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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참여사회 2020년 6월호(통권 276호)]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미군이 평화를 만드는가 - 3. 필리핀에서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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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4-14 15:54 조회2,22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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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참여사회 20206월호(통권 276)]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미군이 평화를 만드는가 

필리핀에서 미군은 철수했는가? - 엄은희 지리학 박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애초 본지로부터 요청받은 원고의 제목은 ‘필리핀에서 미군이 철수했던 이유’였으나 나는 ‘필리핀에서 미군은 철수했는가?’로 제목을 바꾸려 한다. 필리핀 일부 지역에서 미군이 여전히 주둔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미군 철수가 곧 자주국방이나 지역평화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어려운 지점이 있다. 또한 미-필 양국이 2014년 다시 체결한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에 따르면, 필리핀 내 미군의 역할은 전쟁대비/억제보다 HADR인도적지원과 재난경감, 테러대응, 반마약조치 등으로 제한되고 있다. 

 

물론 지난 2월, 두테르테 대통령이 방문군협정VFA, Visiting Forces Agreement 종료를 선언하면서 미군의 재再주둔을 가능케 한 EDCA도 흔들리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시 나는 현지 조사차 필리핀에 있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지방에서의 조사는 취소되었으나, 대신 마닐라에 머물며 지난해 중간선거 압승 이후 두테르테 정부의 정책실행과 필리핀 국내외 정세변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부 페이스북 친구가 두테르테의 선언을 ‘자주국방’, ‘미군철수’, ‘양키고홈’ 같은 구호와 함께 상찬하는 모습을 보고 꽤 당혹스러워졌다. 

 

필리핀의 VFA 종료 선언은, 가까이는 두테르테의 최측근인 바토 상원의원의 미국 비자가 거부당한 것에 대한 다소 즉흥적인 대응이었으며,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2016년 두테르테 대통령 등장 이후 전통적 우방 미국과 거리를 두며 친중국을 향한 대외정책 변화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지면을 통해 필리핀, 더 나아가 아시아에서 미군이라 이슈를 복잡하게 변화하는 아-태 정세 안에서 가능한 한 설명해보려 한다. 

 

필리핀 미군 주둔의 시작 : 식민, 태평양 전쟁, 군사기지협정

1898년 미-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며, 필리핀의 미국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1903년 필리핀 클락에 비행장을, 1907년 수빅만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며 군사력을 증가시켰다. 식민지를 자국영토로 생각했던 미국은 1934년 필리핀의 독립을 약속(20년 후 독립, 1935년부터 자치정부 인정)하면서도 군사기지만큼은 영구 사용하기를 희망했었다. 물론 필리핀 의회는 반발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41년 진주만 폭격 후 미국의 태평양전쟁 참전이 본격화되면서 필리핀의 군사기지로서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1946년 필리핀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냉전의 시대였다. 미-필 간 식민관계는 끝났으나, 군사·정치경제·원조의 측면에서 양국 관계는 여전히 중요했다. 미국은 필리핀을 거점으로 동아시아 냉전에 개입하고자 했으며, 신생독립국 필리핀은 미국의 후원을 절실히 원했다. 1947년 군사기지협정MBA, Military Bases Agreement과 주둔군지위협정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이, 1952년에는 양국 간 상호방위조약MDT, Mutual Defense Treat이 체결되었다. MBA에 명기된 미군의 주둔 기간은 99년에 달했다. 

 

격동의 80년대 : 피플파워, 신헌법, 반미-반제국전선의 분화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한국의 박정희와 자주 비교되는데, 그에겐 몇몇 반전 사실이 있다. 우선 그는 군인이 아니라 변호사이자 초기에는 개혁적 성향의 정치인이었다. 첫 임기 동안에는 냉전의 반대 축인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친미반공 일변도의 외교관계도 전환시켰고, 1966년 대미협상을 통해 미군 주둔 기간을 99년에서 25년으로 줄였다. 하지만 두 번째 임기 동안 경제위기와 국내갈등이 심화되며 결국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억압적 정치와 끝없이 추락하는 경제위기는 큰 민심이반을 낳았고, 민중들과 반대파들의 집결도 점차 강화되었다. 

 

필리핀 내 반미감정은 1968년 이후 베트남 반전운동을 지지한 급진적 학생세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계엄령 이후 미정부의 재정 및 군사 지원이 오히려 늘어나면서 독재정부와 미국을 동일시하는 인식이 강화되었고 급기야 1984년에는 “반미-반독재 투쟁”이 반정부운동의 핵심구호가 되기도 했다. 이 힘은 1986년 민중항쟁People Power으로 모였고, 결국 독재종식과 민주정부 수립, 그리고 1987년 헌법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신헌법에는 미군이 필리핀에서 자체기지를 운영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덜 알려진 사실인데, 피플파워로 선출된 아키노 정부는 주둔종료를 앞두고 미군 주둔 연장을 위한 협상에 나섰다. 미군기지의 부작용(매매춘, 마약, 훈련 중 갈등, PX 물품으로 인한 시장질서 교란 등)은 분명했으나, 반기지동맹은 정부 그리고 시민사회 안에서도 사실 소수파였다. 경제는 여전히 어려웠고, 필리핀 정부는 미군 주둔을 지렛대 삼아 미국의 경제지원과 시장접근성을 더 원했다. 줄다리기 협상이 이어지던 1991년 6월, 피나투보 화산 폭발은 필리핀 측에 큰 불행이었다. 재난은 필리핀 지역사회뿐 아니라 미군의 항공 주력인 클락 공항의 폐쇄로 이어졌다. 이에 필리핀 측은 협상력은 상실하였고 미국이 제시한 보상액은 확연히 떨어졌다. 민심은 이때 이반되었다. 재난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던 필리핀 국민과 정치인들은 협상안 거부를 선택하며, “이제 (미-필 간) 형과 동생의 관계는 끝났다”라는 선언이 이어졌다. 이렇게 주둔협정은 종료되었고, 1992년 주필미군의 한 시대는 저물었다.

