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취재후] "6개월 갓난아이까지 학살"..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비밀(2019.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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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19 10:30 조회4,58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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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광복절 특집 다큐 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 (2019. 8. 9)
[취재후] "6개월 갓난아이까지 학살"..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비밀
이정훈 입력 2019.08.15 13:01 수정 2019.08.15 13:01
일왕의 항복 선언.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도둑같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해방의 감격에 전국이 들썩였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한반도를 뒤덮었다.
광복은 오히려 비극의 시작
하지만 화태(현재 러시아 사할린)에서 광복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해방을 맞은 사할린 미즈호 마을. 광복 전까지 강제동원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과 정착한 일본인들은 자주 음식과 옷도 나누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결혼까지 했다. 하지만 광복이 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1945년 8월 20일부터 미즈호 마을은 엿새 동안 생지옥이 되었다.
이웃으로 함께 살던 일본인 민간인들은 조선인들이 '소련의 스파이짓'을 해서 전쟁에 졌다며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이웃이었던 스물일곱 명의 무고한 조선인들이 희생양이 됐다.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나서 사체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소련의 재판 기록에 남아 있던 흐릿한 사진들은 대부분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KBS는 현장 사진과 사체발굴 감정서 등을 토대로 사진을 복원해 당시 잔혹한 현장을 재구성했다. 잔인한 작업이었다. 흐릿한 학살 희생자들의 모습이 그래픽 작업 등을 통해 조금씩 되살아났다. 일가족으로 추정되는 시신들이었다. 세 살, 네 살, 여섯 살, 여덟 살 아이들 네 명. 그리고 이 어린이들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서른 다섯 살 가량의 여성이었다. 사진을 복원해 보니 충격적이었다. 이 여성의 등에는 포대기가 있었고 기저귀를 찬 아기가 있었다. 소련 민정국의 사체 감정 결과 '해방둥이'인 6개월 된 갓난아기였다. 흉부와 국부에 찔린 상처가 선명했다. 가혹한 운명이었다. 다양한 시신을 자주 접하는 법의학자마저도 '매우 잔혹한 범죄'라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패전 후 왜 갓난아이까지 잔혹하게 살해한 것일까?
카미시스카 학살 사건…사라진 일본 경찰
일본이 패망 직후 사할린 조선인을 학살한 대표적인 사건은 미즈호 말고도 카미시스카 사건이 있다. 모두 무고한 조선인들을 잔혹하게 무차별 살해했다.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였다. 카미시스카 학살 사건은 국경 인근에서 피난길에 올랐던 조선인 등 18명을 카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 파출소에서 일본 경찰들이 총살하고 불까지 지른 사건이다. 재판 기록 가운데 학살을 주도했던 일본 경찰들에 대한 체포명령서가 발견됐다. 하지만 세상과 국가의 무관심 속에 학살 가해자인 일본 경찰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74년이 지난 아직도 이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특히 ‘해방둥이’로 태어난 생후 6개월의 갓난아기 등 어린이들까지 '소련 첩자(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부모와 함께 희생됐지만 마지막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학살 진상 규명…정부는 난색
KBS는 학살 관련 증언을 하거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한국과 일본, 러시아 모스크바와 사할린 등지에서 수소문했다. 하지만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때문에 KBS는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러시아 연방 기록관리청과 연방 보안국 FSB(구 KGB) 등을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했다.
수개월의 기다림. 하지만 허사였다. 가장 폐쇄적인 조직으로 악명이 높은 FSB의 문을 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철의 장막은 여전히 높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국 국회와 외교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진행했지만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정부 당국자들은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진상 규명 절차를 시간만 끌면서 제대로 추진하지 않았다. '진상 규명'에 대한 의지도 전혀 찾아보기 힘들었다. 과거 정부 조사단이 일부 진상 규명했던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자료 등도 확인하려 했지만 행정안전부와 국가기록원은 '비공개' 자료라며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기록인지 의문이 들었다.
'제 2의 관동 대지진 학살'
러시아 사할린 현지 취재 일정도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한국과 너무 다른 낯선 문화도 취재진을 괴롭혔다. 빡빡한 일정보다도 취재진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취재 일정 내내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과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었다. 게다가 사할린 현지 취재에 나섰던 때가 현재 러시아 사할린주에 포함된 쿠릴열도 영토 분쟁까지 얽혀 있던 시기라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은 일본과 러시아 양국 사이에서도 모두 민감한 취재였다. 때문에 취재진은 만일의 경우에 억류되거나 촬영본을 모두 압수당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촬영 현장에서는 주변의 수상한 사람을 항상 살피며 불안에 떨며 취재가 진행됐다.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촬영본은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사람에게 맡겨 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통과한 다음에야 되찾았다. 첩보 작전을 방불케 했다.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은 조국을 되찾게 된 시점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우리 정부와 세상의 무관심 속에 희생자들의 명부와 묘지도 찾지 못했다. 아직도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확인되지 않고 진실은 묻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제2의 관동대지진'이라고 했다. 1923년 9월에 발생한 일본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당시“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시간이 흘러 "조선인은 소련의 스파이"로 바뀌었다. 되풀이되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을 누군가는 반드시 기록해야 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 이를 악물었다. KBS는 결국 6개월 넘게 끈질긴 추적을 통해 사할린 조선인 학살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인 미즈호 마을의 조선인 희생자가 애초 알려진 ‘27명’이 아닌 '35명' 에 이른다는 소련의 재판 기록을 찾아냈다.
