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소식

홈 > 소식 > 자료실
자료실

"개성에 이산가족 상봉지구 만들어 '민족의 한' 풀어주길" (2020. 6. 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6-02 09:30 조회1,592회

본문

한겨레

"개성에 이산가족 상봉지구 만들어 '민족의 한' 풀어주길"

김경애 입력 2020.06.01 15:59
'한' 가슴에 묻고 사는 유일한 민족
사람의 기본 권리 '사랑권' 빼앗겨
구한말 만주·연해주 '자발적 유민'
일제·분단·전쟁으로 '강제 이산'
죽의 장막·철의 장막 '냉전'에 막혀
"영문도 모른 채 기약 없는 생이별"
1980년부터 해마다 방학때 중국으로
흑룡강성·장춘·연변 일대 동포들
이산가족 사연 취재·동영상 촬영
"눈물 쏟아져 제정신으로 찍지 못해"
고령 어르신 '부친 찾아달라' 오기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라도 알고파서"
유복자 딸 키우며 남편 기다린 할머니
'남쪽 남편 새가정' 충격에 세상 뜨기도
"가족 만나는데 추첨 경쟁 웬말인가"
남북한은 1971년 8월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 실무요원 접촉을 했다. 남쪽 요원 이창렬(왼쪽 둘째)·윤여훈(왼쪽 넷째 모자), 북쪽 요원 서성철·염종련이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길을 찾아서 31회-이산가족의 한과 설움(2)
박한식 교수는 1980년부터 비수교국 ‘중공’을 방문할 기회를 활용해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던 이산가족 상봉을 주선하기 위해 애썼다. 흑룡강성 하얼빈을 비롯해 심양, 연변 일대를 돌며 직접 동영상으로 찍은 재중동포들의 사연을 1983년 9월25일 <한국방송>(KBS)의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소개하기도 했다. 사진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이산가족의 아픔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만큼 이산가족의 사무친 한을 가슴에 묻고 사는 민족이 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을까? 우리 민족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한이 많다 또는 한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고 흔히 말한다. 한의 정확한 의미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산가족의 애달픈 삶을 보면 한이 무엇인지 조금은 헤아릴 수 있다. 내가 55년을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영어에는 우리말의 ‘한’이라고 하는 정서를 표현하는 단어는 없는 것 같다.

조선 망국과 미소 냉전 그리고 분단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는 셀 수 없이 많은 가족을 이산의 고통으로 내몰았다. 물보다 진한 핏줄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한은 인간 존엄과 인권의 문제다. 인간이 단지 생물학적인 존재를 넘어서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사랑권’이라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과 따뜻한 밥 한끼 하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사소한 권리와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산가족들의 한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1983년 9월25일 <한국방송>(KBS)의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소개된 박한식 교수의 동영상. 사진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이산가족의 내력은 크게 두 가지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유민)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강제 이산이다. 나라 잃은 설움에다 생존을 위해 많은 조선인들이 간도를 비롯한 지금의 중국 동북 3성과 러시아의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했다. 먹고살기 위해 이주했던 농민들도 많았고 항일운동에 투신했던 독립투사들도 상당수였다. 또한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던 많은 조선인들도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할린에 버려졌던 우리 동포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일제의 패망과 해방 소식은 국경 넘어 살던 조선인들에게는 기쁨과 환희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도 힘겨웠던 그들의 삶만큼이나 녹록지 않았다. 귀향을 결심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가족 전체가 한꺼번에 돌아오기보다는 주로 가장이 먼저 귀국해서 호구지책을 마련한 뒤에 가족들을 데려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에서 가족의 생계와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38선이 그어지고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죽의 장막’(중국)과 ‘철의 장막’(소련)이 드리워졌다. 조선 땅에 돌아와 있던 사람들도 국경 밖에 있던 가족들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오랜 시간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산가족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집안도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친지들을 모두 중국에 남겨두고 나의 가족만 조선 땅으로 나왔다. 그렇게 오래 이산가족의 삶을 살게 될 걸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 가족이 다 조선 땅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지난 ‘길을 찾아서’ 30회에서 얘기했듯이, 나는 1980년부터 거의 해마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중국 흑룡강성, 장춘, 그리고 연변 일대를 방문해 이산가족 동포들의 삶과 사연을 듣고 기록하고 촬영했다. 한여름에 그 무거운 ‘베타맥스’ 카메라를 메고 산 넘고 물 건너 오지까지 우리 동포들이 거주하는 전역을 누비면서 이산가족을 인터뷰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분들 가슴에 사무쳐 있는 이산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 싶었다. 한은 맺히기도 하지만 당연히 풀리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한은 그저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절대 풀어지지 않는다. 오직 서로 만날 때에만 풀어질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이산가족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는 내내 나는 한 번도 제정신으로 촬영해본 적이 없다. 동병상련의 처지를 느끼며 항상 눈물을 줄줄 흘렸기 때문이다.

