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기고-안광획] 미얀마 사태에 대한 고찰 – 단순한 반독재 민주화 시위로만 볼 수 있는가? (2021.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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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3-02 11:55 조회2,643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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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기고] 미얀마 사태에 대한 고찰 – 단순한 반독재 민주화 시위로만 볼 수 있는가? (2021. 2.22.)
http://www.427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4
우리는 현 미얀마 상황에 대해서 단순한 군사독재-반독재 투쟁 구도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미얀마 정치 상황에 숨겨져 있는 미얀마의 복잡한 근현대사와 세계 패권경쟁, 그리고 제국주의와 반제투쟁의 문제 등 전반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평가해야 할 것이다.
안광획/4.27시대연구원 편집기획위원, 연세대 문학석사
머리말
지난 2월 초, 미얀마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2020년 11월 미얀마 총선 결과[주, 2020년 11월 미얀마 총선에서, 민주주의민족동맹이 전체 의석의 62.4%(군부 할당 의석 25% 제외하면 83.2%)를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었다.]에 대하여 군부는 약 7천여 건의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선거 무효소송을 걸었다. 군부가 내세운 부정선거의 근거로는 집권여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민주주의민족동맹(NLD): 1988년 9월 27일 아웅 산 수치가 창당한 정당. 서방권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미얀마를 통치한 국가평화발전위원회에 대항하였다. 지지기반은 도시 거주민 및 청년층이다. 2015년 총선과 2020년 총선에서 압승하여 집권 여당이 되었다.]이 열세인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 대한 선거 미실시, 불법 사전투표와 투표지 수거, 투표함 분실, 유권자보다 860만명 많은 집계 투표지 등이 있다. 그러나 미얀마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는 공정하게 치뤄졌다’고 군부의 문제제기를 일축하였고, 무효소송 역시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여기에다가, 정부 구성에 있어서 집권여당은 개헌을 통하여 군부의 영향력(의회 25% 고정 배당)을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잇따른 부정선거 문제제기의 기각과 집권여당의 군부 영향력 축소 방침에 반발한 군부는 집권여당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마침내 2월 1일에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국가고문 아웅 산 수치와 대통령 윈 민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과 민주주의민족동맹 소속 의원들을 감금하였다. 그리고 군부는 군사정부인 국가행정위원회를 세우고 미얀마의 정치‧사회 전반을 장악하였으며, 군정체제 하에서 1년 내로 재선거를 치룰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얀마에서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중국은 무간섭을 천명한 반면에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서방권 국가들은 일제히 이를 규탄하고 미얀마 군부에 대한 외교적·경제적 압박에 들어갔다. 그리고 미얀마 내부에서는 쿠데타 및 군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군부에서는 반 군부 시위에 대해 강경 대응을 천명하였다.
미얀마에서의 군부에 대한 반 쿠데타 시위에 대하여, 한국사회에서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미얀마 시민사회의 시위를 지지하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동안의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 끝에 마침내 민주주의를 쟁취한 현대사를 가진 우리에게 있어 미얀마 시민사회에 적잖은 공감과 감수성을 느꼈으리라. 특히, 짧은 기간 동안의 이른바 ‘민주정권’이 군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된 미얀마의 현 상황은 4.19 혁명과 그에 따라 수립된 장면 내각을 뒤엎은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 1980년 ‘서울의 봄’을 5.17 내란으로 뒤엎고 이어서 광주에서의 시민항쟁을 무참히 학살한 전두환의 신군부가 연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우리는 현 미얀마의 정치 상황을 과연 단순한 군사쿠데타와 그에 맞선 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만 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우리네 현대사를 미얀마 정치‧사회 상황에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 옳은가? 오히려, 세계정세와 미얀마 근현대사 등 전반적인 배경과 반제국주의적 관점 등을 고려해서 보면 단순한 군사쿠데타-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만 보긴 힘들다. 본 글에서는 현 미얀마의 상황을 평가하는 데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안을 개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미얀마 현대사에서의 반제국주의 전선과 미-중 패권경쟁
미얀마의 현 상황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미얀마 현대사와 세계 정치(냉전 체제, 반제국주의 전선, 미-중 패권경쟁 등)와의 연관성이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현 미얀마 연방 공화국(1989~)이 들어서기 이전에, 미얀마는 군사정부가 근 50년 동안을 통치하였다는 것은 모두들 잘 알 것이다. 또한, 군사정권을 이끌었던 군부가 ‘민주화’가 성립되었던 쿠데타 직전에도 미얀마 의회에서 기본적으로 전체 의석의 25% 이상을 고정 지분으로 차지하고 미얀마의 정치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며, 최근의 쿠데타를 주도한 것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현 체제 이전에 미얀마를 오랫동안 통치한 군사정부가 사회주의 체제(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를 표방했던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네 윈을 위시한 군사정부는 ‘미얀마식 사회주의’와 버마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노선을 천명하여 미얀마에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이전 시기의 제국주의 부역자들을 처단하였다. 또한, 제3세계 비동맹노선을 지지하여 중국과 연대하였다.
