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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서재정 칼럼] 70년의 악몽, 한국전쟁과 원자탄 (202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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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2-16 09:59 조회2,5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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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정  칼럼(모음) - https://news.daum.net/series/1803680[

[서재정 칼럼] 70년의 악몽, 한국전쟁과 원자탄

한겨레 입력 2020.12.13. 17:16 수정 2020.12.13. 18:46
[서재정 칼럼]미국이 원자탄을 쓸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한반도에 퍼졌다. 원자탄이 떨어지면 다 죽는다는 공포감도 스멀스멀 번졌다. 버섯구름을 피하려는 피난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정확히 70년 전 흥남부두에 운집했던 피난민의 머리 위에도 그 공포감이 떠돌고 있었다.

서재정 ㅣ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우리가 항상 해왔던 것과 같이 우리는 군사 상황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들을 취할 것입니다.”

“거기에 원자탄도 포함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보유한 모든 무기를 포함합니다.”

“대통령께서 ‘우리가 보유한 모든 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원자탄 사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원자탄 사용은 항상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원자탄 사용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고약한 무기이고, 이 침략과 아무 관련이 없는 무고한 남자나 여자, 아이들에게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 날 1950년 12월1일치 <뉴욕 타임스>는 1면에 ‘대통령, 필요하다면 한국에서 원자탄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라는 제목을 단 머리기사를 실었다. 70년 전 한반도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전쟁 와중에 트루먼 미 대통령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시사한 것은 전세계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불과 5년 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미국이었다. 이 공포의 무기를 또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발언에 놀란 것은 미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국과 북한만도 아니었다. 미국의 동맹국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즉시 워싱턴으로 날아와 트루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핵무기 사용을 만류할 정도였다.

트루먼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은 빈말이 아니었다. 맥아더 휘하의 미 극동공군사령관이었던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은 12월1일 일기에 군 내부의 움직임을 기록했다. “미 육군성 작전연구실 소속 엘리스 존슨 박사가 다음주 안에 지상군을 근접지원하기 위한 원자폭탄 사용의 가능성과 효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 연구 결과를 극동군사령부에 제공한다고 제안했습니다.” 4일에는 합동참모본부가 국방장관에게 ‘미국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미군의 참변을 방지하는 유일한 물질적 수단이 되는 상황이 한국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은 비망록을 제출했다.

사실 미국 정가에서는 그 이전부터 원자탄 사용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1988년 듀카키스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가 됐던 로이드 벤슨 하원의원(민주당)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핵무기 사용을 주장했다. 북한군이 일주일 이내에 퇴각하지 않으면 미 공군의 원자탄 공격을 받을 주요 도시들을 일주일 이내에 비워야 할 것이라고 위협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오언 브루스터 상원의원(공화당)은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 권한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양하여 전장의 상황에 따라 원자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권하기도 했다.

그러면 트루먼 대통령은 왜 11월30일에 이런 발언을 했을까?

당시의 전황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 투입된 중국군 9병단이 11월27일 미 해병 1사단을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군 병력 2만5천명이 퇴로를 완전히 차단당했다.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중국군 13만명을 대적해야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두꺼운 방한복을 껴입고 있어도 동상 환자가 속출했고, 밖에 오래 두면 윤활유가 얼어붙어서 M1 소총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워싱턴은 긴장했다. 이미 중국군의 1차 공세로 큰 피해를 봤다.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1사단 3대대의 병력 800명 가운데 600여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는 타격을 입었다. 또 미 제1기병사단 8연대 3대대가 중국군에 포위되어 모조리 포로가 되는 사태가 발생한 마당이다. 예하 부대가 적의 포위에 갇혀 있는 상황을 알면서도 호바트 게이 1기병사단장은 사단의 철수를 명령했다. 미군 역사상 유례가 없는 치욕이었다. 그런데 해병 1사단은 그보다도 나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위기 상황은 극약처방을 요구했다. 이미 11월20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가 비망록에서 예상한 그대로였다. “중공군의 명백한 한국전 개입과 유엔사 사령관에 대적하는 추가 병력투입 가능성이 다시 한번 유엔군이 원자탄을 사용할 가능성을 제기함.”

미국이 원자탄을 쓸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한반도에 퍼졌다. 원자탄이 떨어지면 다 죽는다는 공포감도 스멀스멀 번졌다. 버섯구름을 피하려는 피난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정확히 70년 전 흥남부두에 운집했던 피난민의 머리 위에도 그 공포감이 떠돌고 있었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북 지도부에 그 공포감은 더욱 강렬했다. 미 공군 비행기가 상공을 날 때마다 떨었다. 그 공포감은 결국 핵무기 개발의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한반도는 아직도 1950년의 악몽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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