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징이 ㅣ 베이징대 교수
북한은 “새로운 길”로 정면돌파전을 선언했다. 그 “새로운 길” 이전에는 어떤 길을 걸어왔던 것일까?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협상의 길을 선택해 싱가포르에 갔고, 하노이에 갔다. 그 결과를 북한은 김계관 외무성 고문의 말을 빌려 “미국과의 대화탁에서 1년 반이나 넘게 속히우고(속고) 시간을 잃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북한이 “지나온 길”과 가고자 하는 “새로운 길”의 목적지는 다른 것일까? 북한이 이번 노동당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내놓은 첫째 의정에 대한 결정서의 첫번째 결정은 “나라의 경제 토대를 재정비하고 가능한 생산 잠재력을 총발동하여 경제발전과 인민생활에 필요한 수요를 충분히 보장할 것”이었다. 여섯째 결정이 “혁명의 참모부인 당을 강화하고 그 령도력을 비상히 높여나갈 것”이었다.
북한은 올해 ‘국가 경제발전 5개년 전략’이 막을 내리면, 내년쯤 노동당 8차 당대회와 함께 새로운 10대 전망 목표를 시작할 수도 있다. 결국 북한의 “새로운 길”은 ‘길’을 달리할 뿐, 경제발전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무려 세번이나 만나면서 ‘톱다운 방식’으로 핵 정국을 돌파하려 시도했다. 북-미 관계 개선에 ‘올인’한 것은 김 위원장만이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북-미 관계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한은 그런 문재인 정부를 북-미 관계에 “주제넘게 끼어든다”고 비난하지만, 북한이 북-미 관계에 모든 것을 건 것이 “실책”이었다면 문재인 정부 역시 모든 것을 북-미 관계에 걸었던 것이 실책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찌 보면 문재인 정부는 미국에 “굴종”하다시피 하며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풀어주기를 바랐다. 하노이 회담이 성공하였다면 남북관계의 향방은 달라졌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밝힌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의 조건 없는 재개도 하노이 회담이 풀리면 ‘수도거성’(조건이 성숙되면 일은 자연히 이뤄진다)으로 풀린다고 보았다. 결국 북-미 관계에 모든 것을 걸었던 남과 북이 함께 미국에 당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김 위원장은 이번 전원회의에서 “파렴치한 미국이 조-미 대화를 불순한 목적 실현에 악용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불순한 목적’은 트럼프의 재선만을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제시한 요구사항들을 전적으로 수긍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디테일’에서가 아니라 큰 전략에서다. 이제 금방 미-중 무역전쟁의 장작에 불을 지핀 미국이 ‘부저추신’(솥 밑 장작을 뺀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할 리는 만무할 것이다.
북한은, 북-미 대결은 지금 자력갱생과 제재의 대결로 압축돼 명백한 대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미국도 이를 대결로 보는지 여부다. 미국은 사실 북한과 대결을 벌인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자력갱생하든 개혁·개방하든 미국엔 관심사가 아니다. 미국에는 ‘사달’을 일으키는 북한이 오히려 더 반가울 수 있다. 미국은 “핵 문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그 무엇을 표적으로 정하고 접어들 것”(김정은 위원장)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제 미국과 손을 떼고 한국과 등을 지며 고군분투하는 것일까? 북한은 비록 미국의 본심을 파헤쳐보았다고 하지만 트럼프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더러 주제넘게 중재자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트럼프의 재선에 영향을 미치며 ‘트럼프 2기’를 기대하려 할 것이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에 “굴종”한다고 비난하지만 미국과 줄기차게 투쟁해온 북한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도 아니다. 남북한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라는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려면 함께 협력하는 길밖에 없다. 한국이 사즉생의 결단력으로 남북관계의 매듭을 풀려 하면 판세는 금방 뒤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의 창] 갈림목에서 본 북한의 새로운 길 / 진징이
입력 2019.12.08 18:36 수정 2019.12.09 16:46
진징이 ㅣ 베이징대 교수
지난해 북한이 보여준 결정적 변화는 바로 (핵-경제) 병진노선을 종식하고, 경제건설을 국가전략으로 내세운 노선 전환이다. 이 새로운 길은 지난 수십년의 양적 변화가 누적돼 이뤄진 질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이 변화가 북핵 문제 해결과 연동해 큰 울림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북-미 갈등은 다시 2017년으로 돌아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미국이 연말 전에 새로운 셈법을 가져오지 않으면 자기들은 ‘새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새로운 길’이 엄포가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길, 과연 무엇일까?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은 서로 간의 엄청난 차이를 확인했다. 일각에서는 차이를 확인했기에 성과를 거뒀다고 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북·미 모두가 대화의 동력을 잃은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 동력을 잃었다면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큰 전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이 여전히 ‘선 무장해제 후 체제전복’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대북 제재에 매달린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북핵 해결이나 북한 체제전복을 위해 ‘제재 프레임’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제재 프레임은 이미 블랙홀처럼 북한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한국, 일본까지 빨아들여 미국의 동북아 ‘컨트롤’에 일조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이 북핵 문제의 근원인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완전하고도 되돌릴 수 없게 철회를 하기 전에는 비핵화 협상을 논의할 여지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미국은 왜 유독 북한과만 ‘불구대천의 원수’가 돼 집요하게 적대시 정책을 펼치는 것일까? 답은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에 있을 것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는 적대적 관계의 북한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의 가장 큰 전략 경쟁자는 이제 중국이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공포감과 적대의식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다. 그런 중국을 견제하고 억제하려는 ‘인도-태평양 전략’은 어느 정도 긴장을 유발하는 한반도를 필요로 한다. 미국은 그 한반도의 한쪽인 동맹국 한국이 직접 이 전략에 가담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북한은 미국이 북-미 관계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데, 더 큰 이유는 미국의 이 동아시아 전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냉전이 종식된 뒤 중·러와 한국이 수교를 할 때 미국이 북한을 교차 승인하지 않은 원인도 뿌리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결국 북한이 현재 모색하는 ‘새로운 길’이 미국과 새롭게 대결하는 길이라면, 그것은 역으로 큰 틀에서는 미국이 바라는 길일 수도 있다. 북한은 트럼프가 재선을 노리는 내년 대선에서 자기들의 핵·미사일 요소가 선거판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고 그 자체가 오판일 수도 있다.
하노이 회담과 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 이후의 현실은 미국 같은 체제와의 ‘톱다운’ 방식은 만사형통이 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북한은 역대 대통령과 다른 행보를 보인 트럼프에게 큰 기대를 걸지만 트럼프도 미국 전략이라는 여래불의 손바닥을 못 벗어날 것이다. 온 세계를 들쑤시며 다니는 트럼프가 유독 한반도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정의의 화신이 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북한은 연말 전까지를 시한으로 ‘새로운 길’로 가는 활시위를 이미 당겼다. 그 화살이 어느 과녁을 겨냥할지는 연말에 열릴 노동당 7기 5차 전원회의에서 밝혀질 것 같다. 미국이 북한의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을 경우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을 철회하거나 인공위성 발사를 선언하며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 분명 새로운 길은 아닐 것이고 답은 2017년에 있을 것이다.
북한이 수십년간 미국에만 ‘올인’했던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비핵화의 길을 모색할 수는 없을까? 북한이 지난해 내세운 경제발전 전략 노선의 궤도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희망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