군정 치하의 미얀마의 사회주의, 반제국주의 노선은 당연히 미국, 영국을 위시한 서방권에게 있어서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 미얀마에 강력한 경제제재를 자행하여 압박하는 한편, 영국 유학 중이던 아웅 산 수치를 적극 지원하여 이른바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게 하였다. 이후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여 미얀마에 대한 지원과 연대가 축소됨에 따라, 미얀마 군사정부는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고립‧압살 책동과 ‘군사독재 악마화’ 선전에 맞서 사회주의 체제 및 반제국주의 노선을 수호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1988년에 이른바 ‘8888 항쟁’이라 불리는 대규모 반공 시위(이른바 ‘색깔 혁명’)[주, 색깔 혁명(Colored Revolution):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 붕괴와 더불어 구 사회주의권 국가와 제3세계 국가에서 순차적으로 벌어진 반공 시위들. 명목상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내걸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방권 제국주의 세력의 반공시위에 대한 전략적 지원과 해당 국가의 기존 세력에 대한 제재 및 압박, 그리고 서방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매체(CNN, BBC, VOA, SCMP 등)를 통한 선전선동(시위의 미화와 기존세력에 대한 악마화)이 크게 반영되었다.]의 발생과 서방권의 전방위적 압박 끝에 군사정부는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하였고, 감금상태에 있던 수치를 석방하고 일정 부분 사회 통제를 풀고 개방을 실시하는 등의 유화책을 점차 펼쳐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비록 1995년에 실시된 첫 선거(민주주의민족동맹 압승 결과)의 경우 군부에 의해 무마되어 군부통치가 20여 년 가량 연장은 되었지만, 수치를 위시한 서방의 지원을 받는 ‘민주화 세력’은 군사정부 치하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 2015년에 총선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차지한 것이 쿠데타 이전까지의 오늘날 미얀마 현대사의 전말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냉전시기부터 오늘날까지 미얀마 현대사를 둘러싼 세계 정치의 영향이다. 냉전 시기에는 사회주의 미얀마에 대해서 중국은 반제국주의 국제연대 차원에서 미얀마를 지원하였다. 중국의 미얀마 지원의 요인은 다음과 같다. 미얀마는 중국과 남쪽(운남성 일대) 국경을 맞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근대 시기부터 중국주도 천하체제 하에서 미얀마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있던 관계였다. 그렇기에 중국에게 있어서 미얀마는 (북)조선, 러시아, 베트남, 라오스, 인도 등과 더불어 아시아 지역에서 중요한 외교 대상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여기에다가, 미-중 무역전쟁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세계 패권 경쟁에 있어서 미얀마는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중국이 서아시아 국가에서 석유를 수입하여 중국 남부까지 인도양 뱃길을 통해 운반하는 과정에서 말레이시아-싱가포르 일대 말라카 해협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벵골 만-미얀마 내륙-중‧면(中‧緬) 국경지대를 통하면 운송 경로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굳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석유를 운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에 중국은 미얀마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하면서 2017년에는 미얀마 국토를 관통하는 송유관 및 가스관을 개통하였다.