1983년 9월25일 <한국방송>(KBS)의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소개된 박한식 교수의 동영상. 사진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40년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이산가족의 사례를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하얼빈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홀로 거주하던 어르신의 이야기이다. 다른 가족들은 다 돌아가시고 남쪽에 흩어져 있는 가족을 찾고 싶다는 사연이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메고 찾아갔더니 연세가 아흔이 넘은 백발의 노인이 오두막집 지하실 같은 컴컴한 방에 거동도 잘 하지 못하는 상태로 누워 계셨다.

부축을 받아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앉은 어르신에게 나는 ‘누구를 찾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영감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의 아버지를 찾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냥 입에서 나오는 말로 “어르신께서 아버지를 찾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바로 들었으면 아버님께서 연로하셔서 지금 돌아가시고 생존해 계시지 않을 텐데…”라고 대꾸하였다. 그랬더니 이 어르신은 “생사에 관계없이 돌아가셨으면 무덤이라도 가서 보고 싶고 돌아가신 거라도 확인을 해야 내 맺힌 한을 풀 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르신의 말씀에 큰 감동과 울림을 받았다. 나는 촬영한 영상을 사연과 함께 <한국방송>(KBS)에 보냈다. 그 뒤에 어르신이 아버님의 생사를 알게 됐는지 또는 만나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르신이 아버님 무덤 앞에 술 한잔 부어드리고 절을 올리고 목 놓아 울면서 조금이나마 한을 풀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번째는 내가 이산가족을 위해 사진과 비디오를 촬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머물고 있던 고모님 댁으로 직접 찾아오신 할머니의 사연이다. 할머니는 40년 넘게 헤어진 남편을 찾고 있다고 했다. 마흔이 넘어선 딸과 사위가 같이 왔는데 딸이 태중에 있을 때 남한으로 떠났던 남편은 38선이 생기면서 서로의 생사를 궁금해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남편의 건강과 가족의 재회를 빌고 있었다. 할머니의 사연이 하도 기구하여 나는 더욱 정성껏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한국방송>에 제공하였다. 할머니의 사연이 방영된 뒤, 나는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캐나다에서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할머니가 그렇게 애타게 찾고 계시던 바로 그 남편이었다. 한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는 얘기와 함께 그동안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얘기인즉, 20대 시절 남한에 와서 분단과 냉전으로 오도 가도 못하고 흑룡강성에 두고 온 부인과 뱃속의 아이도 만날 기약도 없고 해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지내다가 뒤늦게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됐다는 것이었다. 두어 번의 전화 통화에서 남편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조언을 구했고 나는 “선생님께서 결정을 하십시오”라고 답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할머니의 주소와 연락처를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 이듬해 내가 다시 흑룡강성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와 딸 그리고 사위가 나를 만나러 찾아왔다. 남편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듯 보였다. 차마 할머니와 딸에게는 남편 소식을 직접 전하지 못하고 사위를 밖으로 따로 불러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사실대로 전해주었다. 사위는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겠다고 하였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해에 내가 다시 고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딸과 사위가 나를 보러 왔는데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사위로부터 남편 소식을 전해 듣고 상심하여 두문불출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워 지내다가 돌아가셨던 것이었다. 평생 남편을 그리워하며 다시 상봉할 날만을 손꼽아 학수고대하다 한 맺힌 생을 마감한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산가족의 삶에 관해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것은, 헤어져서 사는 것도 한스럽고 슬픈데 남쪽에 정착한 이산가족들은 엄청난 정치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는 점이다. 공산권 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로 또는 공산권 국가나 북한에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평생 이들에게 새겨져 있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남한에 정착한 내 아버지 역시 빨갱이라는 족쇄로 인해 늘 신원조회에 걸려 평생 변변한 직장 한 번 가지지 못한 채 살다가 돌아가셨다. 이 문제에 있어서 북한도 남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출신 성분을 특히 중시하는 북한에서 남한에서 왔다거나 남한에 가족이 살고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큰 걸림돌이다. 이렇듯 이산가족들은 남북한 모두에서 이산의 고통과 정치적 박해를 동시에 안고 살아왔다.

