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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립화] 3.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 중립화 외교를 실행한 선구적 통치자 (양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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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9-05 12:45 조회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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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코리아 2024 가을호

<커버스토리: 한반도 중립화> 

1. [담론의 부활] 중립국 담론, 죽임을 극복한 부활의 기적 (김성해)

2. [한미동맹] 전쟁위험 키우는 한미동맹 (문장렬) 

3. [고종의 외교] 고종 황제, 중립화 외교를 실행한 선구적 통치자 (양재섭)

4. [평화와 자주] 한국 중립화를 통해 통일의 길로 (이영재) 

5. [중립화 통일]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의의 (정지웅)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 중립화 외교를 실행한 선구적 통치자

 

 

 

양재섭 대구대 명예교수. 한국중립화추진시민연대 공동대표 peace-essayist@kakao.com

 

 

한반도에 평화로운 통일코리아 중립국을 건설하고 동북아시아와 세계로 평화를 펼쳐나가는 꿈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뜬금없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아련한 ‘중립국의 추억’이 있다는 말이다. 인구 900만의 조그마한 중립국 스위스만큼 긴 역사는 아니라 해도 한반도 중립화 논의의 역사는 그렇게 짧지 않다. 홍익인간의 고귀한 건국 이상을 가진 단군의 후예로서 동북아시아의 광활한 강역을 무대로 시대를 호령했던 전통을 상기하면서 생명과 평화와 통일의 이상이 온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 문을 열어본다. 

 

1. 세계만방에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선언한 고종 황제

대한제국이 출발(1897.10.12)한 지 7년쯤, 제국의 황제 고종은 세계만방에 대한제국이 중립국임을 선포하였다(1904.1.21). 한반도 침탈 야욕을 품은 일본제 국의 마수(魔手)가 이미 국내 정치에 깊숙이 들어와 지배력이 행사되고 있었기에 모든 정보가 비밀을 유지하기 극히 어려운 극한상황이었다. 고종의 절대적 신임 아래 내장원경 겸 탁지부대신서리인 이용익이 중립 정책의 수립과 실행의 중대한 책임을 담당하였는데 벨기에 고문,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계통의 외국어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국외 중립선언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중립 정책에 호의적이었던 프랑스공사관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어로 된 선언문을 준비하고 중국 산둥반도의 즈푸 (芝罘)로 이동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 전 세계를 향해 전시 중립 선언을 타전하였다. 실제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어떤 전쟁에도 중립으로 일관하겠다는 대한제국의 의지를 표현한 적극적이 고 대담한 외교 행위였다.

그런데 그중 몇 개국이 접수 사실을 알려와 외교적 승인을 한 것으로 오해하고 고무되기도 했지만 막 상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는 미국, 일본, 러시아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사실상 거부한 셈이 되었다. 실제로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할 경우에 엄정중립을 지키겠다는 전시중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중립선 언은 어느 나라의 지지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고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 인 두 제국의 전쟁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고 (1904.2.8) 전시중립 선언은 허사가 되었다. 

그러나 한 제국의 최고 통치권자인 황제의 이름과 권위를 가지고 다양한 외교 채널을 통해 시행하였던 ‘중립화 선언’은 1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어 교훈으로 간직할 만하다. 또 전쟁의 위협과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탐욕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중립 국으로 가는 길은 온 국민이 가슴 깊이 아로새기고 추진하여야 할 책무가 아닐 수 없다. 정말정말 아주 쉬운 말로 줄여본다면 스위스처럼 “전쟁하지 말고 평화스럽게” 살아보자는 소박한 표현이다. 

따라서 고종 황제가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어떻게 중립국가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였는지는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다. 한반도에서의 중립화 방안은 “대한”제국의 시작과 역사를 함께하는 유서 깊은 정책이자 평화 국가 건설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분단국가의 아픔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더욱 간절함으로 다가온다.

 

2. 고종 황제의 야심 찬 대한제국 건설과 대한민국의 뼈아픈 분단 상황

19세기 후반 서양의 물결이 한반도를 향해 조수처럼 밀려와 한편 공포스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 어쩌면 흥미롭기도 한 분위기에서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조선의 26대 왕위(1864.1.21)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넘어 나이도 20대에 접어들고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실권을 확립해 가면 서 차츰 외세에 대한 대처 능력을 함양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개항을 실시하여 차례로 조일수호조규 (강화도조약, 1876, 고종 13년), 조미수호통상조약 (1882, 고종 19년), 조영수호통상조약(1883, 고종 20 년) 등을 체결하면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여기서 잠깐 고종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대해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아마 독자들께서도 동의하실 것이다. 우리가 대체로 알고 있는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나라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결국 나라를 망친 천하의 무능하고 몹쓸 군주 로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는 인간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 여러 학자의 깊은 연구에 의해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 태학 사, 2000)이 이뤄지면서 억울하게 뒤집어쓴 누명과 오해가 벗겨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일간신문이나 대중 월간 잡지 같은 곳에 실려 얼렁뚱땅 주장하는 편향성의 글이 아니라 전문 학자들이 당시의 문헌과 사료를 심도 있게 연구한 결과를 전문학술지 에 실은 논문들이어서 기본적으로 신뢰성을 갖췄다 고 할 수 있다. 고종의 명성과 평가가 그렇게 왜곡된 데는 일제의 침략을 위한 고도의 치밀하고 야비한 술수의 기제가 숨겨져 작동되었다는 결론이다. 이 글의 목적이 고종의 재평가는 아니기 때문에 대한제국 시대 고종 황제의 중립화 노력에 대한 본 주제로 다시 돌아가 역사적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계속 하고자 한다.

