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 북한·러시아 접경, 하산을 가다]“한국, 나진·하산 프로젝트 재개” “러, 남~북~러 크루즈 띄워보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6-18 13:17 조회5,444회관련링크
본문
[북한·러시아 접경, 하산을 가다]“한국, 나진·하산 프로젝트 재개” “러, 남~북~러 크루즈 띄워보라”
하산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하) 러시아의 한반도, 한반도의 러시아
|김정은 다녀간 흔적을 따라
두만강 철교 별도로 도로 추진
한국행 물동량이 경제성 담보
한국인 관광객 갈수록 증가에
“중국인보다 지출 많아” 고무
지난 7일 오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 한 무리의 북한 청년들이 청사 앞 광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가가 말을 건네니 “오늘 아침에 평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막 도착했다”고 한다. 평양~블라디보스토크 간에는 고려항공이 주 2회 취항하고 있다. 소요 시간은 1시간20분. ‘열차 편으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묻자, 피식 웃으면서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 걸립니다”라고 말했다. 23세라고 나이를 밝힌 한 청년에게 ‘학생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짧게 답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의) 극동연방대학에 다닌다”면서 “전공은 설계”라고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는 불쑥 담배를 갑째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가 건넨 담뱃갑의 상표에 눈길이 꽂혔다. 그것은 ‘평화’였다.
북한 사람들에게 러시아는 ‘기회의 땅’이다. 수만명이 주로 건설노동자와 벌목공으로 러시아에서 일해왔다. 하지만 2017년 12월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에 따라 취업 중인 북한 노동자들은 올해 말까지 철수해야 한다.
러시아는 ‘한반도’를 열망하고 있었다. 지난 4월 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프리모르스키주(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이 강한 인상을 남긴 듯했다. 지난 3~4일 블라디보스토크 롯데호텔에서 KEB하나은행 금융경영연구소(소장 정중호)와 사단법인 유라시아21(이사장 김승동)이 공동주최한 ‘동북아 초국경 경제협력 포럼’에서 만난 러시아인들은 김 위원장의 방문에서 희망을 캐내고 싶어 했다. 북·러 합작법인인 라선 콘트라스의 이반 톤키흐 공동대표(35)는 자신이 ‘셀피’로 담은 김 위원장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젊고 거침이 없는, 오픈 마인드의 지도자였다. 과거의 (사회주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시장을 발전시키지 않았나. 그 시장을 국제 차원으로 넓혀갈 것”이라고 말했다. 알렉세이 스타리치코프 연해주 국제협력국장은 “북한 주민의 생활여건 향상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귀로에 점심 식사를 한 시 외곽의 레스토랑 레스나야 자임카의 종업원 개릭은 러시아 TV방송에서 보도한 스틸화면 사진을 휴대폰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장의 사진과 인상기 외에 김 위원장의 방러가 무엇을 남겼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2일 러시아 국경일(러시아의날)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보낸 축전에서 “우리의 뜻깊은 첫 상봉에서 이룩된 공동인식과 합의들이 풍만한 결실을 거둠으로써…”라며 전략적·전통적 친선관계의 승화를 강조했다. ‘사냥꾼들의 작은 방’이라는 뜻의 레스나야 자임카의 벽에는 2002년 8월2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다녀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러시아가 한반도를 열망하는 것은 전략적, 실리적 이유에서다. 북·중 국경은 1420㎞인 데 비해 북·러 국경은 17㎞에 불과하다. 두만강을 사이에 둔 북한과의 짧은 국경선은 러시아 극동이 한반도와 연결된 ‘기회의 통로’다. 그곳에 한반도 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 횡단열차(TSR)를 연결하고, 가스관을 설치해 천연가스를 한국과 일본으로 공급하는 게 러시아의 오랜 숙원이다. 휴전선으로 대륙과 분리돼 섬처럼 살아온 우리 역시 대륙과의 연결이 긴요하다. 하지만 천문학적 예산이 들어가는 메가프로젝트를 당장 실현할 가능성은 적다. TKR과 TSR 연결을 통해 유럽으로 가는 물류 루트 역시 북극항로라는 대체재 또는 보완재가 등장한 변화를 감안해야 한다.
연해주 방문기간이던 지난 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미국에 맞선 러·중의 견고한 연대를 과시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중국을 경계한다. 공연한 경계가 아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현실주의 정치학자 옌쉐퉁은 아예 내놓고 러시아를 ‘대중국 의존국가’로 분류한다. 저서 <2023, 세계사 불변의 법칙>에서 원유·천연가스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지면서 결국 중국에 기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북·러, 협력 공백 메우기
외교안보·경협은 동전의 양면
어느 나라가 주도하느냐 문제
남·북·러 협력 늦어질까 조바심
러시아, 중국의 역할 확대 경계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하나로 비핵화를 지지한다. 대북 제재 결의를 준수한다. 하지만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와야만 러시아 극동의 번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국은 비핵화를 앞세우는 반면 러시아는 대북 체제 안전 보장을 강조하는 까닭이다. 2000년대 북핵 6자회담에서도 다자안전보장 실무그룹 의장국을 맡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도모했다. 북·미 협상의 완전한 타결 전이라도 남·북·러 협력사업을 진행시키려는 동기가 강하다.