1990년 한-소 수교 그리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로, 한국과 옛 공산권(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을 포함하여)에 흩어져 살던 이산가족들의 상황은 많이 좋아졌다. 왕래도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예전과 달리 마음만 먹으면 그리운 가족들을 상봉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남북한 사이의 이산가족이다. 지금 남북한 정부 모두에게 최우선시되어야 하는 지상과제는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자의로 또는 타의로 헤어지고 뿔뿔이 흩어졌던 남북 이산가족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이산가족의 인간적 아픔을 공감하고 해소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1년 남북 적십자 회담에서 남과 북 모두 “남북 이산가족들의 비극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는 데 공감하고 빠른 시일 안에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자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9월이 되어서야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성사되었다. 한동안 뜸했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8월에야 재개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총 21차례의 이산가족 상봉과 7차례의 화상 상봉이 진행되었다.

내 눈에는 지금까지 진행됐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정치적인 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남북한 위정자들이 이산가족에 대한 진정 어린 공감과 배려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작금의 이산가족 만남 제도는 이산가족의 한을 더 키우는 제도다. 나는 이산가족 상봉에 관해 3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 가지 정책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가장 최근에 있었던 2018년 8월 이산가족 상봉의 예를 보자. 약 5만7천명의 상봉 신청자 가운데 100명을 컴퓨터 추첨을 통해서 선정했다. 자그마치 570 대 1의 경쟁률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로또도 아니고 대학입시도 아니다. 70년 넘게 그리워해온 가족을 만나는데 경쟁률이 웬말인가. 언론 기사를 통해 접한 한 어르신의 이야기는 슬픔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95살의 할아버지는 “북에 형과 동생을 두고 왔다”며 “살아 있다면 93살이 됐을 여동생에게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듣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추첨에서 탈락했고 “저는 이제 끝났어요”라는 말과 함께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남북한은 1972년 8월29일 평양에서 첫 적십자회담을 열었으나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9월20일에야 성사됐다. 이날 광복 40돌 고향방문단 50명씩이 동시에 판문점을 통과해 서울과 평양을 교차방문했다. 사진은 서울 워커힐호텔의 모자 상봉 장면이다. 사진 국가기록원

둘째, 2000년 이후 가뭄에 콩 나듯 진행됐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모두 그 기간이 짧게는 3일, 길어야 5일이었다. 특정 장소에서 가족이 만나 그것도 남북 당국자들의 감시(?)하에 하루에 서너 시간 같이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꿈같던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느껴졌을까? 고작 사나흘의 만남으로 70년 넘게 떨어져 살아온 이산의 아픔과 한이 달래질 수 있을까?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아니,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 없는 또 한 번의 생이별을 해야 하는 이산가족의 한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셋째, 이산가족의 상봉은 절대 정치적인 이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북 간 또는 북-미 간에 정치적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적이 심심찮게 있었다. 이산가족 문제는 인도주의적 사안이며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영역이다. 더욱이 일회성 정치적 행사로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이산가족 상봉은 구걸의 대상도 아니고 남북한 정부가 이산가족들에게 선심 쓰듯 적선하듯 베푸는 정책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6·15 첫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화해 지금까지 21차례 진행됐으나 여전히 남쪽에만 5만7천여명이 상봉 대기 중이다. 2018년 8월 상봉을 앞두고 570 대 1 경쟁률의 추첨에서 탈락한 95살 박성은 옹이 낙담한 모습이다. 사진 YTN 갈무리

보다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선택적, 일회성, 그리고 정치적으로 일관됐던 지금까지의 상봉 방식을 지양하고 언제나 아무 조건 없이 자유로이 이산가족들이 만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이산가족 1세대는 모두가 80살 이상의 고령이다. 나는 이산가족 정책은 통일 정책의 하나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성에 이산가족 상봉 지구를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개성에 아파트 수백채를 지어 이산가족이 상시적으로 만나 생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일주일도 좋고 한달도 좋고 원한다면 거기서 이산가족이 평생 같이 살면서 한을 풀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 개성 이산가족 상봉 지구는 통일 문화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할 것이며 우리가 꿈꾸는 통일의 첩경이자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브라우저 최상단으로 이동합니다 브라우저 최하단으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