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참여사회 2020년 6월호(통권 276호)]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미군이 평화를 만드는가 - 1. 한국전쟁과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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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4-14 15:51 조회2,30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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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참여사회 2020년 6월호(통권 276호)]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미군이 평화를 만드는가
한국전쟁과 유엔사의 시작 - 이시우 평화운동가, 사진가
한국전쟁은 초유의 위기였고 위기는 국내외적으로 예외상태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예외상태는 일상으로 굳어져 정전체제라는 시대규정을 만들어냈다. 정전위기의 일상화는 웬만한 위기를 이기는 힘이 되었다. IMF 위기도, 북핵 위기도, 코로나19 위기도 다른 나라에서라면 놀라울 정도의 침착함과 의연함으로 대처했다. 정전위기는 위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관성화를 넘어 위기극복의 창조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전체제를 무너뜨릴 잠재력이 정전체제 안에서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 너머에는 일상이 있다. 예외상태 너머에는 정상상태가 있다. 한국전쟁이 만들어낸 가장 공고한 위기의 보루, 예외상태의 진원에 유엔군사령부(이하 ‘유엔사’)가 있다.
한국전쟁에 의한 한반도의 정전위기는 올해 70년을 맞았다 Ⓒ셔터스톡
유엔헌장과 유엔사
1950년 6월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 결의는 북한의 행위가 “평화의 파괴”를 이룬다고 명기하고 있다. 미국의 결의안 초안에는 ‘침략’이 사용되었으나, 이집트가 침략은 국가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침략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하자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침략을 ‘평화의 파괴’로 수정했다.
그러나 헌장이 말하는 ‘평화’ 즉 ‘국제평화’는 국가 간의 관계다. 만약 북한 병력이 정부가 아닌 혁명세력이나 폭도라면, 따라서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었다면, 안보리는 평화의 파괴가 존재한다고 결정할 수 없다. 유엔헌장 제정에 참여했고 헌장의 가장 탁월한 해석자로 인정받는 켈젠Hans Kelsen은 한국사태에 있어서 1950년 6월 25일의 안보리 결의는 북한을 국가 또는 정부로 보지 않으면서, 다시 말하면 한국사태를 내란으로 보면서, 평화의 파괴가 있었다고 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헌장 39조는 ‘권고’와 ‘조치’를 구별하고 있다. ‘권고하기’와 ‘강제조치 결정하기’는 39조 내에서 안보리의 서로 다른 두 기능이다. ‘권고’는 평화적 수단에 대해서, ‘조치’는 군사적 강제조치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군사적 강제조치에 대해서는 권고할 수 없으며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6월 27일의 결의에서 안보리가 가맹국에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등을 ‘권고’한 것은 헌장에 입각한 결의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참전국들의 조치는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각국의 조치였을 뿐이다. 따라서 에케허스트Michael Akehurst는 그 병력은 각 국가의 병력이며 유엔군은 아니라고 했다. 1994년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도, 1998년 코피 아난 총장도, 2018년 디칼로 유엔사무부총장도 유엔사는 유엔과 무관한 조직임을 공식 확인하였다.
한국 주권과 유엔사
예외상태란 법 밖에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법 밖에 있으면서 법을 규정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유엔사는 한국 주권과 충돌한다. 유엔사는 자신들이 38선 이북지역에 대한 점령통치주체라고 주장한다.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 결의안과 10월 12일 언커크임시위원회 결정❶에 의거해 미국은 38선 이북지역 점령 시 유엔사령관이 통치의 주체임을 주장해 왔다.