KBS가 입수한 재판 기록을 보면 "1945년 8월 22일 소련군이 남사할린에 진격하면서 미즈호 마을에서 조선인 성인 남녀와 아이들이 모두 몰살"됐고 희생자수는 애초 알려진 27명이 아닌 35명에 이른다는 내용이었다. 10년 전 정부 조사단은 진상 규명을 통해 미즈호 사건의 희생자가 '27명'인 것으로 결론내렸다. 때문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소련의 재판 기록을 일본어로 그대로 번역한 문건도 확보해 분석한 결과 희생자가 35명 이상이라는 내용이 잇따라 확인됐다. 여러 명의 전문가 의견을 통해 검증까지 했다. 또 갓난아기 등 잔혹하게 조선인들을 살해한 일본인 가해자들의 사진과 범죄 기록 등도 입수하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이로써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전면적인 재조사 필요성이 높아졌다.
학살 이유는? "조선인은 스파이"
사할린의 한 문서보관소에서 오랫동안 묻혀있던 이런 재판기록들이 발견되면서 그동안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 소문처럼 떠돌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그동안 봉인된 진실이었다. 학살 가담자들이 심문조서를 통해 밝힌 살해 이유는 조선인들이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것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재판 기록만으로는 희생자의 정확한 명부도 파악할 수 없었고 유족들 추적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취재진은 조선인이 이미 오래전부터 사할린에서도 일본 비밀 정치경찰의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선인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혔다. 때문에 일본 경찰과 기업 등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에 놓여 스파이로 의심할 만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수많은 조선인들이 스파이 누명을 쓰고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희생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미즈호와 카미시스카 이외에도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당시 에스토루)등에서도 조선인 학살 사건이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하고 관련 내용이 언급된 소련 공식 문서도 입수했다. 당시“소련 군대가 며칠 더 늦게 남사할린에 들어왔다면 훨씬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학살됐을 것”이라는 증언이 잇따랐다.
이중 징용에 징벌방…사할린 미귀환자 '34.3%'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러시아 사할린(당시 일본 화태)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의 미스터리를 현장 추적했다.국내는 물론 러시아와 일본 현지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을 찾아 일제의 조직적 개입 여부 등 실체적 진실을 파헤쳤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수는 최소 만 6천 여 명. 사할린은 다른 지역보다 행방불명 등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미귀환 비율이 34.3%로 매우 높다. 일부는 징벌방(타코베야)에서 강제 노역을 겪고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이중 징용까지 당했다. 사할린 한인은 일본의 강제동원과 귀향길을 막은 소련,이들을 외면한 조국 때문에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동서 냉전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고스란히 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조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도 사할린 곳곳에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남아 있다.
사할린 망부가…디아스포라는 진행형
하지만 사할린 한인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도 아예 빠졌고 제한적인 영주귀국으로 사할린 디아스포라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학살 사건의 전모를 밝혀 희생자의 넋을 달래고 국가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정부는 사실상 진상 규명을 멈췄다.
이제라도 미흡했던 과거 진상 규명을 반성하고 비극적인 학살 사건의 전면적인 재조사가 시급하다. 사할린은 이산과 망향의 섬이다. 울창한 자작나무 숲과 아름다운 바다는 과거의 비극적인 역사마저 잊게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탄광 등으로 강제동원되었고 광복을 맞았지만 소련에 억류되어 한없이 가족과 조국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다.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이처럼 사할린은 우리 역사의 질곡과 슬픔의 틈새 공간이지만 기억에서 쉽게 잊혔다. 오늘도 사할린에서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는 망부가는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피 울음에 국가는 응답해야 한다.
'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
취재진은 “학살 사건을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 숨지고 현장도 사라지고 있어 이번 다큐멘터리가 사실상 사건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탐사 프로그램”이라고 판단했다. 광복이 되고도 국민을 지키지 못하고 이후 학살 사건의 철저한 진상 규명도 하지 않고 있는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했다.
또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해 불편한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시청자에게 보여주면서 사라진 사할린 조선인과 남겨진 사할린 한인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기록하려고 했다. 광복 74주년이 됐지만 사할린에서의 해방은 여전히 미완의 해방이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시간의 무게 앞에 증언이나 증거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힐 진상 규명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봉인된 진실의 문은 언제쯤 억울한 죽음 앞에 열리게 될까?
봉인된 진실과 마주할 때까지 추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할린 조선인 학살과 강제동원을 추적해 세상에 알리고 숨질 때까지 펜을 놓지 않은 일본의 르뽀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는 "권력에 버림받은 이들, 잊힌 이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라고 했다. 비국민과 역적이라는 비난까지 들으며 생명의 위협까지 당한 역사의 치열한 기록자 하야시 에이다이는 "과거의 역사에 눈을 감으면 잘못은 되풀이 된다"고 강조했다. 1965년 수교 이래 최악의 한일관계에서 광복을 맞은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격언이다. 우리가 더 늦지 않게 이제라도 희생자들의 이름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정훈 기자 (hwarang08@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