첩단 사건 조작 등을 통한 공안정국 조성을 통해 민중을 탄압하는 일을 반복했었다. 과거 되풀이 되었던 공안정국에 앞장섰던 정부 기관들은 평화통일 운동을 친북반미로 규정하고 국보법을 앞세워 탄압에 앞장섰지만 민주화된 뒤에도 그에 대한 반성이나 청산은 없었다.
향후 남북한 정세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해지면서 남한의 군사적 자주화, 유엔회원국에 걸 맞는 주권국가의 위상 회복, 평화적 통일노력이 매우 중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고려할 때 공안기관들이 유사한 과오를 반복해서 역사에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될 것이다.
정전협정, 평화협정으로 전환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한반도의 전쟁 방지 장치는 정전협정이 유일하다. 더욱이 정전협정은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한반도의 위기는 정전협정을 실효적인 군사, 정치적 협정으로 대체하지 않는 한 해소될 수 없다. 한국은 군의 전시작전지휘권조차 미국에게 계속 행사하도록 맡긴 형편으로, 군사적 자주권 행사를 통한 한반도 당사자다운 홀로서기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6·25전쟁 당시부터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집중 검토했고 정전이후에도 북에 대한 핵 위협을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한반도를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전략 주요 지역으로 삼아 90년대 초까지 매년 ‘팀 스피리트 훈련’을 통해 핵무기 및 재래식 무기를 동원해 북한을 압박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런 상황에 큰 위협을 느낀 북한은 핵무기 자체 개발을 시작해 결국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탑재할만한 소형 핵무기를 개발해 미 본토까지 위협하게 된 것으로 미국 안보 전문가들도 언급하고 있다. 핵무기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대치와 상호위협의 모습을 볼 때 한반도 평화협정이 진즉 체결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미국이 1958년 핵무기를 한국에 처음 들여온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서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은 원하는 모든 무기를 한국에 반입할 수 있고 한국은 이를 승인해야 한다. 미국의 무기 반입 의사에 한국은 수용할 뿐 반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즉 사드(THAAD)의 한국 반입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 조약에 따르면 사드 문제는 미국이 맘만 먹으면 언제든 주한미군에 배치할 수 있고 단지 한국이 한미행정협정, 즉 SOFA에 의해 그 비용을 얼마나 대느냐 하는 것만이 협의사항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도 국내 정치권이나 대부분의 언론은 한국이 마치 반대할 권한이나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 정보만을 양산할 뿐 군사주권이 원천적으로 전무한 한국의 실상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향후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되고 한국이 미국의 대중전략에 동원될 경우 중국이 반발해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 등을 취할 가능성이 크고 미국이 주도하는 정전협정 구도는 더욱 강화되면서 평화협정 전환 가능성은 더욱 멀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미국 북한 위폐 사건 터뜨려 6자회담 추진 중단시켜
중국이 주도한 6자회담은 관련국들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로드맵까지 만드는 성과를 거뒀지만 실행단계에서 미국의 돌발적 행동 등으로 백지화되었다. 6자회담은 지난 2005년 9·19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핵무기비확산조약(NPT), 국제원자력기구(IAEA)로 복귀하며 한반도 평화협정, 북미 간의 신뢰구축 등을 골자로 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미국이 그 해 10월 북한의 달러 위폐 사건을 터뜨리면서 그 이행이 중단되었다. 외국의 화폐를 위조하는 것은 전쟁 선포와 같은 중대한 도전으로 인식되는 중차대한 범죄행위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까지도 북한이 가짜 달러를 만든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협정이나 비핵화를 거론할 때 북한이 핵무기를 감추거나 비밀리에 제조할 가능성을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을 미국이나 한국 일각에서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한반도의 정전협정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속셈으로 내세우는 비현실적인 주장이라는 비판을 자초한다. 그것은 현대 과학의 발달로 미국과 러시아가 상호 검증 속에 전략 핵무기 감축 협상을 수십 년 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미국과 러시아는 위성과 항공기, 감시 검증 전문 요원 등을 통해 서로 상대방의 핵무기 감축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검증 기술을 한반도에도 적용하면 되지만 미국은 ‘북한을 믿을 수 없다’는 태도로 현상 유지를 고집하고 한국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전협정 유지는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 수행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여부가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은 중국의 목을 겨누는 칼로 비유되고 있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현재와 같은 전략적 이익을 동북아에서 유지, 증대하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점을 이용해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한국군에게 넘긴 뒤에도 유엔사를 통한 남한에 대한 군사적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한국은 이에 끌려가는 형국이다.