반면 서방권에게 있어서 미얀마는 중국 남서부에서 중국을 군사‧경제적으로 압박할 좋은 지정학적 위치이다. 그렇기에 냉전 시기부터 사회주의 양대 국가 중 하나인 중국을 압박하고 사회주의 미얀마를 전복시키고자 아웅 산 수치의 이른바 ‘민주화 운동’을 꾸준히 지원했던 것이고, 오늘날에도 대중국 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에 미얀마를 포함하여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전술한 중‧면 간 송유관 및 가스관 설치 역시 서방권의 미얀마 전략에 영향을 주었다. 기존에는 미국 태평양함대로 말라카 해협을 봉쇄하기만 하면 중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것이 용이했던 것이 미얀마 내륙을 통해 석유를 운송하는 경로로 바뀌면 중국 경제 봉쇄 전략에서 차질을 빚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방 제국주의 세력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있어서 미얀마의 위치는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이렇듯, 미얀마 현대사에서의 사회주의 및 반제국주의 노선의 전개 및 좌절 과정과 이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영향을 고려해 보면, 쿠데타를 주도한 미얀마 군부를 단순한 군사독재 세력, 과거 독재의 적폐라 판단하는 것은 힘들다 할 수 있겠다. 특히나 사회주의 미얀마에 대한 서방권의 지속적인 고립‧압살‧전복 책동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서방권에서는 사회주의 미얀마 시기 이른바 ‘군사독재’와 부패, 경제 침체, 반대파 탄압 등을 들어 군부를 비난하나, 정작 미얀마가 겪은 사회경제적 난관은 오랜 서방 제국주의 세력의 압박과 1980년대 말~90년대 초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가장 결정적인 요인임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동시기 북녘 동포들이 사회주의권 붕괴와 제국주의 세력의 압박 속에서 자력으로 고난의 행군을 극복해 나가야 했던 상황과 일치한다.
2. 현대 미얀마 정치 갈등의 시원 – ‘로힝야 문제’로 대표되는 소수민족 갈등
현 미얀마 정치 상황은 물론 미얀마 근현대사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사안은 또 있다. 바로, ‘로힝야 문제’로 대표되는 미얀마의 소수민족 갈등이 그것이다. 수년 전부터 로힝야 문제는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이 미얀마를 압박하는 또 다른 수단(인권 문제)이 되어 왔다.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의 경우 로힝야족을 탄압하고 학살한 주체로 비난하고, 아웅 산 수치의 경우 로힝야족 탄압을 묵인했다는 이유로 비난하며 협력관계를 철회한 사례를 봐도 그러하다.
하지만, 서방권이 선전하는 그대로 로힝야족은 ‘미얀마 정부에 의해 핍박받는 불쌍한 소수자이자 사회적 약자’라고만 볼 수 있을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미얀마 근현대사에서의 로힝야족의 위치를 따져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소수종교에 해당하는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벵골계 종족인 로힝야는 식민지 시기였던 1885년에 미얀마(당시 영국령 버마)를 식민 지배했던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인도에서 전략적으로 이주시켰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로힝야족을 미얀마에 정착시키며 이전부터 버마족(미얀마 주류 민족)과 소수민족들에게서 강탈한 토지로 구성된 플랜테이션 농장의 소유권을 로힝야족에게 주는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토지를 빼앗긴 버마족은 물론 타 소수민족들이 로힝야족에 대한 인식이 악화된 것은 명약관화였다.
또한, 영국은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버마족을 견제‧탄압할 목적으로 로힝야족과 소수민족에게 입대권을 부여하여 버마족의 독립투쟁을 토벌하게 하였고, 이는 버마족의 반(反) 로힝야 감정을 더욱 자극시켰다. 즉, 버마족에게 있어서 로힝야는 영국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매국노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는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미얀마를 침공하여 영국을 축출할 때 버마족이 반영적 입장에서 일제에 협력하여 로힝야족을 공격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식민지를 빼앗긴 영국은 일본에 맞서고자 친영세력인 로힝야를 지원하였으나, 정작 로힝야족은 대일 항전보다는 버마족과 소수민족들을 학살하는 데 집중할 뿐이었고 이 때문에 버마족 및 소수민족-로힝야 간 의 갈등은 더더욱 확대되었다.