앞서 쓴 바와 같이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국외에 중립을 선언하고 한반도에서의 전쟁 방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멀리는 서양 열강들과 가까이는 중국, 일본, 러시아가 호시탐탐 조선을 넘보는 냉엄한 국제정세의 흐름에 대비하여 국권 침탈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500여 년 면면히 이어온 조선과는 정체성이 확연히 다른 대한제국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 대한제국 선포 직전 조선에서 개화의 분위기는 대체로 역사적 전통과 사상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대한제국은 여기에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덧붙여 새로운 것을 추구하되 항상 옛것에 대한 관심을 싹둑 잘라버리지 않는 균형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자산을 중히 여기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신의 바탕 위에 새로운 나라를 다스리는 국정지표를 염두에 둔 야심만만한 출발이었다. 

그렇기에 분단국가로 80여 년을 살고 있으면서 또 상시적 전쟁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 대한민국 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중립화에 대한 외 교 노력을 눈여겨보고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지 질문하여야 할 것이다. 고종 황제 외교정책의 실 제 역사적 성공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 정책과 시행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고종 황제의 중립화 정책과 윌리엄 샌즈의 ‘선개혁 후중립화안’

사대 외교의 틀을 깨고 근대적 자주 국가에 대한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출발을 선포한 대한제국의 고 종 황제는 부국강병을 위한 광무개혁의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그중에서도 당시 동북아정세를 살펴볼 때 러시아와 일본 등의 열강에 의한 영토 분할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중립화 정책이 절실하였다. 따라서 대한제국 시기 고종 외교 방안에 있어 최대 현안은 확고한 중립 정책의 면밀한 수립이었다.

고종 황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여러 가지 여건상 대한제국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일본이나 러시아 그리고 중국 등 인접 국가와는 달리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은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고 또 기왕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미국을 통해서 중립화 정책을 추진하려 고 계획하였다. 물론 대한제국 출범 이전에도 유길 준의 중립화론 등 간헐적으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시행하는 과정을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고종의 직속 기구인 궁내부(宮內府)의 고문관을 했던 샌즈 (William F. Sands)였다. 샌즈는 미국에서 출생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폭넓게 교육받았고 젊은 나이에 외교관으로 발탁되어 일본 도쿄의 미국공사관에서 2 년 근무한 후 1898년 주한미국공사관 1등 서기관으로 한국 근무를 시작하였다. 고종은 중립화안을 추진하는 데 있어 미국인의 시각을 가진 균형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 당시 앨런 주한미국공사의 추천을 받아 1900년 1월 샌즈를 궁내부 찬의관 (贊議官)이라는 공식 직함을 부여하여 임명하였다. 25세의 외교 초년생 샌즈는 계약기간이나 신분 등에 관해 파격적 대우를 받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도출된 샌즈의 중립화안은 좀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소위 ‘선개혁 후중립화 안’으로 일컫는 샌즈의 중립화에 대한 주장은 대한 제국을 일단 국제적 표준에 부합하는 국가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개혁의 논리였다. 샌즈가 생각한 개혁의 분야는 행정, 교육, 경제였고 특히 당시 관료의 임용 과정에 나타난 부정부패가 국정을 가로막는 요 인이라고 판단하였다. 또 동시에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한 차관 도입을 주장하였다. 고종 황제는 미국 의 차관을 도입하여 부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대한제국 문제에 적극성을 가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 이전에 개인 차원에 서 간헐적으로 논의되었던 중립화안을 참고하고 1899~1900년 사이에 정부 내 정책 입안팀들의 연구 보고서를 총정리하여 최종적으로 광무정권의 외교 목표를 설정하였다. 정부의 중립화팀은 주로 민영환 등 친미 계열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업무를 추진하였고 샌즈가 실무의 중요 부분을 담당하였다.

 

4. 고종 황제의 외교 노력을 무력화한 미국의 배신과 기울어진 국제 운동장 

국권과 영토가 침탈당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한 제국이 수립한 중립화 외교 전략은 당시 스위스나 벨기에 같은 나라의 사례를 참고하였고 우선 서구열강들이 공동으로 중립을 보장한 후 영토 침략의 가능성이 있는 러시아와 일본 등 주변국들의 찬성을 더 하여 영구중립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광무정권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대한제국과 고 종 황제가 사실상 깊이 신뢰하였던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거중조정에 대한 큰 기대였다. 이런 외교 방 안은 1899년 앨런공사가 본국에 귀국하기 전에 확립되어 있었는데 사실상 그전부터 미국의 입장은 이미 도와줄 마음이 없었다. 