미국 당국자와 전문가들은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종종 “러시아는 ‘공짜 점심(free lunch)’만을 바란다”고 비아냥거린다. 대북 지원 등 금전적 부담에는 관심이 적고,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한반도와의 경협에 더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러시아인들의 한반도 열망은 그들 스스로의 절박한 필요에서 비롯된 것으로 읽혔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재개 안 하면, 중국에 밀려 한국이 빠질 수도 있다”는 협박(?)성 주장은 그만큼 한국의 결정을 고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중국은 러시아 극동에 대한 외국인 투자의 75%를 점하고 있다. 한국, 일본은 1억~2억달러 수준이다(러시아 변호사 프리세키나 나탈리아).
‘동북아 초국경 경제협력 포럼’의 발표 및 토론 내용에는 몇 가지 긍정적인 신호들이 제시됐다. 일부 수십년째 동어반복식으로 되풀이된 구상에는 진부함도 느껴졌다. 남북은 작년 말 경의선(개성~신의주 414㎞)과 함께 러시아와 연결될 동해선(금강산~두만강 777㎞)에 대한 공동조사를 벌였다. 남북 철도 연결은 지난해 4·27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합의사항이다. 레일과 침목에서부터 교량·터널·신호·전력·차량까지 총체적인 문제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안병민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2015년 해외에 원산~금강산 간 철도(118.2㎞) 현대화 투자 제안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부수익률(IRR) 및 순현재가치(NPV), 투자회수기간 개념을 도입했었다”면서 “북한이 글로벌 비즈니스 관행에 적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평가했다.
류혜정 변호사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내린 제재와 관련해 “기업 차원에서 위기 관리는 해야겠지만, 일반적인 기업 활동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고르 흐루쇼프 러시아 교통부 극동지역 총괄국장은 “기존 두만강 철교(조선·로씨야 우정의 다리)와 별도로 자동차 도로의 연내 착공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민간기업이 투자비용을 회수하는 민관 파트너십(PPP) 방식으로 추진하는 도로에 한국행 물동량이 포함돼야 효율성과 경제성이 담보된다고 강조했다.
남·북·러 협력사업이 기어중립 상태였던 지난 몇 년간 러시아 측을 고무시킨 것은 관광 분야였다. ‘가까운 유럽’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2016년 5만명, 2017년 10만명에서 지난해 22만2000명으로 늘었다. 2014년 비자면제 협정 발효와 국내 저가항공사들의 취항이 호재가 됐다. 스타리치코프 국장은 “올해 1분기에만 작년 동기 대비 35% 증가한 데다 관광객 1인당 지출 규모가 중국인 관광객보다 많았다”고 소개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동북아평화특별위원회 위원장은 러시아 측이 블라디보스토크~금강산~속초~부산을 잇는 크루즈의 운항을 주도할 것을 제안했고, 유철호 이코노미21 기획위원은 여기에 원산(금강산) 관광특구 정박 제안을 더했다. 유엔 대북 제재와 무관한 남·북·러 크루즈 아이디어는 러시아 측의 큰 호응을 받았다. 매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열리는 ‘극동페스티벌’에 북한의 조선국립교향악단과 윤이상관현악단을 초청해 남·북·러의 문화 교류를 넓히자는 유 위원의 제안도 관심을 끌었다.
철도·가스 연결과 같은 대규모 선형(線形) 프로젝트와 러시아 극동지역과의 금융협력 등에 관한 논의는 겉돌았다. 예산과 경제성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북핵 문제가 풀리기 전에는 준비와 연습에만 집중하려는 한국 정부의 입장도 작용한 듯하다. 두 개의 선형 계획에는 메가프로젝트를 통해 동북아지역 질서 변화를 추동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경제협력을 통해 외교안보를 바꾸는 구도다. 하지만 지금은 외교안보(한반도 문제) 탓에 경협이 막혀 있다. 신범식 서울대 교수는 “외교안보가 풀려야 경협이 된다는 말도, 경협이 돼야 외교안보가 풀린다는 말도 모두 맞다. 중요한 것은 관련국들 사이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조바심은 남·북·러 협력이 늦어지면, 결국 중국이 주도한다는 데 기인한다. 동북아 전략공간에는 중국 외에 ‘방 안의 코끼리’가 더 있다. 바로 미국이다. 미·중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러시아와 남북한, 일본 등 중간국가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북·중·러 삼각지점에서 중국의 주도권이 강화되면, 필연적으로 동북아 영향력이 줄어들 미국은 중간국가들의 협력을 지연시키거나, 구도가 바뀌기를 기다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신범식 교수)
한국 언론인들이 중국 단둥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및 하산을 찾는 가장 큰 동기는 북한을 건너다보기 위해서다. 두만강에 손이라도 적시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여정이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