 

돌아온 미군 : 탈냉전, 방문군협정, 22년 만의 재주둔

탈냉전의 시대였으나 안보동맹은 유효했다. 미-필 양국 간 기지협정MBA, Military Bases Agreement은 종료되었으나 상호방위조약MDT을 바탕으로 정기적 군사훈련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필리핀의 안보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이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세력을 키우던 시기였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스프래틀리 군도의 인공시설물 설치를 계기로 중-필 간 영토분쟁 문제가 커져 갔다. 남부 민다나오에서 공산반군 혹은 무슬림반군이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국내 안보 환경도 어려워졌다. 

 

이에 미-필 양국은 1999년, 방문군협정VFA을 통해 군사동맹 관계를 회복하였다. 협정에 따라 매년 2~3주간 연인원 2~3천 명이 참여하는 정기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미군은 14일 동안 방문군의 형식으로 필리핀 영내에 진입이 가능해졌다. 훈련명은 ‘어깨를 건다’는 뜻의 발리카탄Balikatan이었다. 상하관계에서 협력관계로 변화되었음을 상징한다. 2001년 9·11테러와 2002년 민다나오 아브사얍Abu Sayyaf❶공동추적을 거치며 양국의 군사적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2011년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회귀Pivot to Asia 정책 선언은 아시아에서 미-중 경쟁이 본격화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미국은 그간 아태지역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말하며 아시아의 재균형에 직접 개입할 것을 밝혔다. 동남아에서 미국의 최대우방은 여전히 필리핀이었고, 미-필 군사동맹도 재구축될 것임이 시사되었다. 남중국해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2012년 중국과 필리핀의 해군함정이 스카보로섬 주변에서 충돌하였고, 필리핀 정부는 영토분쟁 UN 제소로 응전하였다.

 

미-필 군사동맹이 재강화 되는 데는 중국과 국내반군 이외에 자연재해도 큰 영향을 미쳤다. 2013년 11월 필리핀 중부를 강타한 하이옌은 사망자 5,600여 명을 포함해 1천만 명 이상의 이재민을 낳은 심각한 재난이었다. 재난구호를 위해 미국은 3천 7백만 불의 구호기금과 해병대와 항공모함을 파견했다. 미국의 발 빠른 조처는 피나투보 화산폭발 때 크게 실망했던 필리핀 국민들의 마음도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미군이 주권 유린 세력이 아니라 이재민의 생명을 구하는 긍정적 이미지로 탈바꿈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2014년 상반기, 미-필 양국 간에 새로운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이 체결되었다. 협정의 목표에는 갈등의 평화적 해결과 세계평화가 강조되었으나, 미국은 이 협정을 계기로 수빅 해군기지와 클락 공군기지 등 5개 지역에 재주둔이 가능해졌다.

 

미-중 경쟁시대 : 동아시아에 던져진 고차방정식 문제

2016년 취임 이후 두테르테 대통령은 ‘자주외교’ 입장을 표방하였다. 이 정책은 등거리외교 전략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경제적 실리를 중시하는 두테르테 정부의 대외정책은 확실히 친중으로 기울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지난 3년간 남중국해에서 중해군의 필리핀 영해EEZ, Exclusive Economic Zone 침범이나 필리핀 이선 파손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다수 발생했으나, 두테르테 대통령은 교통사고 정도로 치부할 뿐이었다. 국방부와 야당필리핀자유당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중국경도에 우려를 표명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나, 대통령은 국방부가 아닌 외교부를 통해 미국과 거리두기-친중 유화정책의 행보를 강화해왔다.

 

두테르테 정부 들어 미-필 간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양국의 대통령은 각자의 방식대로 친중화와 자국중심주의(트럼프의 동아시아 전략 수정)를 강화시켰다. 그나마 미국 내에서 대對필리핀 관계에 관심을 가진 민주당 인사들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과의 전쟁’을 인권의 프레임에서 비판해 왔다. 올 초 대통령의 최측근 바토 상원의원의 미국 비자 거부는 그가 전임경찰청장으로 마약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테르테의 VFA 종료 선언은 비자 거부 직후에 나온 다소 즉자적인 대응이라는 것이 필리핀 현지 및 국내외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전례 없는 COVID-19 팬더믹 시대를 경과하며 보건의료 부문 이외의 국제관계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미-중 간 경쟁과 갈등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안보적 차원에서도 지속되고 있고, 동아시아는 미중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불거지는 현장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대부분 미중 양국 중 어느 편에 설 것인지에 대답할 것을 강제당하고 있다. 오래된 안보 전선과 새로운 경제 전선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고차방정식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필리핀 내에서 미군의 문제는 종결된 것이 아니며, 일국적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와 아-태 지역의 경제 및 안보 문제, 더 나아가 코로나19 이후 더욱 복잡하게 전개될 국제 질서까지 고려하며 중층적으로 바라봐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❶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지역에서 반정부활동을 극단적으로 주도하는 강경이슬람 무장 단체

❷  일본도 이지스함과 1천 명의 자위대를 파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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