이후 1948년 버마가 독립을 쟁취하고, 이어서 1962년에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되면서 지위는 역전되었다. 버마족이 미얀마의 주류를 차지한 반면, 식민지 시기 주류에 위치했던 로힝야는 ‘매국노’, ‘식민부역자’ 지위로 추락하였다. 네 윈이 이끄는 사회주의 미얀마는 반제국주의 노선과 식민지배 청산 차원에서 부영(附英) 매국노였던 로힝야족에 대한 모든 특권을 박탈하였고, 로힝야 소유 토지를 몰수하여 버마족과 소수민족들에게 분배하였으며 다수의 로힝야족을 방글라데시로 추방하였다. 비록 식민지 시기 이이제이 전략의 영향으로 버마족과 소수민족 간의 사이 역시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영국 제국주의자들과 로힝야족에게 토지를 강탈당하고 심각한 탄압을 받은 역사를 공유하였으므로 이들은 로힝야 숙청에 있어서는 뜻을 같이 하였다.
사회주의 미얀마의 식민지배 청산 차원의 로힝야족 숙청에 대해 이전 식민지배자였던 영국은 반발하였다. 영국은 식민지배 당시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써먹은 로힝야를 지원하는 한편, 사회주의 미얀마의 식민청산을 ‘소수민족 로힝야에 대한 인권탄압’이라 비난하며 악마화 하였다. 여기에 영국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 제국주의자들과 연대하여 유엔 안보리, 인권위원회에 로힝야 문제를 상정하고 지속적으로 미얀마에 간섭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 미얀마의 주도세력이었고 현재 쿠데타를 주도하는 군부는 로힝야족을 탄압‧학살한 주범으로 비난해오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영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세력은 자신들이 식민지 시기에 미얀마에 정착시키고 식민부역세력으로 이용한 로힝야에 대한 책임(영국, 방글라데시로의 난민 정착사업 등)은 전혀 지지 않고 있다. 이는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일대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강제 축출하고 시오니즘 성향 유태인을 정착시켜 이스라엘을 세우고선 정작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을 외면하는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
정작 아이러니한 것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원을 통해 미얀마의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점진적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완성시킨 아웅 산 수치 역시 로힝야 문제를 빌미로 지원을 중단해 버린 것이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의 미얀마 정부 역시 로힝야에 대한 정책과 인식은 사회주의 미얀마와 동일하였다. 미얀마 국회 내에서 집권여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과 소수민족 정당 연합체, 군부 지지세력 간의 갈등은 극심하나, 로힝야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 시기와 동일하게 연대하였다. 여기에다가 로힝야에서 전(全) 미얀마 차원의 탄압에 대항하고 분리독립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ISIL과 같은 무슬림 극단주의 세력과 연계하여 테러행위를 자행하고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미얀마 정부의 대(對) 로힝야 강경노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렇듯, 현대 미얀마 정치의 주요 문제이자, 쿠데타의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로힝야 문제에서도 전혀 책임지지 않은 채, 반제국주의‧식민청산을 주도한 군부를 로힝야 탄압 및 학살자라 비난하고 아웅 산 수치 역시 로힝야 문제 해결에 미온적이라고 지원을 철회해 버리는 것이 서방 제국주의의 실체라 할 수 있겠다. 즉, 원죄(原罪)는 자신들에게 있으나 정작 그 책임을 식민 정책의 피해자인 미얀마에 돌리고, 지속적으로 미얀마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미국, 영국을 위시한 서방 제국주의 열강이 진정 세계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정의의 세력으로 여겨지는가? 냉전 시기에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자행한 각종 만행과 친미성향 파쇼독재정권(남한, 필리핀, 남베트남 등)에 대해 지원 및 방조한 사실, 심지어 자신들의 침략을 격퇴시킨 통일 베트남을 견제하고자 노선마저 달랐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던 각종 흑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이런 사례를 생각하면, 현 미얀마에 대한 서방의 입장 역시 달리 보일 것이다.
3. 아웅 산 수치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 과연 민주화 투사로만 볼 수 있는가?
