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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외교문서 37만쪽 비밀해제(2024. 3. 39.)-공개된 외교문서에 나타난 한국 정부의 친미 사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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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4-08 11:44 조회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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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된 외교문서에 나타난 한국 정부의 친미 사대성


기사입력시간 : 2024/04/08 [10:31:00]

이영석 기자

공개된 1993년 외교문서의 내용

 

외교부는 지난 3월 29일 1993년 외교문서를 30년이 지나서 공개했다.

 

공개한 문서를 보면, 당시 진행 중이던 북미 핵 협상에 영향을 미칠까 봐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와 관련한 1950년대 외교문서를 공개할지 말지 고민한 것을 알 수 있다.

 

외교부가 1993년 당시 주미대사관과 국방부 등에 공개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관계 기관들이 답변을 줬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주미대사관은 1993년 10월 19일 당시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를 기술한 문서를 공개하면 “한미 양국이 지금까지 견지해 온 한반도 핵무기 배치 관련 NCND(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정책에 어긋난다”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또 “북측이 이를 한반도 핵문제 야기의 책임소재에 관한 선전자료 내지 주한미군기지 사찰 주장의 근거로 내세울 개연성이 매우 크다”라며 “최소한 북한 핵문제 해결 시까지는 동 관련 문서 일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국방부도 “최근 북한 핵문제가 최대 안보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50년대 말부터 이미 주한미군에 핵무기가 배치되었다’는 사실의 공개는 남북회담이나 미북 핵협상 과정에 부정적 파급효과가 예상외로 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1957년 당시의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에 언급된 “대한민국에 의한 무력통일” 즉 “북침통일”을 가정한 문건을 거론하며 “동 문서가 공개될 경우 평화적 통일을 공약하고 있는 우리 정부의 대내외적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게 남북대화 중단과 모험적 도발 등의 구실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주한미군 핵 관련 내용이나 북침통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외교문서들은 북한 핵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거나 남북대결 구조가 해소된 이후에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1993년 북미 핵대결 상황

 

1993년은 1차 북미 핵대결이 첨예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1991년 남북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북한은 그 이후 1992년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했다.

 

1992년 5월 25일부터 1993년 2월 6일까지 6차례에 걸쳐 사찰이 진행되었는데, 국제원자력기구가 갑자기 신고 목록에 없던 영변의 2개 시설이 핵폐기물 저장 장소로 의심된다며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주권 침해라며 특별사찰을 거부했고,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강제하기 위해 1992년에 중단한 팀 스피릿 한미연합훈련을 1993년에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북한은 1993년 3월 8일 준전시 상태를 선포했고, 12일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됐으나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 탈퇴 발효시일 하루 전인 6월 11일 뉴욕에서 열린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이 탈퇴를 유보하기로 미국과 합의하면서 고비를 넘겼다.

 

북미는 1994년 10월 미국 등이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해 주고, 북한은 핵시설을 동결한다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를 했다.

 

한국 정부의 친미 사대적 입장

 

1차 북미 핵대결 당시 김영삼 정부의 대북 정책은 미국 강경파에 동조하는 태도가 강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카터의 방북을 고깝게 봐, 카터에게 “대통령 때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인물”이라며 “북한의 선전에 놀아날지도 모른다”라고 비난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93년 외교문서를 통해 당시 외무부, 주미대사관, 국방부 할 것 없이 한국 정부의 친미적 태도가 농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한국 정부가 한반도 핵무기 배치 관련해 미국의 NCND 정책에 동조하고 있다.

 

공개된 1950년대 외교문서를 보면, 한반도에 핵무기를 들여와 위기를 조장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미국은 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북한 핵만 문제 삼은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미국의 이러한 정책에 동조함으로써 민족 협력보다 친미 동조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 사실이 알려지면 협상이 북한에 유리하게 되고, 미국에 불리하게 될까 봐 한국 정부가 그 사실을 숨긴 것이다.

