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에 날린 '후쿠시마 어퍼컷'..WTO 검투사 산업부 고성민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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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4-22 10:16 조회3,69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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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에 날린 '후쿠시마 어퍼컷'..WTO 검투사로 뜬 예비신부
김기환 입력 2019.04.21 17:10 수정 2019.04.21 18:01
"대한민국서 처음 판결문 읽고 울었다"
전쟁에는 언제나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다. 최근 세계무역기구(WTO)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분쟁 관련 한ㆍ일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승전보를 알려 온 주인공은 산업통상자원부를 주축으로 한 정부 분쟁대응팀이다. 대응팀은 원전 사고 이후 일본 후쿠시마산 수산물에 대해 한국 정부가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리자 일본이 “부당하다”며 2015년 WTO에 제소한 건을 두고 일본과 다퉈왔다. 지난해 2월 1심에서 한국이 진 건을 최근 2심에서 깨끗하게 뒤집었다. WTO의 위생ㆍ식물위생(SPS) 협정 분쟁에서 1심 결과가 뒤집힌 전례는 거의 없다.
산업부에 역전승의 주역 한 명을 꼽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그 사건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끈덕지게 매달려 온 전문가가 있다”며 고성민(35) 산업부 통상분쟁대응과 사무관을 추천했다. 알고 보니 승소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치밀한 전략과 젊은 사무관, 공직자가 중심이 된 소송 대응단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고 격려한 바로 그 ‘젊은 사무관’이었다. 2016년부터 써내려간 그의 역전승 일기를 들어봤다.
2016년 10월. 인사 발령
“철저하게 지구 반대편 WTO 일정에 맞춰야 하는 업무라 밤낮ㆍ주말이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체전’이라 여러 부처와 협업해야 하는데 쉽지만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상대가 일본인데 다들 ‘질 게임’이라고 하는 터라 힘이 많이 빠질 겁니다. 고생하세요.”
그날부로 나는 판결에서 다툴 ‘증거 자료’, 즉 로 데이터(raw data)를 챙기는 업무에 뛰어들었다.
2018년 2월. 1심 완패
“후쿠시마산 수산물의 방사성 물질(세슘) 수치가 위해(危害) 기준치를 넘지 않는다. 다른 국가 수산물과 비교해 특별히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한국 측의 수산물 금지 조치는 과도하다.”
일본은 집요하게 세슘 수치를 물고 늘어졌다. 재판부는 일본 측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원전 사고 후 수산물이 가질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검역 과정에서 걸러내는 건 정부의 정당한 권리”란 한국 측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땐 몰랐는데, 일본에 지고 나니 더 확실하게 알겠더라. 내 일이 국민적 관심사였다는 것을. “후쿠시마산 수산물 먹게 생겼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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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논리의 칼을 갈다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완패’한 1심을 뒤집을 치밀한 논리를. 1심이 사실관계만 따지는 ‘사실심’이라면 2심은 법률만 따지는 ‘법률심’이다. 1심 주장을 그대로 밀어붙였다가는 질 게 뻔했다. 상대 주장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했다.
한국은 일본의 인접국인 데다 원전 사고란 특수한 사정이 일어났다는 점 때문에 수입 금지 조치가 불가피했다는 점에 집중하기로 했다. 1심에서 한국이 주장한 모든 요소를 다 살펴야 했는데 세슘 수치만 갖고 판결한 것은 부당하다는 점도 부각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 자료를 만들면서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솔직히 ‘외교의 달인’인 일본과 식품 분쟁에서만큼은 가혹하리만치 제소국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WTO가 두려웠다. 특히 WTO는 식품ㆍ위생 관련 분쟁 40여 건에서 피소국 손을 들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원정전에 오르는 군인의 심정으로 제네바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8년 12월. 쌍무지개 전투
재판 당일 WTO 사무국 위로 ‘쌍무지개’가 떴다. 일행 중 누군가 “우리,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는데 2심에서 이길 거란 징조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재판정에서 일본 측 정부가 모두 발언을 마친 순간, 뭔가 우리 측 짐작대로 돼가고 있다는 예감이 왔다. 데이터가 풍부하고, 논리에도 막힘이 없었지만 1심과 다를 게 없는 주장이었다. 혹시 일본이 방심한 걸까. 이대로라면 가능성은 적지만 한 줄기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2019년 4월 12일. Reverse
“제가 판결문 제대로 읽은 게 맞지요? 우리 이겼어요!”
서울로 올라가는 KTX에서 전화를 받은 김 사무관은 “우리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 너무 고맙다”며 울먹였다.
4월 21일. 에필로그
요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역전승’ 경과에 대한 보고서를 써야 했고, 국회 보고를 다녀왔다. 총리 공관에서 총리와 식사하며 격려도 받았다. 2심이 최종심이라 다 끝난 전쟁이긴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한국에 수입 금지 해제를 계속 요구하겠다”며 압박을 거듭하고 있다. 확실한 ‘마무리’를 지을 일만 남았다.
인터뷰하면서 처음 공직에 들어선 길을 떠올리게 됐다. 제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법대, 미국 워싱턴주립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2012년 뉴욕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던 일, 잠시 미국에서 법조인으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2014년 5월 산업부에 특채로 들어온 일이 떠올랐다. 정부를 대표하는 국제통상 전문가가 되겠다는 당찬 꿈에 차근차근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며칠 뒤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부’란 것도 종종 깜빡한다. 어쩌면 나는 나라와 사랑에 빠졌나 보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 김기환의 나공
「 [나공]은 “나는 공무원이다”의 준말입니다. 세종시 경제 부처를 중심으로 세금 아깝지 않게 뛰는 공무원ㆍ공공기관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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