현재 미얀마 정치를 보는 데 있어서 고려해 볼 주제로는 아웅 산 수치 자체의 문제 역시 고려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아웅 산 수치는 흔히 ‘미얀마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딸이자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의 투사’로 인식된다. 오랫동안 군사정부에 의하여 구금과 가택연금하에서도 이른바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으며, 노벨 평화상과 국제 앰네스티 양심대사상, 광주인권상 등의 다양한 상을 수여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수치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해 본다. 모두들 알다시피, 수치는 미얀마 독립투쟁의 영웅이자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아웅 산의 딸이다. 평생을 미얀마의 독립과 통합을 위해 싸워 온 아웅 산의 미얀마에서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의 딸인 아웅산에 대한 미얀마에서의 영향력 역시 대단하다 할 수 있겠고, 사회주의 시기 군부 역시 수치를 함부로 건들지 못한 요인 역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수치의 위상과 영향력은 역설적으로 서방 제국주의 세력이 수치를 매개로 미얀마에 간섭하고 사회주의를 붕괴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어떻게 보면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이끈 아버지와 달리, 영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아 이른바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딸의 행보는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달리 보면 아웅 산 자체의 한계로 일어난 결과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호찌민 주도로 예전 식민 지배 세력이던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축출하고 분단국이나마 자주독립을 쟁취한 베트남과 달리, 아웅 산은 전쟁 이후 영국과의 협상(애틀리-아웅 산 협정, 1947.01.)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결국 이는 반영 독립투쟁을 함께 주도한 미얀마군의 반발을 사서 1947년 7월 19일 아웅 산과 동료 6명이 암살당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후, 초기 버마 연방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소수민족 간 내전을 겪다가 전술한 네 윈 휘하 군부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사회주의 미얀마가 들어서고 식민지배 청산을 통해 겨우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아웅 산의 딸인 수치는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점차 서방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경도되었다. 이런 수치에 대하여 서방 제국주의 세력이 미얀마에 재개입할 수단으로 여긴 것은 당연하다. 1988년에 수치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하여 귀국했다가 대규모 반공시위(이른바 ‘8888 항쟁’)에 참여하여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하였고, 이를 빌미로 서방 제국주의 세력은 수치의 ‘민주화 투쟁’을 적극 지원하며 사회주의 미얀마와 군부를 압박하였다. 따지고 보면, 수치에게 수여된 노벨평화상‧앰네스티 인권상 등의 각종 수상 내역은 서방 제국주의 세력이 의도적으로 수치를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우상’으로 띄워주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겠다. 거기에다가 미국 힐러리 클린턴과의 연대, 미 상‧하원 및 영국 의회에서의 연설 등도 서방권의 수치 지원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다.
여하간 수치를 매개로 한 미얀마에 대한 서방권의 간섭과 책동 끝에, 2015년 11월 10일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집권하면서 미얀마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불완전하게나마(+헌법에서의 군부 세력 의회 의석 고정 25% 보장 조항) 성립되었다. 하지만, 수치가 주도하는 미얀마에 대한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기대는 얼마 안 가 무너지고 말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국 식민지배 잔재’이자 ‘부영 매국노’였던 로힝야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인식과 정책이 사회주의 시기와 동일했던 것에서 실망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지원 하에 미얀마를 차지한 수치가 친서방 정책을 펼치고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하여 중국을 견제하리라 예상한 기대와 달리 수치는 ‘균형 외교’를 내세워 이전 시기 연중(聯中) 노선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물론, 수치는 서방과의 관계도 강화하긴 했지만, 기존의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했다.
2016년 이른바 ‘민주정부’ 출범과 함께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수치는 습근평, 이극강 등 중국의 주요 인사들과 먼저 외교관계를 열었으며, 미국은 중국 다음으로 방문하였다. 여기에다가 수치 집권 미얀마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에도 참여하였고, 전술한 중국-미얀마 간 송유관 및 가스관의 준공도 수치 집권기에 이뤄진 것이다. 이렇듯 수치 집권 미얀마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친서방 정책은 상대적으로 후순위에 둔 것에 대해서 서방 제국주의 세력이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또, ‘민주주의와 자유‧인권의 투사’를 자임한 수치가 정작 정치행보에 있어서는 권위주의적‧독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서방이 수치에 대해 실망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통령은 의전만 하는 사람,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치는 국정운영에 있어서 대통령의 권한을 무시하고 사실상 미얀마 국정에 있어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실시했다.