 

북한이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 사실을 알게 되면, 이를 한반도 핵문제 발생의 근본 원인으로 몰아가거나 주한미군기지 사찰 주장의 근거로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미 핵협상에서 북한의 주장에 정당성과 힘이 실리게 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2023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1991년 12월 북한을 방문한 스티븐 솔라즈 당시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에게 국제원자력기구의 영변 핵시설 사찰과 자신들의 주한미군기지 사찰을 맞바꿀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보아, 1993년 당시 한미 정부 당국은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 사실이 공개되어 북한이 주장한 북미 동시 핵사찰이 쟁점이 될까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가 북미협상을 대하는 입장은 공개된 외교문서에서 “남북회담이나 미북 핵협상 과정에 부정적 파급효과가 예상외로 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미국을 편드는 데서도 기본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당시 한국 정부에서 이전 정부의 북침통일 문건을 언급한 내용을 보면 단지 이전 정책이 아니라 당시에도 유지되고 있는 정책일 수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북침통일정책을 작성한 시기인 1950년대에는 그랬지만, 당시 문민정부는 평화적 통일을 공약한다고 발표하면 됐을 문제다.

 

그런데 굳이 지난 문서를 숨기면서까지 문서가 공개됐을 때 ‘정부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될 것을 걱정하는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또 ‘북한에 남북대화 중단과 모험적 도발 등의 구실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을 걱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 사실을 먼저 인정하고 이제 철수했다고 발표하거나 혹은 문민정부는 북침통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를 하면 남북이 일찍 화합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당시 친미, 의존적인 태도를 지니고 북미 핵대결 속에서 남북 대결 정책을 일관했다.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한국 정부의 친미 사대성은 여전히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93년 외교문서 37만쪽 비밀해제…1차 북핵위기 막전막후


송고시간2024-03-29 09:00

북핵 문제 태동기 북미 협상 뒷얘기…소련의 KAL 격추사건 재조사 문서도

1993년 케네스 퀴노네스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 방북 당시 북한 김계관 외교부 순회대사와의 논의 내용 등을 담은 외교문서 [외교부 제공]

1993년 케네스 퀴노네스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 방북 당시 북한 김계관 외교부 순회대사와의 논의 내용 등을 담은 외교문서 [외교부 제공]

(서울=연합뉴스) 김효정 현혜란 김지연 기자 = 현재까지도 한반도 안보 환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북핵 위기의 '태동기' 북미 협상 비사가 담긴 1993년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외교부는 29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2천306권, 37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다.

정부는 국민 알권리 보장과 외교 행정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생산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매년 공개하고 있다. 올해 공개된 건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제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 1993년도 문서 중심이다.

1993년 3월 북한의 NPT 탈퇴로 촉발된 위기를 봉합하기 위해 당시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이 뉴욕과 제네바에서 1·2단계 고위급 회담을 가지며 팽팽한 외교 대결을 벌인 기록이 담겼다.

북한이 핵을 두고 미국과 담판을 벌이기 시작한 초기에 어떤 체제 안전 보장안 등 반대급부를 얻어내려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김영삼 정부와 빌 클린턴 미 행정부가 대북 협상 방안을 조율하면서 북미대화와 남북대화를 어떤 순서로 추진하고 서로 추동시킬 것인가를 치열하게 논의한 과정도 드러난다.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서명하는 모습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서명하는 모습

(서울=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TV가 지난 2018년 2월 23일 방영한 새 기록영화 '어머니당의 품' 제5부에서 강석주 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서명하는 모습.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

1993년 북핵 협상 기록은 이듬해인 1994년 한반도 전쟁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역사적인 북미 '제네바 합의'를 탄생시키기에 앞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북미 핵 협상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주한미군 핵무기 배치와 관련된 1950년대 외교문서의 공개 여부를 두고 당시 정부가 고심했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1983년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KAL) 여객기 격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가 한소 수교 이후인 1992∼1993년 진행된 기록도 담겼다.

1992년 9월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방한을 앞두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KAL기 블랙박스 내용을 포함한 사건 관계자료를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며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블랙박스의 존재를 알렸다.

한국 정부는 블랙박스 원본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옐친이 이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넘기겠다고 입장을 바꾸면서 진땀을 빼야 했다.

이밖에 1993년 개최된 대전세계박람회(대전엑스포) 조직위가 북한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단계별 계획'을 짰던 내용 등이 공개됐다. 다만 북한의 대전엑스포 참여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볼 수 있다. 6월 이후에는 '공개외교문서 열람청구시스템'을 통해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다.

kimhyoj@yna.co.kr

 

[외교문서] "커브볼같이 들어온 경수로 제안"…북의 NPT 탈퇴를 막아라


송고시간2024-03-29 09:00

1차 북핵위기 막전막후…김일성 "핵무기 만들 이유도 돈도 없다", 김영삼 "거짓말"

북미가 1994년 제네바 합의 당시 서명하는 모습.
북미가 1994년 제네바 합의 당시 서명하는 모습.