1899년 고종 황제는 미국공사 앨런을 통하여 미국 대통령 맥킨리(William McKinley Jr.)에게  대한제국 중립화 방안의 보장을 요청하였다. 또 국무장관 인 헤이(John M. Hay)에게도 역시 같은 내용을 부 탁하였지만 모두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과 다르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앨런공사가 서울에 근무하고 있는 동안에 이미 대한제국의 중립화 방안에 관여하지 말라는 훈령이 내려져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중립화 방안에 대한 실무자로서 깊은 이해를 가진 샌즈가 제시한 대한제국의 중립화가 미국에도 실질적 이익이 될 것이라는 의견에 대해서 도 미국 정부는 절대로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였다. 고종 황제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들이 대한제국의 정세를 외면한 근본 적인 원인은 아마도 대한제국을 사이에 두고 벌인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전이 이미 국제관계에 깊숙이 연결된 점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과 러시아 에 대한 각국의 입장과 국익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어쩌면 그 중심에 미국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한 반도의 중립화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다른 방법으로 깊이 관여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한반도 근현대사에서 최대의 비극인 ‘식민지’ 경험과 현재의 ‘분단’ 고통에 미국이 철저하게 관여되어 있다 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03년 러·일 전쟁의 기미가 임박해오고 있는 정세에서 고종 황제는 영구중립의 가능성이 희박함을 판단하고 최소한 전쟁의 폐해라도 방지하려는 생각으로 영구중립안 대신 전시중립만이라도 성사시키려고 생각을 바꿔 노력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에 궁 내관을 파견하여 이들 나라의 의중을 탐색하고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기도 했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세계정세는 외교적 측면에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급한 마음에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드디어 1904년 1월 21일, 글 첫머리에 이야 기한 것처럼 그리고 이글의 본 주제인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세계만방에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 덴마크, 이탈리아, 청국은 접수하였다는 사실이라도 알려 왔지만 막상 전쟁 당사국으로 알려진 일본과 러시아는 접수 자체를 거부하였다. 고종 황제는 전 국토가 아닌 서울만이라도 전시 중립을 확보하고 싶었는데 이마저도 허용되지 않았 다. 그리고 그해 2월 8일 결국 러·일전쟁이 시작되고 나라는 황폐화의 운명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의 속내를 알아챈 고종 황제는 유럽 열강에 눈을 돌려 외교 노력을 계속하였고 만국평화회의와 심지어는 국제적십자사 같은 국제기구에 희망을 걸면서 마지막까지 국운의 방향을 틀어보려고 특사들을 파견하여 외교적 접촉면 확대에 혼신의 노력을 다한 의지의 황제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미국에 대한 외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8차례에 걸쳐 미 국 정부와 접촉을 시도하였다. 워싱턴의 로비스트 니덤(Charles W. Needham),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 미국 공사 모건(Edwin V. Morgan), 대한제국에서 교사와 작가와 편집자로 활동했던 헐버트(Homer B. Hulbert), 파리주재 민영찬 공사, 전 미국공사 앨런 (Horace Allen), 영국 일간지 트리뷴(The Tribune)지 의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만국평화회의 사절 등, 모든 가용인력을 총동원하여 문자 그대로 사력을 다해 미국과 접촉을 시도 하였다. 그러나 친일혐한(親日嫌韓)의 대명사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 대통령을 비롯하여 헤이 (John Hay) 국무장관과 그 후임 루트(Elihu Root) 국무장관 등 미국관리들은 편향적 한국 인식으로 철통같은 마음의 벽을 쌓아두고 고종 황제의 적극적 외교 공세에 철저히 무시로 일관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은 야속하게도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 같은 야비한 외교 행각까지 동원하여 겉 다르고 속 다른 딴 짓에 몰두하였다. 고종 황제는 폐위라는 그의 정치적 생명이 수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중립화의 평화적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하였다. 

 

5. 고종 황제의 열정적 중립화 자주외교 노력을 오늘에 되살려야

을사늑약(1905), 고종 황제의 폐위(1907), 일제 병탄 조약(1910)을 거쳐 비운의 식민지를 경험하였고 해 방과 더불어 더욱더 뼈아픈 분단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대한제국의 아픔은 그렇게 기록되었지만 3.1 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1919)을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다시 살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다.

고종 황제는 성공 여부의 평가를 떠나서 우리 역사 상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중립화 방안을 실행하고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은 최초의 인물이자 유일한 정치가이다. 우리는 대한제국의 역사를 통해서 잠시나마 형식논리상의 중립국가를 경험하였다. 미국 외교의 페인트 모션(feint motion)과 세계정세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중립화를 추진하였던 고종 황제의 외교 노력을 거울삼아 한반도에서 중립화를 달성하고 분단을 극복하는 새로운 역사를 향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가 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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