미중패권 경쟁 심화 이전에 한국 한반도 조정자 위상 확보해야
오늘날 미국과 중국은 경제, 외교, 국방 등 전 방위에 걸쳐 대치와 갈등의 수위를 높이는 패권경쟁을 벌이면서 동북아에 신냉전 시대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 비핵화는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정전협정 상태가 계속 유지될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미국이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면서 지속적으로 한국의 미국에 대한 추종을 의미하는 동맹을 강조할 경우 최근 수년간의 한미관계처럼 한국이 전 방위적으로 미국에 심각하게 예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동북아 정세는 한미일 공조에 대항해 중국, 러시아, 북한의 관계 긴밀화가 강화되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미‧중 두 나라의 패권 경쟁은 중국의 경제력과 군비증강이 미국의 동북아 군사구도에 균열이 생길 수준에 다다르면서 심화되는 양상이다. 미‧중간 군비상태나 국방예산 규모로 보면 미국이 월등하다는 측면에서 전체적인 군사력 비교를 할 경우 중국은 미국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2020년 국방예산의 경우 미국은 7780억 달러, 중국은 2520억 달러이고 재래식 무기의 상징인 항공모함은 미국이 20척, 중국은 2척을 각각 가동 중이다.5)
그러나 중국은 자국과 그 주변의 군사적 방위태세로 국한할 경우 미국의 군사적 압박에 대처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과 중국 주변에서 미중이 재래식 무기체계로 충돌할 경우 미국이 낙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략 핵무기의 경우 중국은 미국의 20~30분의 1 수준에 그치지만 미국에 상당한 정도의 핵 보복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오늘날 동북아 긴장이 고조되는 이유의 하나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처한 국내외 정세로 볼 때 군사적 충돌이나 제한전쟁과 같은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국이 중국 포위 전략에 동원하고 있는 인도, 호주, 일본, 한국 등이 중국과 긴밀한 경제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공세가 강화돼도 이들 국가의 미국에 대한 협조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도 대만에 대해 무력공격 가능성을 위협하고 있으나 양안 경제협력 관계 등으로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군사력 증강이나 경제력이 중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 또는 그 보다 10년을 전후해 미국을 능가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으로 보고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미중패권 경쟁이 더 심화되기 전에 한국은 국방부문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한국의 미국 대한 군사적 예속 상태가 방치될 경우 미국에 대한 편입이 더욱 강화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늦어도 향후 5~10년 안에 군사적 자주권 확보 조취를 취해 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미동맹의 핵심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상화를 통해 그 교두보가 확보될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평화협정 추진도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에 대한 대응, 어떻게?
북한은 자체 보유 핵무기가 아니면 중동의 이라크나 리비아 꼴이 될 것이라면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고 이를 지속할 기세다. 이라크, 리비아가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다가 엄청난 비극을 겪었고 냉전시절 핵무기를 포기했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공을 받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집착과 비축이 강화될 전망이다.
이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권의 대북정책은 실패했다면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도발로 규정하고 미국의 전략자산 남한 배치 등 한‧미간 군사적 대응을 강화할 방침을 강조했다. 동시에 ‘유사시 도발 원점 타격’을 공언하면서 전투기 발진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맞대응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동조하는 측면이 강해 남북한간의 전쟁발생 방지나 교류협력, 평화통일 노력을 할 공간이 축소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박정희,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와 북한이 지속적으로 평화와 안정, 통일을 지향하는 합의를 내놓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윤석열 정부는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공 시 군사적 지원을 공언하면서 주한미군은 물론 한국의 동참이 필요하다는 방침을 밝히자 중국과 러시아가 군사적 대응태세를 취하는 등 동북아에서 위기 지수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반도가 정전협정 체제 속에서 미국의 대중 공세나 대북 선제공격 전략이 보장되는 등 전쟁 발발의 위험을 안고 있는 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은 달성될 수 없다. 한반도 당사자의 하나인 한국 정부는 한반도의 전쟁 발생 위기지수가 높다는 구조적인 원인의 하나가 정전체제라는 것을 인정하고 전쟁 위기 해소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남한이 향후 자주국가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외교,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국가가 될 것인지 여부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등에 달려 있다. 전쟁의 위협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면서 평화와 안정, 번영을 정착, 증대시킬 안전장치의 하나로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
주)
1) “Participation of the ROK in the Japanese Peace Settlement,” 12 Dec 1949, Box 4, Folder “DRF 163”, Reports Relating to the Far East, 1946-1952, RG 59.
2) “Hanmihyŏpyak hyujihwarŭl wuryŏ” [Anxiety about the Armistice Being made a scrap of paper], July 26, 1953. Kyunghyang Daily.
3) 2 “Han’gukunmyŏngŭi Chungdaegiro [Crucial Crossroad of Korea’s Destiny],” June 27, 1953. Kyunghyang Da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