그리고 (비록 군부에게 의회와 정부에서의 일정 지분을 보장하는 현 정치체제 자체의 한계도 있지만) 수치는 부정선거 논란과 개헌 건으로 틀어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민주화 운동’ 시기에 자신이 싸워왔던 대상인 군부와 국정에 있어서 적잖은 협력관계를 맺었다. 수치-군부 간의 국정에서의 협력은 수치가 내걸었던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을 뿐더러, 전술한 연중 외교노선과 대(對) 로힝야 정책 등 군부 시기의 정책이 수치 정권에서도 적잖게 계승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다가, 수치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을 반대하던 언론을 탄압하는 등 군부 통치 시기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국정운영 행태를 보였다.
이와 같은 수치의 행보는 지지자들로부터 실망을 가져온 한편, 그를 지원했던 서방 제국주의 세력 역시 로힝야 문제‧연중 노선 등과 더불어 수치에 대해 실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2017년 11월 영국 옥스퍼드 시에서의 명예시민권 박탈을 시작으로 서방의 여러 도시(아일랜드 더블린‧영국 에든버러‧캐나다 등)에서의 수치의 명예시민권이 박탈되고 국제 앰네스티 인권상‧광주인권상 등의 수상내역 역시 회수되는 등, 서방권의 수치에 대한 지원 철회가 가시화되고있다.
맺으며 – 미얀마 쿠데타와 반 쿠데타에 대한 재인식 필요성 제고
물론,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의 권위주의 행보나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군부가 야기한 정책상의 오류들, 시민 사회 탄압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하루빨리 근절되어야 하며, 군부가 공약한 ‘평화로운 재선거’는 제대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미얀마 시민사회의 투쟁에 대해서,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우리의 현대사를 투영하여 공감하는 것도 어쩌면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 미얀마 상황에 대해서 단순한 군사독재-반독재 투쟁 구도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미얀마 정치 상황에 숨겨져 있는 미얀마의 복잡한 근현대사와 세계 패권경쟁, 그리고 제국주의와 반제투쟁의 문제 등 전반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현재 국내 언론들의 지나친 서방 편향적 관점 역시 비판 대상이라 할 수 있다. RFA, 미국의 소리(VOA), BBC 등 서방권 프로파간다는 물론이고 NYT, WP, CNN, 남화조보(南華朝報, SCMP) 등 서방권의 영향 하에 있는 언론매체의 선전선동에 국내 언론들(보수·진보 무관)이 일방적으로 경도되어 미국·영국을 위시한 서방권은 무조건 ‘선(善)’이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의 세력’으로, 제2세계 및 제3세계는 ‘반민주·독재정권’이자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매도하는 행태는 사태를 올바로 보는데 있어서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장에 2019년 홍콩 사태 당시 친서방 반공 시위대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양 및 혐중 여론 조장은 물론이요, 같은 해 미국의 지원 하에 자행되었다가 실패로 끝난 베네수엘라 쿠데타 기도 당시 국내 언론의 서방 편향적 보도, 2010년대 중~후반 이라크·시리아 내전 당시 이른바 ‘반군’(실제로는 무슬림 극단주의 성향 테러집단)에 대한 미화와 반제국주의 성향 세속주의 정권에 대한 악마화, 반세기 넘도록 자행되어 오고 있는 오보·대북 가짜뉴스를 통한 북에 대한 악마화가 그렇지 않던가? 이와 같은 국내 언론의 행태는 당장 근절되어야 한다.
종합하자면, 우리는 미얀마의 반 쿠데타 시위를 빌미로 패권경쟁을 조장하고 전쟁위기를 조장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의 기도를 감시하고 분쇄하는 한편, 외세의 간섭 없이 미얀마 민중이 슬기롭게 현 상황을 잘 해결하여 미얀마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주화가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기원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국내 언론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서방 편향적 보도 행태 역시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시정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