영화 <백두산>에 국군이 한 도시에서 정체불명의 군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전투 종료 후 그 군대가 미군임이 확인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국군과 미군 간의 전투라는 놀라운 상황으로 전개된다. 이는 정확히 1950년 10월, 함흥시청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을 연상시킨다. 함흥시청을 접수하고 군정을 수립한 유원식 대위는 며칠 뒤 도착한 유엔군과 군정권 장악 문제로 격렬하게 충돌한다. 그러나 유원식은 유엔총회결의를 내세운 미군사령관에 굴복하고 눈물을 흘리며 함흥시청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작전계획 5029'❷가 발동되면서 이와 똑같은 상황이 재연된다. 이는 1954년 11월 17일, 남한 영토가 된 38선 이북과 비무장지대 사이 지역에 대한 주권을 이양해달라는 한국 측 요구에 미국이 행정권만을 이양하는 근거가 되었다. 판문점 평화의집에 한국 정부가 부여하는 번지가 부재한 것도 1962년 유엔사가 비무장지대를 미국의 점령지로 규정하여 한국 행정의 접근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북한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영토주권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헌법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어 그 문제점이 심각히 제기될 수 있으나 유엔사의 존재는 이 조항마저도 훼손한다. 이 문제는 북과 해결하기 전에 남측으로서는 주권의 문제로서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38선 이북지역 통치권의 근거가 된 1950년 10월 12일 언커크임시위원회 결정은 유엔총회의 결정도 아니었고, 그마저도 언커크가 창설되어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임시로 유엔사령관에 통치를 위임한 것이었다. 그해 11월 말 언커크가 서울에 도착했으므로 그와 동시에 유엔사령부의 통치위임권은 소멸한 것이다. 또한 언커크는 63년 유엔총회결의를 통해 해체되었으므로 38선 이북지역에 대한 유엔사의 어떤 통치권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
두 번째 문제는, 유엔사가 어떤 절차도 필요 없이 당장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미 50년 전 유엔안보리 결의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전쟁처럼 골치 아프게 유엔안보리 결의를 끌어내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는 연합사가 해체되어도 유엔사의 작전권은 유효하다는 근거로 노골적인 유엔사 재활성화를 주장하고 있다.
매년 6월 25일 즈음, 현충원은 유엔기를 비롯해 한국전쟁 참전국의 국기게양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국립대전현충원
일본 주권과 유엔사
세 번째 문제는 유엔사의 작전 통제 아래 주일미군과 자위대까지 한국전쟁에 동원된다는 것이다. 유엔사의 7개 후방기지가 일본에 있다. 7개 기지에는 도쿄와 그 주변의 요코다 공군사령부 기지, 요코스카 해군사령부 기지, 캠프 자마 그리고 사세보의 미해군 기지,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해병대사령부 기지, 카데나 공군기지, 화이트비치 해병대기지로 가장 중요한 주일미군의 각 사령부 기지들이 포함된다. 이것은 1951년 9월 8일 ‘유엔군지원에 관한 교환공문’ 일명 ‘요시다-애치슨 교환공문’에 의해 규정되었다.
일본은 한국 내 유엔조치에 참여하는 군대에 대해 시설 및 역무를 제공키로 합의한 데 기초하여 이들 기지를 유엔사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 기지는 ‘일미안보조약’에 묶여 작전 출동시 사전협의가 필요한 여타 주일미군기지와 달리 사실상 자유사용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요시다-애치슨 교환공문 전문에 명시된 한국에서의 유엔의 조치는 유엔에서 결정된 일이 없다. 앞서 언급한대로 안보리는 군사조치를 결정하는 대신 평화적 해결에 특정하여 사용되도록 규정된 ‘권고’를 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공문은 무효이다.
나가며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어도 미국은 유엔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한국전쟁이 낳은 70년의 위기상황과 헌법 밖에서 작동하는 예외상태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헌법도 유엔헌장도 위기니까 무시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기이기 때문에 사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상과 정상이 해체되느냐 유엔사가 해체되느냐. 그것이 문제다.
❶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결의에 의해 UNCURK(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단)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각국 정부는 한국임시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10월 12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내부결의안이 통과됐다. “유엔사에 의하여 점령된 지역의 통치와 민사행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이 지역의 행정을 고려하게 될 때까지 통합군사령부가 임시로 담당할 것을 권고하고…” 출처 이시우(2019.12.19). 유엔사의 DMZ출입통제 문제점. <이시우닷넷(www.leesiwoo.net)>
❷ 북한에서 소요나 내란이 일어나 김정일 정권이 붕괴할 경우에 대비해 한미양국이 1996~1997년 경 준비하여 1999년 완성된 특수 군사 작전계획으로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