[조선중앙TV=연합뉴스 자료사진.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서울=연합뉴스) 김효정 김지연 기자 = "경수로 문제가 야구 시합으로 비유한다면, 초구로 들어온 커브볼처럼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북측의 제안은 핵 비확산을 향한 진척(development)으로 볼 수 있으므로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본다"(1993년 7월 19일 2차 북미 고위급 회담 합의 후 미국 평가)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제1차 북핵 위기' 속 북미의 치열한 수싸움이 당시 문서를 통해 공개됐다.

29일 외교부가 공개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에선 북한을 NPT에 묶어두기 위한 미국 정부의 외교 노력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핵과 안전보장의 교환'이라는 북미 협상의 기본 구도가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이기도 했다.

북미 2차 고위급 회담 합의에 처음 담긴 '경수로 지원' 문제는 이듬해 한반도 전쟁 고비를 넘겨 어렵사리 성사된 3차 회담에서 역사적 '제네바 합의'의 핵심 사항이 됐다.

◇ "경수로, 중요한 돌파구 될 것"…갈루치의 기대

북한은 영변의 미신고 핵시설 2개소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압력과 한미의 팀스피릿 훈련에 반발해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은 애초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과 고위급 접촉을 하는 건 "당분간 고려하지 않을 것"(3월 26일 한미 외무장관회담)이라는 입장이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중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중국이 권유해온 대북 고위급 접촉을 수용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6월 2∼11일 미국 뉴욕에서 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렸다. 후일 제네바 합의까지 북미협상을 이끈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이 대표로 나섰다.

난항을 이어가던 협상은 6월 7일 북한의 요청으로 케네스 퀴노네스 당시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과 리용호 북한 외교부 국제기구국 부국장(후일 외무상·외교문서에는 '이영호'로 표기) 실무접촉을 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실무접촉에서 북측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미국의 지원, 내정불간섭, 자위 경우를 제외한 무력불행사,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지지의 4개 항이 포함된 북미 공동성명을 채택하는 조건으로 NPT 탈퇴 결정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했다. 나흘 뒤 북한의 NPT 탈퇴 유보와 미국의 무력 불행사 등을 담은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한 달여 뒤인 7월 14∼19일 제네바에서 열린 2차 고위급 접촉에서 북한은 "현재 가동 중인 모든 흑연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 데 미국이 협조한다면 모든 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의를 내놓았다.

1993년 7월 2차 북미 고위급 회담 합의 후 미국 측 평가가 담긴 외교문서
1993년 7월 2차 북미 고위급 회담 합의 후 미국 측 평가가 담긴 외교문서

[외교부 제공]

갈루치 차관보 등 미국 협상팀은 이 제안이 돌파구로서 상당히 유용할 수 있다고 평가했던 것으로 외교문서에 드러난다.

북한은 경수로 제안이 '김일성의 구상'이라며 "현재 운용 중인 원자로, 건설 중인 원자로 및 핵무기 관련시설(재처리시설)을 모두 폐기할 용의"를 표했다고 갈루치 차관보는 합의 타결 후 주제네바 한국대사에게 설명했다.

갈루치 차관보는 이후 한승주 외무장관과 통화하면서 "작지만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며 "경수로 문제는 미국이나 한국 정부에 하나의 중요한 돌파구(significant opening)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의구심도 드러냈다. 제네바 현지에 체류하던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은 북한 측이 경수로 방식 전환 문제를 들고나온 것은 "지연전술 책동이 아닌지" 우려를 표했다.

◇ "NPT 영구 잔류-관계정상화'…김계관이 손으로 써 건넨 '일괄타결안'

2차 회담 이후에도 IAEA 사찰 등 핵 문제엔 진전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10월 개리 애커먼 미국 하원 외무위 동아태 소위원장의 방북이 또 다른 분기점이 됐다.

애커먼 소위원장을 수행한 퀴노네스 담당관에게 평양 출발 직전 북한 김계관 외교부 순회대사(후일 6자회담 수석대표)가 '손으로 정리'해 전달한 메모엔 북측이 제시하는 '일괄타결 방안'이 담겨 있었다.

북한의 ▲ NPT 영구 잔류 ▲ 특별사찰 포함 IAEA와의 완전한 협력 등과 미국의 ▲ 핵무기 등 무력 불사용 법적 보장을 포함한 평화협정 체결 ▲ 외교관계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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